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수습 사제라지만 아이린에게 너무 예의가 바른 게 아닌가 싶은데. 아이린에게 내 소식을 이야기해준 게 자신이라는 듯 활짝 웃으며 손을 내미는 남자. 이제 막 신전에 들어온 수습생답게 내 얼굴을 보고 애들처럼 들떠있는 게 느껴진다.
신앙에 몸 바쳤다 해도 모험에 대한 동경심은 버리지 못한 앳된 얼굴. 성법 좀 배우면 탑으로 직행할 것 같은 수습 사제의 손을 쥐고 흔들어주었다.
“모험가 롤랑 님! 지난번 뿔늑대로부터 무고한 사람들을 구해주셨다는 그 의로움은 신전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제 귀까지 들려오더군요.”
“…?”
“하하, 겸손하시긴. 도시의 경비병들보다 한발 앞서 외면받고 있던 골목길의 빈민들을 구해주신 분답군요.”
뿔늑대를 사냥하고 다닌 건 맞지만 무고한 사람들을 구해줬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잠시 말을 멈췄더니 오해를 한 수습 사제가 수다스럽게 설명을 이어나간다.
우리가 뿔늑대를 잡으며 돌아다녔던 뒷골목. 그곳은 실력도 돈도 부족한 연금술사와 대장장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돈 없는 사람들이 엉성하게 집을 지어 생활하는 곳. 자연스럽게 도시의 빈민들이 숨어 살게 된다는 거지.
뿔늑대를 사냥할 땐 딱히 보진 못했는데, 감 좋게 전부 숨어 있었나. 하기야 뒷골목에 사는 빈민이 그 정도 눈치가 없다면 뿔늑대가 나타나기 전에 죽었겠지. 아무튼, 노리고 구한 건 아니지만 신전 쪽에서는 골목부터 들어간 나를 좋게 보는 모양이다.
“일단 주방으로 가서 음식 재료부터 내려 놓는 게 좋겠어요.”
“아, 손님을 너무 오래 붙잡아 둘 뻔했네요. 그런데 음식 재료라뇨?”
은근히 수다스러운 수습 사제로부터 나를 구해준 건 수습 사제의 말을 타이밍 좋게 잘라먹는 아이린. 수습 사제의 목소리보다 훨씬 작은 목소리였지만 재주도 좋게 알아들은 수습 사제가 곧바로 한 걸음 물러나 일행들을 바라본다.
그야 한세아부터 나까지 전부 맨손으로 왔으니 음식 재료 운운하는 아이린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겠지. 그래도 말은 잘 듣는지 곧바로 몸을 돌려 주방으로 안내를 하기 시작한다. 같이 온 아이들은 다른 수습 사제들이 데리고 사라진 상황.
사제들과 아이들의 식사를 전부 담당해야 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훨씬 커다란 주방이 우리를 맞이한다.
“밀가루와 야채, 고기가 좀 있는데 어디에 내려두면 될까요?”
“고기는 저쪽 창고에 매달면 되고, 나머지는 이쪽에 두면 되는… 우앗?!”
주방에서 분주하게 일하고 있던 수습 사제들과 수녀들이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며 입술을 꾸욱 깨무는 한세아. 저거 슬슬 인벤토리 가지고 천재 마법사인 척하는 일에 재미를 좀 붙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레이스가 인벤토리를 볼 때마다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어화둥둥 칭찬해줘서 그런 것 같았다. 확실히 살림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매직 미사일보다 인벤토리가 대단한 마법처럼 보이겠지. 근데 마법사가 봐도 아공간 마법이 훨씬 대단하지 않나?
“세상에, 허공에서 이렇게 많은 밀가루가….”
“저 마법이 있으면 장 볼 때 엄청 편하겠어요.”
“아이린 님의 손님분들이라 했던가? 여신님께서도 어여삐 봐주실 겁니다.”
한 마디씩 던지는 주방 사람들의 인사를 모두 들은 아이린이 내 소매를 잡아 이끈다. 벽에 걸려 있는 종교화 따위를 구경하며 도착한 곳은 커다란 방. 아이린이 문을 열기도 전부터 나는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감각 예민한 그레이스도 마찬가지였는지 어색하게 하하, 하고 웃어 보이는 그녀. 슬그머니 뒤로 빠져 한세아를 앞으로 보내는 게 얄미울 지경이다. 치사하게 혼자 쏙 빠져나가려고.
“――서 튀어나온 고블린 들을, 마리가 막아 세웠죠. 그녀는 숙련된 메이드이자 솜씨 좋은 도적이니까요. 앞에서도 뒤에서도 괴물들이 수풀을 헤치고 튀어나오는 그때―.”
문을 뚫고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아까 만났던 샤를롯 캐번디시의 목소리. 아이들을 모아놓고 모험담이라도 들려주는지 호흡할 시간조차 없이 좔좔 이어지는 무용담이 인상적이다. 귀족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거리의 음유시인으로 먹고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
설마 나를 보고 싶다던 사람이 저 아가씨는 아니겠지. 그런 내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내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속닥거리는 아이린. 너무 자연스럽게 붙잡아서 왜 소매를 잡아 이끄는지 의문을 가지지도 않았네.
“신전의 아이들이, 롤랑 님을 무척이나 보고 싶어 해요. 고아인 아이들이 신전에서 나가게 되면 신전을 도와주시는 좋은 분들의 가게에 고용되기도 하지만… 일자리가 부족하면 모험가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혹시 폐가 되었다면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듯 아래로 푹 숙어진 고개와 파르르 떨리는 기다란 속눈썹. 그 가냘픈 모습에 차마 쓴소리를 할 순 없었다.
내 행동방침이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인다고 정해놨어도 이런 미녀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덩달아 마음이 약해지는 게 남자의 마음 아니겠는가. 어차피 신전은 대외적 이미지 관리를 위해 한 번쯤은 방문할 생각이었고.
모험담을 늘어놓는 것만으로 신전의 호감도를 올릴 수 있다면 남는 장사다. 저 말 많은 귀족 아가씨랑 같이 있으면 피곤하긴 하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확실하다는 뜻. 아이린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살짝 웃어준 뒤 문을 열었다.
“―렇게 고블린들을 물리치고 움막을 뒤져보니 과일이 잔뜩 있는 게 아니겠어? 탑 안에서의 마물들은 갑작스럽게 등장하긴 하지만 무언가를 먹고, 휴식을 취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거든. 그래서 저층의 뿔여우는 뿔토끼를 사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해. 하지만 탑에서는 몬스터의 시체가 남지 않으니 먹지는 못 한단다. 그래서 굶주린 뿔여우들이 모험가에게 덤벼드는거야. 아, 그리고 이번에 거리에 나타난 뿔늑대 들도――”
꽤 넓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어린아이들. 모험가에 관심 있는 게 남자아이들만은 아닌지 어린 여자애들도 몇 명 섞인 채 인형을 꼭 껴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중심에 앉아 쉴 새 없이 입을 여는 건 역시나 분홍 머리카락의 귀족 아가씨, 샤를롯. 검푸른 머리카락의 메이드 도적은 잡일을 도와주러 갔는지 방 안에 보이지 않는다.
11층의 고블린 부락을 처리하고 움막에서 전리품을 챙긴 이야기인가. 기껏 해 봐야 아이린이 이적하기 전, 4인 파티로 고블린 열댓 마리를 사냥하고 움막을 뒤진 이야기. 요약하자면 한 문장으로 끝날 이야기를 거의 5분 넘게 떠들고 있으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분명 나 대학교 다닐 땐, 3분 꽉 채워서 발표하기도 힘들었는데 어떻게 대본도 없이 저렇게 말할까. 어쩌면 그녀의 상태창을 보면 ‘수다쟁이’ 샤를롯 같은 게 떠 있지는 않으려나.
“그런 위험한 뿔늑대를 사냥하고 도시의 뒷골목을 정리해주신 게 저기 계신 롤랑 님이란다.”
“어, 우와아!”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며 익살스럽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다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화제를 돌리는 샤를롯. 그 덕에 모여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훅 몰려든다. 그래도 예절 교육은 빡세게 되어 있는지 우르르 모여들지는 않네.
거리에서 뛰어놀던 애들보다는 좀 더 얌전하고 점잖은 모양새. 밖에서 뛰어노는 애들이랑 안에서 노는 애들로 나눠진 결과인가.
여전히 소매를 잡은 채 이끌어주는 아이린을 따라 아이들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 뒤를 어색한 표정으로 따라오는 한세아와 그레이스. 아이들을 돌보는 일과 연이 없었을 것 같은 두 사람이 초롱초롱한 시선에 움츠러드는 걸 보니 좀 재밌네.
“어제,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지?”
“롤랑 형아가 혼자 11층에 있었던 거!”
그래도 다짜고짜 내게 모험담을 풀어내라고 할 생각은 없는지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아이린. 작은 목소리지만 음색과 발음이 워낙 좋다 보니 아이들이 숨죽여 집중하는 게 느껴진다.
탑에서의 모험에 호기심을 느낀 아이린. 그런 아이린을 도와주는 평소 신앙심을 증명하기 위해 신전에 봉사 활동을 오는 마법사 아가씨, 샤를롯과 그녀의 충성스러운 메이드 마리. 24층의 탱커는 귀족 아가씨인 샤를롯이 돈으로 고용한 사람이라고 한다.
내가 한세아를 키워주듯 아이린의 고행을 위해 1층부터 아이린을 데리고 차근차근 탑을 오르던 와중 뿔늑대가 나타나 시민들을 물어 죽이게 된다. 이에 신앙심 깊은 샤를롯과 아이린은 만월 늑대의 흔적을 찾기 위해 10층과 11층을 무작정 헤매게 되는데――
“그때 만나게 된 게 여기 계신 롤랑 님이란다. 모험에 대해 궁금한 게 있는 사람?”
한 명도 빠짐없이 손을 드는 걸 보니 말을 좀 많이 하게 생겼네. 아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난감하게 웃자 아이린과 샤를롯이 나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는다.
그런 것 치고는 샤를롯의 시선이 좀 묘한데.
신전에서의 저녁은 생각보다 무난하게 흘러갔다.
애들의 시선을 받으며 인벤토리에 장난감을 넣었다 뺐다 반복하는 한세아, 익숙한 손놀림으로 청소를 돕는 그레이스, 그리고 적당히 탑 외부 의뢰로 어느 남작령의 오크를 토벌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나.
의뢰를 빙자한 통수를 빼고, 민간인 피해가 잔뜩 있던 이야기 빼고, 애들한테 들려줄 수 있는 수위를 찾다 보면 얼마 안 남거든. 골짜기의 좁은 길을 틀어막은 내가 모루 역할을 하면 기사들이 오크를 짓밟아버리는 정석적인 모험담.
“그럼, 내일 아침 모험가 길드에서 만나는 거로.”
“네에,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돈을 좀 써서 비싸고 신선한 음식 재료를 구매한 덕분에 여관 음식보다 훨씬 맛 좋은 식사를 대접받은 우리는 신전 증표를 하나씩 손에 든 채 아이린과 헤어졌다. 수녀인 그녀는 당연하게도 신전에서 머무르니까.
아이린이 목에 걸고 있던 증표보다는 조금 큼지막한 녀석. 순금은 아니고 도금이겠지만 황금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패는 사람을 들뜨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카메라를 제 얼굴 앞에 띄워 놓고 이리저리 둘러보는 한세아의 질문.
“이건 어디에 쓰는 거야? 모험가 패처럼 신분증으로 쓰나?”
“비슷하지. 이거, 탑 바깥의 의뢰를 처리할 때 엄청 편해.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애들 돌봐주고 받기에는 과분한 물건이지. 아마 뿔늑대를 처리한 게 아이들을 구해준 행위처럼 느껴져서 신전이 호의를 베푼 것 같아.”
아니면 예비 성녀 아이린의 입김이 닿았던가.
주민등록증도 CCTV도 없는 세상이다. 외지인의 신분을 증명하는 방법이 한정되어있다는 뜻이지. 가난한 농부들이 금화 몇 개짜리 마도구로 마을에 오는 외지인을 검문할 리 없으니까 믿을 수 있는 건 이런 공신력 있는 기관의 심볼.
강도질을 하려고 신분을 위조하는 놈들이 많았지만, 여신이 신성력을 내려주고 이단 심문관이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는 세상이다. 위조하려면 상단이나 모험가 패를 위조하지 굳이 신전의 심볼을 위조하는 미친놈은 극소수.
비슷한 악행이라 해도 모험가를 사칭하면 현상금 정도가 붙고 끝나지만, 사제를 사칭하면 눈알 뒤집힌 이단 심문관들이 우르르 몰려오거든. 경비대에 잡혀가면 감옥살이에 노예행이지만, 이단 심문관이 오면 바로 고문실행이다.
“외지인을 꺼리는 마을도 이 패는 어지간해서 외면하지 않거든. 물론 아이린이 함께하게 되면 쓸 일은 별로 없겠지만.”
그렇게 신전의 심볼에 대해 설명하며 어둑한 거리를 걸었다. 내일 만월 늑대의 흔적 분석이 끝나면 보스전을 치르게 될 거고, 그다음에 애들 장비를 중급 모험가용으로 싹 맞춰주면 되겠네. 저금은 충분할 테고 부족하면 내가 좀 보태주지 뭐.
※
숙소의 침대에 누워 내가 할 일은 곧바로 게시판을 여는 것이었다. 현대 문명과 10년을 단절되어 살아오다가 인터넷 게시판을 쓸 수 있게 되었더니 중독성이 장난 아니네. 고작 한세아의 방송국 게시판밖에 못 들어가지만 그게 어디야.
한세아의 가상현실 게임 방송은 아무래도 진행도가 세계 1위다 보니 게시판 거주자도 엄청나게 늘어난 모양새. 몸으로 때우는 가상현실 게임의 매운맛 때문에 미래시를 원하는 게이머들이 전부 한세아의 방송으로 몰려들었다.
오늘 게시판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건 두 명. 첫 번째는 신전의 고아들을 돌보고 있던 귀족 영애 샤를롯이고, 두 번째는 다른 방송인 김석현이었다.
―수상할정도로단검을잘쓰는메이드
―핑챙아가씨 떴냐
―이 새끼 소설 좀 읽어본거 같은데
―저거 칭호 잘못된거같음
―게임적 허용 좆되네
새롭게 등장한 미녀에게 시선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이야기. 그게 아가씨와 메이드라는 고전적인 조합이라면 더욱더 시선이 모일 수밖에 없다. 물론 2★‘ 야심가’ 샤를롯과 1★ ‘메이드’ 마리를 파티에 넣자는 사람은 없었지만, 게시판의 절반가량은 그녀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