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동굴에 관한 이야기를 대충했던 것 같은데.
“동굴이라, 거긴… 음?”
“뭐가 있어?”
“…이상한데, 이거.”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말고 그레이스의 안색이 휙 변한다. 뿔토끼와 뿔여우의 흔적을 찾아 추적했던 것처럼 숲의 나무둥치에 쪼그려 앉아 허리춤의 단검으로 무언가를 뒤적거리기 시작한 그녀.
그런 그레이스의 모습을 보고 후열에 있던 세 사람도 주변을 경계하며 쪼르르 달려온다.
“오크 사냥꾼의 함정이야?”
“아니, 함정이 아니라… 처음 보는 흔적이 있어.”
커다란 나무의 뿌리를 덮은 흙을 단검으로 삭삭 긁어내자 드러나는 기묘한 흔적. 누군가가 투박한 날붙이로 나무껍질과 뿌리 일부를 뜯어간 듯한 모양새였다.
오크 사냥꾼의 단검으로는 이렇게 두꺼운 뿌리를 자르지 못할 텐데?
“숲에, 오크 사냥꾼이 아닌 무언가가 있어. 어쩌면 다른 모험가가 의뢰를 위해 채집했을지도 모르고.”
오크 사냥꾼이 아니지만 다른 모험가의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레이스는 그렇게 판단했지만, 한세아는 조금 다른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20층의 퀘스트가 시작되었으니까.
시청자들이 20층의 퀘스트 창을 한세아와 함께 바라보며 떠들썩하게 채팅창을 달군다.
[방송인 ‘한세아’의 메인 퀘스트 클리어를 돕자 0/1]
그와 동시에 내 눈앞에도 이제는 익숙해진 퀘스트 창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악덕 게임사처럼 보상을 갈라서 판다고 욕했지만, 그래도 퀘스트 창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보상으로 받은 인터넷 이용권이 너무 달달했으니까.
한세아 놀리기에 진심이라 VPN까지 사용하는 짠해좌가 되어 방송국 게시판을 구경한다. 그 뒤 무료 웹툰과 무료 웹 소설을 읽고 동영상 사이트에서 다른 방송인들의 영상을 시청하며 술 한 잔. 판타지 세상에서 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못한 호사였다.
그러니 퀘스트를 볼 때마다 기대감이 샘솟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
“일단은 탐색을 계속하자. 소재를 채취하기 위한 걸지도 모르고, 마법사들이 한 일일지도 모르니까.”
“그래, 알겠어.”
한세아의 말에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앞장선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해도 이게 몬스터의 소행이라는 건 한세아가 알고 시청자가 알며 나도 알게 되었다.
“20층 퀘스트는 전쟁 퀘스트인가? 오크 왕국이라, 좋게 들리지는 않네. 만월 늑대는 대형 몬스터를 상대로 한 레이드였고 오크 왕국은 딱 봐도 난전이 벌어질 것 같은데.”
-롤랑원빵컷 해놓고선 레이드 ㅇㅈㄹ
-오크vs금태양(태닝안함, 양아치 아님)
-오크와19금이라니 세상불안해지네이거
-리셋버튼 누르는 연습부터 하자
-퀘스트가 먼가 뻔한내용이긴 하다잉
파티의 탐색꾼이 찾아낸 이상 현상. 수상쩍은 흔적에 그레이스도 케이든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물자 그 틈을 타 한세아가 시청자들과 떠들기 시작했으니까.
20층 메인 시나리오, 오크 왕국.
만월 늑대와 달리 퀘스트 이름만 봐도 대충 스토리가 짐작이 간다. 한세아도 시청자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스토리를 어림짐작하며 떠들기 시작한다. 오크 사냥꾼이 있는데 왕국이 등장했으니 뭐, 오크 전사 오크 주술사 이런 놈들이 나오는 게 아닐까? 하고.
그 타당한 추측은 곧바로 증명되었다.
“앞에, 뭔가 있어. 오크 사냥꾼 같은데… 엄청 많아. 무리를 지었어.”
뀍뀍거리는 돼지 대가리들에 의해서.
“롤랑. 탑의 20층에서는 오크 사냥꾼만 나오지 않아?”
“맞아. 그리고 그놈들은 늘 개인행동을 하는데….”
그림자 속에 숨는 은밀한 오크 사냥꾼과 달리 고블린 부락보다 뀍꽥뀍꽥 시끄럽게 구는 돼지 대가리들. 그레이스가 포착한 곳으로 다가가니 눈으로 확인하기 전부터 소란스러운 울음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진다.
수풀과 관목 사이에 숨어 시끄러운 공터를 바라보니 보이는 것은 덩치 큰 녹색의 덩어리들. 녹슬고 이 빠진 도끼와 곤봉 따위로 무장한 오크들이다.
바깥에서라면 흔하게 보다 못해 질릴 지경인 오크 전사들. 원주민 겸 야만인 같은 느낌으로 누더기 가죽옷을 입은 채 시끄럽게 뀍뀍 울어대는 녀석들이다. 물론 흔하다 해도 바깥에서 흔하지 탑 내부에는 존재하지 않는 놈들인데.
“일단 사냥해보자. 바깥의 오크보다 확연히 강하지는 않겠지?”
“겉으로 보기에는 차이점이 없어. 일단 내가 앞장서 볼게.”
불길한 마력을 두른 것도 아니고, 덩치가 크거나 피부색이 다르거나 눈이 붉게 물들지는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바깥의 오크들과 완전히 똑같은 녀석들. 게임 퀘스트인 만큼 저놈들이 갑자기 오우거보다 강해지고 그런 일은 없겠지.
갑옷과 몸뚱어리를 믿고 공터로 향했다. 기척을 숨길 생각도 없어 나뭇가지를 몸으로 밀고 부수며 터벅터벅.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오크들이 곧바로 알아차릴 정도로.
뀌이익-?
못생긴 돼지머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묵직한 도끼가 날아든다. 촌 동네 농부가 이길 수 있는 건 고블린 수준이라고 주장하는 묵직하고 빠른 일격. 기술 따위는 없지만 평범한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될 강력한 공격이다.
꿰에에엑!
“뿔늑대보단 조금 튼튼하지만, 딱히 바깥의 오크보단 강하지 않은데.”
인간을 벌목하듯 쪼개버릴 수 있는 강력한 도끼질. 그 대가는 패시브 반사 데미지에 의한 강렬한 고통이었다. 그래도 10층이 아니라 20층의 몬스터라는 걸 증명하듯 반사 데미지에 죽지는 않은 녀석.
대신 양손이 박살 났는지 도끼를 떨어트리고 바닥에 누워 바들바들 떨기 시작한다. 일종의 그로기 상태라 봐야 하나.
-오크전사쉑 전사랍시고 한방은 버티네
-그 한방이 패시브반사뎀이잖아 시발ㅋㅋㅋ
-저거보니까 군대에서 곡괭이질잘못한거 생각나네
-다짜고짜 도끼 휘두를때까진 존나 흉흉했는데
-그래도 즉사 안한게 어디냐 전사답긴 했다
시청자들이 웃고 떠드는 사이 나머지 오크 전사들이 뀍! 하고 내게 달려든다. 음흉하고 집요한 오크 사냥꾼과는 달리 제 동료가 쓰러졌다는 것에 앞뒤 가리지 않는 모습. 마치 모닥불에 달려드는 불나방과도 같다.
도끼를 휘둘러 어깻죽지를 맞췄는데 되려 때린 놈이 자빠져서 울부짖는 상황. 약간의 지능이라도 있다면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겠지만… 놈들은 결국 오크였다.
깡- 깡- 깡-!
도끼와 곤봉이 어깨와 머리를 집요하게 두드린다. 물론 마력으로 강화한 육체와 갑옷에는 흠집조차 내지 못하는 연약한 공격. 내 어깨에 낙엽을 몇 개 올린 대가로 오크들이 나란히 바닥을 뒹군다.
“음, 평범한 오크 수준이 맞아.”
“이것도 그, 마력 강화로 한 거야?”
“마력으로 갑옷을 강화해서 반탄력을 만든 거 맞아. 뿔늑대는 거기에 대가리를 박아서 죽은 거고, 얘들은 손으로 때려서 살아남은 것 같은데.”
그레이스에게 패시브 스킬을 판타지 세상 식으로 대충 이해시키는 동안 자연스럽게 다가온 케이든이 바닥을 뒹구는 오크의 모가지를 썬다.
낙엽을 쓰는 빗자루처럼 가볍게 움직이는 한손검. 검날이 번득일 때마다 바닥을 나뒹굴며 정신을 차리지 못한 오크들의 머리통이 몸통과 이별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등장하는 마석과 부산물들.
“오크 전사들도 오크 사냥꾼처럼 부산물을 주네.”
“요즘 들어 탑에 이상한 일이 많이 벌어지는 것 같아….”
바닥을 나뒹구는 목걸이와 팔찌 따위를 보며 그레이스가 작게 중얼거리자 제 발 저린 한세아가 아하하- 웃으며 화제를 돌린다.
육체는 초등학생이고 영혼은 고등학생인 탐정 주변의 살인 사건처럼 게이머인 한세아의 주변에 퀘스트라는 이름의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건 필연적인 이야기. 20층뿐만 아니라 30, 40, 50층을 갈 때마다 퀘스트가 있을 테고 캐릭터 퀘스트와 서브 퀘스트도 막 생겨날 테지.
그러니 그레이스가 작게 중얼거린, 이상한 일의 주인공인 한세아가 뜨끔할 수밖에.
“그나저나 이런 오크 무리가 생겨났다는 건, 역시 길드와 마탑에 보고해야겠지?”
“증거품이 될 부산물이 있으니 보고하긴 편하겠네.”
딱히 한세아를 의심하느라 한 말이 아닌 만큼 파티원들의 신경이 오크 전사의 부산물로 향한다. 오크 사냥꾼의 부산물과 비슷하지만, 패턴이 조금 다른 짐승 뼈로 장식한 목걸이와 팔찌.
그 부산물을 주섬주섬 챙겨 인벤토리에 넣은 한세아가 일행들에게 의견을 묻는다.
“오크 전사가 등장했다 해서 큰 위협이 있는 건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무시하고 21층으로 향하기도 좀 그래. 우리 파티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흠….”
한세아의 질문에 모두가 고민을 시작한다. 그녀는 퀘스트 클리어를 위해 의견을 던진 것이겠지만 리더로서는 훌륭하게 이끌어나가는 모양새. 의뢰 도중 상정하지 못한 변수가 등장했으니 파티장으로서 파티원의 의견을 물어보는 게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