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175)

물론 내 설명을 들은 시청자들은 아직도 자신의 성욕을 드러내느라 바빴지만.

오크와 여 모험가라… 이해가 되니까 더 어처구니가 없네.

채팅창의 대화가 어지럽고 난잡하든 말든 시간은 흘러갔다. 호기심을 해소한 샤를롯이 돌아가고 그레이스와 아이린, 케이든은 오두막의 침대에서 깊게 잠이 들었다. 나는 오두막의 침대에 엎드려 인터넷을 하고 있으니 방송 속 한세아가 옆 오두막에서 시청자들과 대화를 나눈다.

 “밤에 뭐 딱히 할 것도 없는데 그냥 침대에 누워버리면 되겠지?”

-웨눈나랑걸즈토크안함?

-이거 미연시 아니라고ㅋㅋㅋㅋ

-설명 들었으니 스킵하면 될 듯

-가상현실잠방 한 번 하쉴?

-후딱넘기고 진행ㄱ

한세아가 그리 말하더니 시청자들 보라는 듯 허공에 떠오른 게임의 홀로그램 UI를 과장된 동작으로 꾸욱 누른다. [휴식하기] 버튼을 누르자 실 끊어진 인형처럼 침대에 픽 쓰러져 눕더니 바른 자세로 곱게 눕는 그녀.

 ‘…이렇게 되는 건가?’

그와 동시에 인터넷 방송이 멈춘다. 장마철 쏟아지는 빗방울처럼 우글우글하던 채팅도 매니저가 얼린 것처럼 멈춰버린 모양새. 하지만 방송이 종료되었음을 뜻하는 검은 화면 따위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저 인터넷 선이 뽑히기라도 한 것처럼 화면이 멈춘 것이다.

신기한 기분이 들어 다른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시스템이 내게 퀘스트 보상으로 준 퀘스트 창이 고장 난 건 아니란 거지. 그렇게 밤새도록 동영상을 보고 있으니 깨닫게 된 점 하나. 오른쪽 아래에 있는 현실의 시계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한세아가 일시정지를 하면 게임 속 세상은 시간이 멈추고 바깥세상은 시간이 흐른다.

한세아가 게임을 저장하면 게임 속 세상은 시간이 흐르고 바깥세상은 시간이 멈춘다.

그 간단한 법칙을 확인한 뒤 인터넷을 하고 있으니 침대에 누워 있던 한세아의 눈이 번쩍 떠진다. 동시에 자연스럽게 흘러가기 시작하는 한세아의 방송 속 시간. 침대의 감촉이 마음에 드는지 누운 상태로 꿈틀거리던 그녀가 시청자들과 수다를 이어나가기 시작한다.

 “일단 아침이고, 일행들도 푹 잤을 테니까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 밖으로 나가면 또 마탑이랑 길드가 토벌대 비슷한 거 만들어서 진행하려나?”

-상대가 물량이니까 이쪽도 NPC물량나올듯

-어데용사물도 아니고 혼자 뚫진 않겠지

-법사쉑들 눈알 벌게져서 달려나올거 같은데

-1층 찍으면 될것같음

-재미없는부분 알아서 밀어두라고

조금 전까지는 무슨 시간 정지물의 배우처럼 뻣뻣하게 굳어서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조금 신기하네. 슬슬 다른 일행들도 잠에서 깨어날 것 같아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그런지 탑 내부의 오두막 주제에 샤워 시설까지 갖춰진 숙소. 가볍게 씻고 나오니 일행들도 한결 뽀송뽀송해진 상태로 내 오두막 앞에 모인다.

 “이제 어쩌죠?”

 “여기서 아침 식사만 하고 밖으로 나가자. 원한다면 하루 더 탐색할 수 있지만, 굳이 힘을 뺄 필요는 없겠지.”

가난한 모험가라면 20층에 머물 수 있게 된 김에 사냥을 최대한 해서 마석을 한탕 땡겨 먹겠지만 우리 파티는 그럴 필요가 없지. 상급 모험가의 지갑을 물주로 두고 있으니 생활비 따위에 들어가는 돈이 거의 없거든.

장비 수리비를 생각하며 허름한 여관에서 머물거나 탑에서의 야영 따위를 고려하지 않는 풍족한 삶. 그렇기에 다들 내 의견에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무리 향상심이 높고 탑을 공략하길 원한다 해도 탑 내부에서 이틀을 보낸 뒤 삼 일째에는 휴식을 가지자는 걸 반대할 사람은 없겠지. 특히 아이린은 슬슬 신전에 있을 아이들을 돌보러 가고 싶을 테고.

 “마탑과 모험가 길드가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 해도 보고를 들은 다음 날 모든 게 정리되진 않을 거야. 오늘 하루 푹 쉬면 내일이나 모레쯤 길드에 새로운 의뢰들이 갱신되겠지. 오크 전사나 주술사의 부산물을 가져오거나, 오크 부락을 탐색하라는 등의 의뢰가.”

 “오늘 하루는 푹 쉬고 내일부터 20층의 의뢰를 해결하면 된다는 거네?”

 “맞아.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마탑의 마법사들이 몸이 달아 있을 테니 우리 파티의 명성을 널리 알릴 기회기도 해. 이 정도의 사건이라면 귀족들에게도 이야기가 퍼져 나갈 테니까.”

만월 늑대 사건 이후 한세아가 얼마나 마법사들에게 시달렸는지 두 눈으로 본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이후에 합류한 케이든도 공녀답게 귀족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측한 눈치고.

그렇게 이야기를 한 뒤 오두막 밖으로 나가자 문밖에는 양손을 곱게 모은 메이드 마리가 떡 하니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아가씨께서 식당으로 안내하라는 부탁을 들었습니다.”

차 우리는 솜씨만큼 메이드로서 뛰어난 것인지 자연스럽게 일행을 이끌고 가는 메이드. 그 뒤를 따라가자 숙소용 오두막보다 확연히 커다란 오두막이 등장한다. 나무가 넘쳐나서 그런지 성벽 빼고는 전부 오두막이구나.

연구실도, 통신용 마도구 보관실도, 숙소에 식당까지 오두막이라니. 여러모로 마법사들이 만든 안전지대답다고 해야 할까.

식당이라 해 봤자 커다란 화덕과 테이블이 전부. 이제는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한세아가 인벤토리에서 커다란 냄비를 꺼내 화덕 위에 턱 올려둔다. 허공에서 사람도 웅크려 들어갈 크기의 냄비가 등장하자 화들짝 놀라는 메이드 마리.

 “어머, 이건… 마법인가요?”

 “네. 아공간 속에 물건을 집어넣어 사용하는 인벤토리 마법이죠.”

무뚝뚝한 표정의 미녀가 화들짝 놀라자 더 신난 건 한세아가 아니라 그레이스. 시청자들이 낄낄 웃는다는 걸 알 리가 없는 그레이스가 딸 자랑하는 팔불출 아저씨처럼 한세아를 칭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게임 시스템을 실컷 칭찬한다 해서 게이머가 우쭐거릴 수 있겠는가. 이 게이머는 키보드 I 키를 누를 줄 압니다! 같은 느낌의 칭찬에 어색하게 웃는 한세아.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모습에 짓궂은 시청자들의 표적이 순식간에 바뀐다.

-아아, 이것은『인벤토리』라는 것이다

-어색해서뒤질것같은표정 존나웃기네 ㅋㅋㅋㅋ

-천재미녀마법사한세아!천재미녀마법사한세아!천재미녀마법사한세아!

-인터넷 방송인 한세아는 매우 훌륭하다 그녀는 인벤토리를 능숙하게 사용

-한세아 인벤토리도 사용할 줄 알고 다 컸네

인벤토리 이야기에 더는 어색해지고 싶지는 않은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냄비로 향하는 그녀. 그레이스의 칭찬 세례를 뒤로하고 메이드 마리와 함께 물을 받으러 떠난다. 조리 기구라고는 화덕밖에 없는 공간에서 무언가를 썰고 볶고 굽는 요리는 할 수 없겠지.

물이 나오는 마도구는 구비되어 있는지 결국 실내에서 먹는 건 따듯하게 끓여진 수프. 아침밥인 데다 여자가 더 많은 파티 구성상 부드러운 음식을 했나 보네. 건더기를 왕창 넣고 졸이는 스튜가 아니라 묽게 끓인 수프가 고소한 내음을 풍긴다.

 “다른 마법사들은 식당에 없나요?”

 “오두막과 똑같은 경우입니다. 위로 향하는 원정대를 위해 식당을 크게 만들었지만, 대부분의 마법사님들은 연구실에서 건량으로 식사를 해결하십니다. …저희 아가씨도 마찬가지시니 점심 이전에 떠나신다면 찾지 않고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네. 어제 새벽까지 오크 전사의 팔찌를 살펴보고 계셨으니 이제야 잠자리에 드셨을지도 모릅니다.”

따끈함을 유지하는 1★ ‘후덕한’ 요한나의 빵도 인벤토리에서 꺼내 수프를 삭삭 긁어먹고 있으니 조금 부끄럽다는 듯 한세아에게 설명하는 메이드. 어쩐지 샤를롯의 수프를 준비하지 않더라.

인벤토리를 볼 때 한 번, 제 주인 아가씨의 추태 아닌 추태를 이야기할 때 한 번. 무뚝뚝하고 완벽한 줄 알았던 미녀 메이드의 허점을 발견한 채팅창이 다시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그 낯부끄러운 채팅창의 광경으로부터 시선을 돌린 한세아. 만 단위를 훌쩍 넘어선 인간의 광기는 한낱 개인이 막아 세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동양이든 서양이든 게이머는 다 똑같다는 뜻인지 공략을 보러 온 외국인 놈들도 번역기 말투로 채팅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니 말 다 했지.

 “어, 좋은 냄새. 남은 것 좀 있냐?”

 “…?”

 “뭐, 시발. 너랑 내 사이에 스프 한 그릇도 못 얻어먹냐?”

 “아니, 그게 아니라.”

수프로 든든하고 따끈해진 속을 만끽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니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는 한 사람. 새빨간 머리카락을 물기 터는 개처럼 좌우로 흔든 레베카가 뜬금없이 내게 수프를 요구한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안테노르야 원래 종잡을 수 없는 영감이다. 43층에 있는 게 아니라 10층에서 흙바닥 파헤치며 만월 늑대의 흔적을 찾겠다고 굴러다녀도 이상할 게 없는 마법사. 하지만 레베카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그녀가 아무리 짐승처럼 움직이고 본능에 따라 마구잡이로 행동한다 해도 결국은 ‘용병 여왕’ 레베카. 모험가가 되었음에도 시스템의 칭호가 바뀌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모험가는 미지를 쫓지만 용병은 돈을 쫓으니까.

돈 많이 벌려고 탑 최상층을 뚫는 그녀가, 왜 20층 안전지대의 연구실 쪽에 있냐 이거지.

 “그나저나 왜 위로 안 올라갔어요?”

 “올라갔다가 내려온 거야, 시발. 니들도 봤냐?”

 “뭘요.”

 “그 돼지 대가리들 불어난 거 말이야!”

흥분한 짐승처럼 이를 드러낸 채 테이블을 탕탕 두드리는 그녀. 아침 댓바람부터 폭풍처럼 등장한 상급 모험가의 분노에 일행들이 무슨 일인가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린다.

 “그 씨발 새끼들이 우리 애들 식량 마차를 엎었다고!”

 “어….”

10층에서 20층으로, 20층에서 30층 40층을 지나 43층으로. 상급 모험가까지 달라붙어야 하는 식량 운송. 하지만 효율을 중시하는 용병답게 마차를 호위할 땐 각 계층의 모험가가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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