“있어요, 언니. 그, 길드에서 추천해주신 물건으로.”
“그럼 좀 꺼내줘.”
대체 길드에서 무슨 약팔이에 당한 것인지 기다란 밧줄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든 한세아와 그걸 받아들더니 남자들을 묶는 그레이스. 튼튼한 밧줄로 팔다리를 꽁꽁 묶었다 해도 중급 모험가라면 풀 수 있겠지만 그럴 마음은 없어 보인다.
저 밧줄은 내가 이 강도들을 살려서 데려가겠다는 표현이니까. 밧줄을 자르고 도주하려는 순간 제 동료의 으스러진 팔처럼 골통이 바스러질 수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팔이 으스러진 놈은 목에 줄을 걸어서 나란히 서게 만드니 노예 상인이 된 기분인데. 그렇게 눈을 부라리며 네 강도를 감시하고 있으니 수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글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흐윽, 에노옥-”
“…챙길 건 챙겨야 해, 벨.”
두 여자 중 한 명이 시체를 붙들고 서글프게 우는 동안, 다른 여자는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시체의 주머니와 검을 챙기더니 금속 갑옷의 흉갑까지 챙겨 든 것이다. 아무래도 10층에 오기 위해 갑옷에 투자한 모양.
두개골과 함께 부서진 투구는 시체와 함께 버려둔 채 이름 모르는 여자가 벨이라 부른 여자를 붙잡고 강제로 일으킨다.
그래도 10층까지 올라온 만큼 꿈속에 젖어 사는 망상녀는 아닌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짐을 챙기는 일에 합류하는 그녀. 두 여자가 시체에서 주섬주섬 물건을 챙기는 걸 본 한세아가 그레이스에게 살짝 달라붙는다.
“언니, 저건 뭐 하는 거예요…?”
“여기 10층이잖아. 머리 부서진 시체를 업고 1층까지 돌아갈 자신이 없으니까 돈 될 장비랑 유품만 챙기는 거지.”
“그, 묻어주는 건.”
“다들 너처럼 인벤토리가 있는 건 아니니까.”
마음 같아서는 만월 늑대를 찾아 더 돌아다니고 싶은데 강도랑 엮여버렸네. 덕분에 식사를 마치자마자 도시로 복귀하게 생겼다.
“어, 아니, 난 이게 완전 판타지 세상일 줄 알았는데. 아무리 19세라지만 여기까지 판타지일 필요는 없지 않나? 설마 이런 강간범 때문에 자살하지 않아도 되는 리셋 버튼이 있는 거야? 터치나 음성 인식 없이 되는 것도 그런 부분 때문이고? 미쳤네 가상현실.”
시청자들이랑 대화하느라 바쁜 한세아와 생각할 게 있는지 침묵을 유지하는 그레이스. 그 덕에 1층으로 향하는 길은 끙끙 앓는 팔 병신 강도의 목소리와 훌쩍거리는 여자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그렇게 가끔 마주하는 사람들의 놀란 시선을 받아들이며 도착한 탑의 1층.
“먼저 나가서 길드에 있어. 아니면 해산해도 좋고. 나는 이 녀석들을 경비대에 넘겨야 하니까.”
“길드에서 기다릴 테니까, 넘길 때 같이 있어도 돼?”
“물론. 그런데 경비대는 왜?”
“아, 그, 경비대가 뿔늑대를 사냥했다길래 호기심이 생겨서.”
두 여자가 감사 인사를 하고 훌쩍거리며 떠났고, 한세아는 어김없이 눈동자를 빙글 돌린 뒤 말을 절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경비대라는 단어에 시청자들이 호기심을 느낀 모양. 하기야 정상적으로 플레이하는 사람이라면 경비대랑 엮일 일이 없겠지.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무력 단체다 보니 초보 모험가가 엮일 일은 없다. 평화로운 동네에 사는 학생과 경찰청 본청만큼 관계가 없을 테니까.
다른 방송에서는 볼 수 없는 걸 보여주는 방송. 시청자들이 한세아에게 기대하는 건 그런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양팔이 박살 난 채 목줄을 차고 훌쩍훌쩍 우는 들창코 추남을 보고 즐기는 취미가 있으려고.
“그런데 왜 우리만 먼저 나가야, 해?”
“그야 이 녀석들의 탑 출구는 우리랑 다른 곳일 테니까.”
“아, 그렇네.”
어색한 거짓말에 이은 어색한 반말.
뭔가 고민하는 게 있는지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로 한세아가 멀어져간다. 무슨 착각물 소설의 등장인물처럼 그레이스는 다시 한세아의 옆에 착 달라붙어 토닥여주는 중.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가 세상의 더러운 곳을 목격했다고 생각하나 보다.
“모험가 패, 어떤 새끼가 들고 있냐.”
“저, 접니다.”
그 뒤 냄새나는 사내새끼의 품 안에서 꼬릿한 모험가 패를 꺼내 들어 버튼을 눌렀다. 화살표의 방향이 한세아와 그레이스의 정 반대가 아니라서 다행이네.
죄인이라도 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아니 시발, 살인강도에 강간범이면 죄인 맞구나.
아무튼, 시커먼 사내 네 놈이 고개를 푹 숙이고 초원을 말없이 걷는다. 통로에 좀 가까운 곳으로 들어왔는지 생각보다 이르게 도착한 상황. 발목까지 오는 야생초 사이로 보이는 기하학적인 문양.
나 없이 탑 밖으로 나가면 도망칠 생각이라도 하는지 눈깔이 번들거리는 녀석의 오금을 그대로 걷어찼다.
“큽, 아아아악!”
“왜, 왜 이러십니까?!”
“걱정하지 마, 안 죽여. 죽일 거면 여기까지 끌고 오지도 않았어.”
종아리나 오금을 걷어차 바닥을 뒹구는 놈들의 발목을 껌 밟아 떼듯이 밟는다. 빠드득하고 불길한 소리와 함께 으스러지는 녀석들의 양 발목. 뛰어서 도망치기는커녕 걷지도 못할 수준으로 밟아버렸다.
이 새끼들은 내가 병신도 아니고 자기들 네 명만 밧줄에 묶어 밖으로 내보낼 거라고 생각한 걸까.
“초원에서 죽기 싫으면 알아서 기어나가.”
※
옆에서 다정하게 다독거리는 그레이스 언니의 말도 흘려들으며 한세아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평소에는 꽤 쓸만한 조언이 가끔 보이던 채팅창도 지금만큼은 쓸모없는 개소리로 가득 찬 것 같은 기분.
그녀가 품게 된 고민은 새롭게 개방된 게임의 시스템 때문이었다.
-방밀전사방밀전사방밀전사
-팔라딘인데 왜 신성 스킬은 없음?
-뭘 고민해 무적권 도발이지
-시발 동료 스킬이 가챠라더니 직접 뽑아쓰네
-덱 빌딩 요소가 왜 여기서 튀어나옴
아무래도 이 불친절한 게임은 동료 NPC의 스킬을 보여주지 않는 게 아니라, 플레이어가 직접 뽑게 한 것 같았다. 인연 레벨이 올랐다는 시스템 창이 뜨고 나서야 롤랑의 스킬창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롤랑이 가지고 있던 스킬은 하나, 「불굴의 기사」라는 거창한 이름의 패시브. 물론 성능도 거창한 이름과 양심 없는 스탯처럼 어마어마했다. 아무 조건 없이 받는 피해 감소, 근접 공격의 경우 롤랑의 체력과 방어력에 비례하는 고정 데미지 반사.
‘반사 데미지는 보통 레이드 특화 스킬이 아닌데. 대인전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스킬 트리인가?'
롤랑은 강했다. 스탯도 높고 개인의 전투 기술도 있으며 스탯과 별개인 판타지 특유의 마력 강화를 통한 육체 능력도 있었으니까. 10층의 보스를 맨손으로 쪼개 죽이는 그 괴력은 높은 스탯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점이 되려 한세아를 고민에 빠지게 했다.
“아냐, 님들 좀 들어봐. 롤랑센세 스펙에 받피감 패시브면 이미 탱킹은 차고 넘치는 거 아닐까? 솔직히 저 스탯으로 탱킹을 못할 보스가 탑에서 나오면, 다른 게이머들은 거기 절대 못 뚫을 거 아니야, 어?”
단단하다 못해 역겨울 수준으로 튼튼하게 버프?
딜 능력을 보조해 줄 탱커용 체력 비례 공격 스킬?
아군을 보호하고 유틸성을 늘려줄 다양한 디버프?
혼자 다 해 먹는 만능 탱커를 만들어줄 회복 기술?
-확실히 패시브만 보면 PVP 강캐인데
-스탯만 보면 그냥 강캐자너
-시발 배부른 고민이 이런 뜻이구나
-욕하면 밴인거 아는데 욕설마렵네
-하긴 6★ 없이 못깨면 동접자 1명됨
자기가 원하는 대로 빠른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채팅창에 폭동이 일어났지만, 한세아는 꿋꿋하게 고민을 이어나갔다. 롤랑이 있다면 그녀는 정말 진지하게 세계 1위 랭커로서 비비게임즈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어? 모바일 가챠 겜 안 해봤어 다들? 저 패시브 보면 걍 대인전 때려 잡으라고 나온 거니까 그쪽으로 컨셉을 맞춰야 한다니까? 솔직히 지금 저 대지분쇄 달리기 봐봐. 저 몸으로 못 막는 보스가 있으면 게임이 잘못된 거임.”
그렇게 고민을 하면 할수록 한세아가 지닌 게이머의 감은 점차 대인전 세팅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당장 그녀의 파티만 봐도 대인전에 능한 사람이 없으며, 조금 전만 해도 강도로 변한 모험가들을 만나지 않았던가.
‘아니, 탱커가 받는 피해 감소 있으면 된 거지. 나중에 파티에 사제도 영입한다던데.’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주지 않고 비난을 날리는 시청자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 정도에 마음이 꺾일 거라면 운동 영상에 달린 섹드립 가득 담긴 모욕에 방송을 접었을 테니까.
그레이스 언니는 탐색 스킬을 가득 채우고, 한세아 본인은 디버프 마법을 잔뜩 익혀둔 뒤 사제를 영입해 보호막과 회복 마법을 배워 버틴다. 그러면 무려 6★인 팔라딘 롤랑 센세가 모든 걸 해결해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시청자들의 경악 어린 채팅을 안주 삼아 한세아가 홀로그램 버튼을 눌렀다.
딸깍.
발목을 분지른 네 명을 놔두고 초원을 적당히 달려 탑 밖으로 빠져나왔다. 어째 몸이 근질근질하며 컨디션이 좋아진 것 같지만 기분 탓이겠지. 설마 냄새나는 아저씨를 두들겼다고 기분이 좋아지겠어.
나는 그런 취향이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