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날 곳을 정하지 않았지만 걱정은 되지 않는다. 짧은 시장 데이트가 끝나고 해가 어둑하게 질 무렵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카메라 드론으로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아니까 우연인 척 찾아오겠지 뭐.
“아, 저기 있네요.”
“롤랑! 그레이스 언니!”
역시나 카메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시장에서 나올 즈음 거리의 끝에서 툭 튀어나오는 나머지 일행들. 신전을 방문했다 시장 거리로 와서 우리를 찾을 생각이었다며 자연스럽게 합류한다.
그렇게 모두 모여 마부가 알려준 여관으로 향한다. 딱히 대단할 것 없지만 가장 깔끔하고 비싸다는 여관. 시골 마을 마부가 비싸다고 말하지만 그래 봐야 평민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곳이다.
적당히 채워져 있는 여관의 홀에 앉아 쪼르르 달려온 꼬맹이에게 시장에서 군것질하고 남은 동전을 팁으로 던져주고 음식을 시켰다.
“신전에 내일 아침 모험가의 도시로 떠나는 마차가 있다고 하네. 그거 타고 가면 될 것 같아.”
“타이밍이 좋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소시지를 썰어 먹으며 대화를 나눈다. 물론 카메라가 나를 비추지 않을 땐 슬쩍 눈을 굴려 채팅창을 살펴보고 있었지만. 나와 그레이스의 데이트는 둘째 치고, 아무래도 한세아가 아이린을 공략하고 있었나 보다.
물론 공략이라는 게 비비고 보비는 그런 부류의 공략이 아니다. 채팅창에서 열심히 도배하는 시청자들의 의견처럼 파티원을 떠나지 않게 만드는 호감도는 LIKE만으로 충분하니까.
모험가로서 성공할 떡밥이 보인다든가, 일 끝나고 마시는 맥주 한 잔이 마음에 든다든가, 빡세게 사냥해서 은퇴 자금을 한밑천 벌어두려는 데 도움이 된다든가. 그 정도의 호감과 멱살 잡고 싸우지 않을 인간관계 정도면 될 거라는 의견들.
-뇌피셜로 도배 작작 좀 해
-그냥 친해지는 수준이면 된다니까?
-친해진다는게몬데?
-선택지랑 호감도 시스템이 있으면가능
-친해지고 싶어서 친해졌으면 나도 클럽다니는 인싸였지
소시지를 씹으며 채팅창을 곁눈질하는 동시에 평소보다 거리감이 가까운 아이린과 한세아를 구경한다. 아무래도 나는 흥미를 느끼고 먼저 접근했기 때문에 공략 우선순위가 낮나 보네.
롤랑은 마법사를 영입해 모험을 재개할 생각이니 떠날 리 없다. 그레이스는 롤랑 곁에 붙여두면 되니 아이린과의 관계를 돈독히 만들자. 그녀는 자상하고 돌봐주는 걸 좋아하니 정이 붙으면 떠나지 않을 것이다, 뭐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네.
‘사람이 참 투명하긴 해.’
속이 보인다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 해서 속내가 음흉해 호감이 안 가는 것도 아니고 외모와 어우러져서 그런지 되려 매력으로 느껴진다. 애초에 비호감이었으면 방송으로 성공하지도 못했겠지.
식사를 마치고 남장여자 케이든을 배려해 가장 비싼 1인 1실을 다섯 개 잡는다. 사치스러운 행위에 아이린이 조금 당황한 것 같지만 로그아웃을 해야 하는 한세아와 남장 중인 케이든이 곧바로 받아들이자 어영부영 떠밀려 사라진다.
그렇게 여관에서 하루를 보내고 마차를 타고 다시 한번 야영하며 도시로 돌아와 하루 푹 쉰 다음 날, 탑을 탐색하는 일상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뭐야, 왜 아직도 여기에 있어요?”
“불만 있어, 새꺄?”
익숙한, 보기 힘든 얼굴들이 다 모여 있다.
※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험가 도시에서 10년을 보낸 내게는 꽤 많은 지인이 있다. 길드의 엘리스와 용병단의 레베카처럼 탑을 오르고 의뢰를 해결하고 돈을 모으다 보니 알음알음 생겨버린 인맥.
또다시,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 대부분은 탑 위쪽에 있다. 30층과 40층의 안전지대 또는 43층 최전선에서 열심히 몬스터를 사냥 중일 것이다. 그러니까 알고 지내는 사람은 많지만 만날 사람은 없는 게 나 롤랑의 인간관계.
분명 그랬어야 했는데….
새빨간 머리카락을 짐승 갈기처럼 휘날리며 달려와 내 등판을 퍽! 하고 후려치는 레베카.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일행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한다. 특히 레베카의 용병단에 몸담고 있던 케이든은 움츠러드는 게 확연히 보일 정도.
“머리 안 쓰는 건 여전하네. 얌마, 게이트 같은 게 생겼는데 나 혼자 구경 왔겠냐고.”
“다들 멀끔해져서 못 알아봤죠.”
“간만에 때 좀 미니까 시원하더라.”
낄낄 웃어 보인 레베카가 제 뒤편을 엄지손가락으로 쓱 가리킨다. 의뢰 게시판이 아니라 어느 테이블 하나를 구경하느라 바쁜 초보 모험가들. 시선이 모여 있는 테이블에는 어딘가 익숙한지만 알아보기 힘든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그러니까 내 지인들 대부분에게 별이 붙었다 이 소리지.
“거 노인장, 혼자 좋은 거 먹었는지 때깔이 곱수다?”
“그쪽이야말로 주름살 쫙 편 게 탑에서 뭐 좀 주워 먹은 거 아니고?”
테이블에 앉아 낄낄 웃고 있는 새하얀 수염에 회색과 흰머리가 뒤섞인 노익장과 모든 털이 새하얀 늙은 마법사. 회색 머리의 남자도 새하얀 마법사도 노년 간지라는 단어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중후한 멋을 풍긴다.
물론 내가 알고 지내는 할아버지 중 저렇게 잘생긴 사람은 없었다. 다만 멋들어진 흉터나 장비, 말투 따위로 유추를 할 뿐이지. 뒷산 약수터 할아버지에서 실버 모델로 진화한 만큼 별도 화끈하게 붙었는지 시청자들이 난리가 났다.
“엉덩이 무거운 양반들이 다 같이 내려와서, 왜 나를 찾아와? 마탑으로 갈 것이지.”
“내 엉덩이가 좀 크고 무겁긴 해. 존나 탱탱하지.”
“어유, 숭한 년.”
거기에 자연스럽게 레베카가 합류해 대화를 나누니 초보 모험가의 눈동자가 연예인을 만난 팬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테이블에 한두 명씩 합류하기 시작하자 감탄성조차 숨기지 못할 정도로.
모험가 길드장 5★ ‘노련한 노익장’ 그레이엄
대규모 용병단을 이끄는 5★ ‘용병 여왕’ 레베카
연구를 위해 43층까지 간 5★ ‘진리의 탐구자’ 안테노르
정보 길드의 높으신 분인 5★ ‘소리 없는 속삭임’ 존 스미스
나머지 사람들도 최소 4★이다 보니 열 명 남짓하게 앉아도 다 합치면 별이 어질어질할 수준. 한세아와 함께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으니 의자에 나른하게 기댄 여자 하나가 내 쪽을 향해 손짓한다.
“롤랑? 거기서 뭐 하냐.”
“뭐 하긴, 구경하지. 아침 댓바람부터 아는 사람들 다 모여 있네.”
“하긴, 다들 난리가 나서 뛰쳐 내려왔거든.”
내려간 눈꼬리가 순둥순둥해 보이는 강아지상 아이돌 같은 미녀. 이런 미녀는 기억에 없지만 특색 있는 장비 덕분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비스듬히 세워도 사람보다 길쭉한 장창이라니, 내가 아는 사람 중 이런 장비를 쓰는 건 딱 한 명이거든.
릴리 뎁, 하급 귀족 가문의 아가씨로 태어나 정략결혼을 하기 싫다고 창 한 자루 들고 가출한 여자.
“오, 옆에 있는 게 너희 파티원이야? 마도구 마도구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마법사를 파티원 삼았구나. 끝까지 올라올 거냐?”
“그래. 데리고 43층까지 갈 거다.”
“너 올라올 즈음이면 한 45층 가 있겠네.”
아름다워진 건 둘째 치고, 탑에서는 꽤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던지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팔뚝을 휘감아오는 부드러운 손길. 어느새 다가온 그레이스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몸을 기대온다.
어, 어? 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시작된 두 사람의 대화.
“그쪽 분도, 롤랑의 파티원?”
“네. 탑에서 롤랑을 만나 파티로 받아달라고 부탁했더니 흔쾌히 받아들여졌거든요.”
“하긴 탑에서는 탐색꾼이 필수니까요.”
“네, 제가 필수적이긴 하죠. 롤랑에게 말이죠.”
생글생글 웃고 있는 두 사람이지만 주변 공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팔뚝에 말캉한 감촉과 함께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딱 붙어 있어도 춥다는 생각이 절로 들 지경.
내가 구시대식 청춘 로맨스 코미디 만화 주인공도 아니고 이토록 적나라한 호감도 표현을 못 들은 척 넘어가진 않지.
문제가 있다면 이 장소에 모여 있는 사람들. 모험가 길드장부터 마탑의 높으신 분, 뒷골목에서 끗발 좋은 아저씨와 용병단 단주까지 다양하게 모여 있는데 저 사람들이 무슨 드라마 보는 아줌마처럼 나를 구경하기 시작했거든.
“저놈은 탑 내려가더니 얼굴값 하고 있네.”
“우리 쪽 애들도 꼬시더니 남의 파티원도 꼬신 거야? 어쩐지 쟤 정보가 좀 비싸게 팔리더라.”
“그래? 정보 길드원 입에서 비싸다는 말이 나올 줄이야.”
“귀족 모시는 시종들이 와서 이것저것 물어보더라고. 밤이 외로운 부인들이 꽤 많나 봐.”
스미스가 히죽히죽 웃으며 너스레를 떨자 언제 말다툼을 했냐는 듯 내 쪽을 바라보며 낄낄 웃는 노인네들. 가챠 캐릭터가 되면서 주름살이 없어지더니 체면과 체통도 같이 밀어버린 건가.
물론 나를 보고 짓궂게 낄낄 웃는 건 저 노인네들만이 아니었다. 여자 둘 사이에 껴서 얌전해진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채팅창도 나를 보고 온갖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한 상황.
-이게 어떻게 현실성 넘치는 게임임? 찐또배기 판타지네
-별 하나에 애인 하나임?
-어떻게팔라딘이난봉꾼어떻게팔라딘이난봉꾼
-선생님 장르가 아침드라마로 바뀐것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