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75)

이런 난장판을 깔끔하게 정리해 준 것은 테이블에 엎드려서 깔깔 웃고 있던 레베카.

 “야! 방 하나 잡아줄 테니까 셋이 가서 질펀하게 함 뜨던가! 아니면 내가 침대 좋은 여관 아는데 넷이서 갈까?”

 “…아뇨, 게이트 관련 회의를 더 늦출 순 없겠죠.”

 “롤랑, 의뢰는 몇 개 확인해 놨으니 한동안 게이트 쪽으로 직행해도 될 것 같아.”

서글서글한 인상의 미녀 두 명이 기 싸움을 해 봤자, 순수하게 미친년이 끼어드니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해소된다. 레베카의 짐승 같은 면모가 도움이 될 날이 오다니.

오래간만에 그리운 얼굴들… 이라기보단 성형한 것 같은 얼굴들을 보게 되었지만, 탑에서의 모험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이 세상에 똑 떨어지자마자 미남이었던 나와 달리 점점 멋지고 아름다우며 젊어진 주제에 이상함을 못 느끼는 게 좀 웃기긴 했지만 모험과는 상관없지.

그림의 떡이라는 속담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도록 넘쳐나는 5★들을 구경만 하게 된 한세아가 바들바들 떨다 채팅창에 욕심보가 그득하다고 비난이 도배 된 것도 모험과는 상관없고.

 “아니, 니들도 봤잖아! 그 화려한 스탯창을 보고 욕심이 날 수도 있는 거지….”

-그러니까 욕심보가 그득하다는거지

-니가거기서욕심을내면 ㅋㅋ

-있는년이 더하다더니 진짜루다가

-모험하지말고여관가면안됨??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채팅입니다]

 “원래 사람이 욕심이 많아야 성공하는 거야. 니들도 어? 겜 하다가 좋은 거 하나 뽑으면 지금이 타이밍인가 싶어서 현질 마렵지 만족하고 그만 지르는 놈들이야? 100% 더 지를 거 아니야.”

입으로는 열심히 시청자들과 소통을 하지만 긴장의 끈은 놓지 않고 있는 모습. 이끼늑대가 기습해 와도 반격 타이밍은 놓치지 않으니 신기할 수준이다. 이 정도면 나 없이도 랭커는 되었겠구나- 싶을 정도.

케이든까지 합류한 파티는 합이 맞아들어가기 시작하니 그 어떤 몬스터가 나오더라도 석석 썰어 넘기기 시작했다. 약점도 없고 양심도 없는 뚫리지 않는 보호막이 떡하니 파티의 중심에 존재하니까.

 “오늘따라 이끼늑대가 많이 나오고 투구사슴은 잘 만나질 못하네. 의뢰는 대부분 투구사슴의 마석을 요구하던데.”

 “그런데 겉으로 보면 똑같던데 마법사들은 그걸 아는 거야?”

 “안에 담긴 마력이 달라서 분류되던데요.”

그레이스의 질문에 인벤토리에 따로 담긴다며 작게 중얼거린 한세아가 슬쩍슬쩍 이쪽 눈치를 본다. 왜 저러나 싶어 나 또한 그녀를 바라보니 눈을 마주칠세라 시선을 푹 내리까는 그녀.

…진짜 뭐지?

딱히 비밀로 할 것도 아니고 시청자들조차 잠깐의 방송 화면만으로 알아차릴 수준. 그 수상한 모습, 좀 더 명확히 표현하자면 잘못을 저지르고 모른 척하는 강아지 같은 행동에 곧바로 말을 걸었다.

 “왜 그래?”

 “어?! 아냐, 아무것도.”

 “그렇게 반응하면서 아무것도 아니라니.”

일단 본인이 필사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휘휘 내젓길래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인 고민이 있을 수도 있으니 꼬치꼬치 캐묻는 게 더 이상하지. 방송 관련이면 어차피 내 귀에 들리는 데다 채팅창과 게시판, 인터넷까지 있으니 결국 알 수 있을 테고.

모험에 지장이 가는 건 아니니 내버려 둬도 되겠지. 저래 보여도 몬스터가 나오면 그레이스의 화살과 비슷한 속도로 매직 미사일을 때려 박으니까. 게이머 특유의 반응속도가 가상 현실에서도 통하는 건가.

다른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품 안에서 투구사슴 한 마리가 다리를 바둥거리다 꾸어엉- 서글픈 소리를 내며 마석으로 변한다.

 “아, 찾았다!”

 “벌써? 오늘은 운이 좋네.”

 “다음 층을 조금 탐색하다 돌아갈까, 아니면 돌아가는 길에 마석을 더 모을까?”

 “다음 층 탐색은 그다지 의미 없을 것 같으니까 돌아가는 게 좋겠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조언을 빙자한 명령이 될까 봐 말을 아끼고, 아이린이야 의견을 원체 내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건 세 사람의 몫. 한세아와 그레이스가 대화를 나누고 무뚝뚝한 케이든이 한 마디 덧붙이는 식으로 파티가 갈 곳이 정해진다.

랜턴에 기록이 되었으니 망설임 없이 뒤돌아서는 그레이스. 그녀의 손에 들린 랜턴에서 마석 조각이 빙글빙글 돌다 다른 방향을 가르친다. 한 계층에 올라가는 통로, 내려가는 통로 두 개가 있으니 고장 난 나침반처럼 보인다.

 “이쪽으로 가면 될 거야.”

 “그래? 역시 한나의 마법은 대단하네. 만월 늑대 때도 그렇고.”

 “되게 유용하죠?”

원래대로라면 적당히 방향을 잡고 올라가는 통로로부터 멀어진 뒤 랜턴을 통해 내려가는 통로를 찾아 헤매야 한다. 하지만 미니맵을 켠 게이머는 그딴 번거로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상태.

지팡이를 들어 올리는 척하며 한세아가 방향을 잡아주자 그레이스가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곧바로 발걸음을 옮긴다. 미니맵을 보고도 길을 잃는 길치는 아니다 보니 그레이스의 머릿속 ‘한세아 천재 마법사 설’이 힘을 잃을 생각을 안 한다.

그레이스를 앞장세운 채 숲길을 척척 걸으니 뱅글뱅글 돌던 랜턴의 마석이 다시 한 방향으로 빳빳하게 고정된다. 당연하게도 한세아가 미니맵으로 확인 한 방향.

 “그런데, 무슨 일 있어?”

 “응? 무슨 일?”

미니맵을 보며 길을 찾는 척 지팡이를 내세운 한세아의 곁으로 그레이스가 슬쩍 따라붙는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다고 진형이 망가지고 감각이 무뎌지는 건 아니니 딱히 상관은 없겠지.

그나저나 한세아의 부족한 연기력은 그레이스와 아이린은 물론이고 합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케이든조차 알아차릴 수준인가.

 “아냐, 아무 일 없다니까?”

 “흐응, 언니한테도 못 말해 주는 거야?”

 “없으니까 그렇지….”

물론 그레이스가 끈덕지게 달라붙는다고 해도 한세아가 대답해 주는 일은 없었다. 그야 그럴게 그녀의 고민은 게임 시스템 때문이었으니까. 이벤트도 퀘스트도 없이 숲 탐색만 하는데 방송을 킨 이유가 있구나.

 “아 진짜, 선택 장애 때문에 미치겠네. 각성석 쓰는 게 지금 당장일 필요는 없어서 생각할 시간은 많거든? 근데 시간이 많으니까 더 어려워!”

-선택지가 많으니까 고르기 더 빡쎄네

-몬가몬가 다 애매하게 좋아보임

-그레이스눈나쳐내면방송도죽는거야

-탐색 능력에 몰빵치고 맨날데리고다니자ㅎ

-전투스킬0개는 개오반데

고민의 원인은 며칠 전 그레이스의 캐릭터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나서 받은 보상. 이름이 각성석이지만 마석처럼 진짜 돌멩이는 아니고, 스킬 고르듯 시스템상으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문제가 있다면 그레이스가 3★에서 4★으로 한 등급 올라가는 동시에 스킬을 하나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시작하자마자 6★이고 패시브 스킬을 하나 가지고 있었으며 동료가 된 뒤 스킬을 추가로 고를 수 있던 나와는 다른 방식. 아무래도 등급이 낮아서 그런지 별이 붙을수록 스킬이 생기는 방식인가보다.

 ‘캐릭터마다 스킬 해금 조건이 다른 건가? 이럴 땐 RPG 같긴 하네.’

한세아가 고민하는 이유는 파티 내부에서 그레이스가 맡은 역할 때문. 그녀는 숙련된 탐색꾼이자 길잡이며 화살로 아군을 보조할 서브 딜러이기도 하다. 맡은 역할이 많다는 것은 게이머에게 있어 두 가지를 떠오르게 하지.

잘 키우면 만능형 캐릭터, 못 키우면 잡캐.

뭘 골라도 육체빨로 6★값을 할 나와 달리, 그레이스는 층이 올라갈수록 스킬 하나가 아쉬워질 수 있는 상황. 눈나눈나 부르며 거의 팬클럽을 만들 기세의 시청자들을 보라. 훗날 잘못 찍은 스킬 때문에 파티에서 그레이스를 방출하게 되면 어찌 될지 미래가 훤히 보인다.

-4~5성 궁수/도적 뽑을 자신 없으면 얌전히 탐색 ㄱ

-원딜도있어야할거아니야 너는CC셔틀한다며

-롤랑이쎄긴해도 원거리는 중요하긴 해

 “지금 채팅만 보면 뭘 골라도 욕을 먹게 생겼네, 뭐 어쩌라는거야! 지금 벌써 삼 일째 이걸로 같은 말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에휴…. 걍 내가 고른다?”

-아예 함정쪽가서 만능캐릭어떰?

-같은말하게만든건 너잖앜ㅋㅋ

-언제는 우리의견대로고름? 롤랑스킬도 좆대로 골랐으면서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채팅입니다]

몬스터의 출현이 뜸해진 상황에 한세아가 다시 시청자들과 대화를 시작한다. 방송 화면을 직접 볼 순 없지만 방송국 게시판과 인터넷 게시판에 실시간으로 캡처가 올라오니 편하네.

오올 블루 해적왕이랑 닌자 마을 호카케랑 싸우면 누가 이겨요?

서브 컬쳐에 환장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VS 놀이를 즐긴다. 게임에서도 만화에서도 소설에서도, 그리고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다 똑같이 줄 세워놓고 비교하는 게 인간의 본능. 그러다 보니 그레이스의 스킬 목록을 가지고도 싸움이 붙었다.

방송 캡처본을 보니 가장 많이 언급되는 스킬은 대충 세 가지. 목록을 보니 이번에 얻을 수 있는 건 패시브 스킬인가보다.

첫 번째는 가장 언급이 많은 탐색형 패시브, ‘야생의 직감’. 별다른 부가 효과 없이 아주 단순한 패시브로 그레이스의 감각을 극대화하는 녀석이다. 그레이스를 지금처럼 랜턴을 들고 파티의 탐색꾼으로 만드는 스킬.

두 번째는 그녀를 탐색꾼이 아니라 서브 딜러로 만들어주는 패시브 ‘날카로운 화살촉’. 야생의 직감이 감각을 극대화한다면 날카로운 화살촉은 그녀의 궁술을 보조해주는 패시브였다. 평타 강화라는 느낌이라 이야기가 많이 나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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