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75)

저 영감 기준으로 ‘가볍게’라는 말은 ‘내 조수들까지 다 불러모아서 내부를 완벽히 확인하느라 일주일 쯤 걸린다’를 줄여서 말했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다. 안테노르의 조수들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아무튼 누군가가 지팡이 들고 협박해서 조수가 된 건 아니잖아.

그렇게 안테노르의 조수들을 희생양 삼아 오크 보스의 마석 하나만 인벤토리에 챙긴 채 우리는 탈 없이 20층의 통로로 향할 수 있었다.

부산물은 안테노르가 챙겨서 갔고, 나중에 연구실에서 샤를롯과 공유하겠지. 레베카는 내 등판과 허벅지에 잔뜩 화풀이하다 갔으니 43층으로 복귀할 테고. 그러면 이 마석만 길드에 제출해서 왕실 기사단에 보고하면 퀘스트는 끝나는 건가.

[방송인 ‘한세아’의 메인 퀘스트 클리어를 돕자 0/1]

한세아의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도, 내게 날아온 저 정체불명의 퀘스트도.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기 마련이고 사건이 터지면 이를 해소하고 처리하는 절차가 있기 마련이다.

 “이야, 어떻게 하루 만에 뚝딱 처리해버렸네. 너무 성실해진 거 아니야?”

 “워낙 시끄러워서 탐색꾼 없이도 알아차리겠더라.”

 “모험가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무슨 오크가 수백 마리 튀어나오고 고위 마법사가 번개로 쓸어버렸다면서? 그 정도면 못 알아차리는 게 더 어렵긴 하겠다.”

하물며 왕국의 기사단이 엮인 일인데 그 뒤처리가 간단할 리 있나.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서류 뭉치를 제 후임에게 안겨준 엘리스가 테이블에 앉는다.

아무리 말단이 당했다지만 일단 여기사가 정찰 중 기습을 당한 상태다. 기사단이라는 게 신분제도가 꽤 철저한 판타지 풍의 왕국에서 국가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초인 무력 집단이니 후폭풍이 있을 수밖에.

물론 그 후폭풍을 감당하는 건 내가 아니라 모험가 길드의 높으신 분들과 도시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 하는 귀족들이다. 부산물을 안테노르에, 마석을 길드에 넘기면 모험가 파티가 할 일은 전부 끝난 거지.

 “왕국 기사단이 얽힌 문제라 길드장이 엄청 울상이더라고. 빨리 처리해서 다행이지 개입했으면 머리가 아파질 뻔했다나. 꼭 고맙다고 전해달라던데?”

 “말로만?”

 “너랑 나랑 서류로 장난치는 거, 선만 유지하면 자기가 뒤를 봐주겠다는 말도 있었고.”

 “그건 좋네.”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 은퇴한 최상위 모험가이자 5★ ‘노련한 노익장’ 그레이엄. 늙어서도 떨어지지 않은 기량에 워낙 훌륭한 실력 때문에 길드장이 된 아저씨라 그런지 정치와 엮이는 걸 치를 떨며 싫어하는 사람이다.

생긴 것만 보면 회사의 중역을 맡은 것 같은 날카로운 눈매의 이지적인 외모지만 머리를 쓰느니 몸을 쓰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하는, 딱 나랑 똑같은 성격. 그래서 그런지 귀족들과 머리 싸움할 일이 사라졌다고 생각보다 통이 크게 나오네.

 “제대로 된 보상 이야기는 일행들이 다 오면 하자고.”

 “리더 대우, 제대로 해 주고 있나 보네?”

 “애초에 도와주는 선배 모험가 역할이잖냐. 어지간히 실수하는 게 아니면 하자는 대로 하는 거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사람이 이렇게 변했을까…?”

한세아를 만나기 전까지는 적당히 인맥 관리용 의뢰를 뛰다 마도구 사고 남은 돈으로 술을 퍼마시던 인생. 튼튼한 몸뚱이 덕분에 인생의 절반을 술로 보내고 있었으니 엘리스가 나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그레이스처럼 엘리스 역시 한세아를 콩깍지 씐 눈으로 바라보는 중이다. 덕분에 천재 마법사의 자질이 나태한 상급 모험가의 꺼져가는 열의에 불을 붙였다~ 같은 느낌으로 소문이 난 상황.

당연하게도 소문의 근원은 엘리스다. 정확히 말하자면 엘리스와 내 술친구들이라 해야겠지. 맨날 주점에 출석하던 놈이 술도 끊고 초보 모험가와 파티를 짠 채 탑의 저층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소문이 나는 건 당연하다.

 “무슨 이야기들 하고 있어요?”

 “우리가 받을 보상 이야기.”

늘 가던 주점에서 내가 언제쯤 돌아올지 내기를 하다 1달 이내로 건 사람들끼리 싸움이 났다느니, 아직도 얼굴을 안 비춰서 롤랑이 사실 죽었다느니 하는 헛소문을 듣고 있으니 하나둘 합류하는 일행들.

그레이스와 한세아가, 이후 아이린과 케이든이 순서대로 테이블에 와서 앉는다. 한세아 또한 보스전 보상이 기대되는지 방제부터 보상깡을 언급한 상황.

[방송인 ‘한세아’의 메인 퀘스트 클리어를 돕자 0/1]

방송을 켜고 퀘스트 클리어 선언을 할 생각이었는지 아직 나의 퀘스트는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한세아가 보상까지 챙겨서 20층의 스토리를 완료해야 내 퀘스트가 클리어 되는 구조인 것 같네.

일행들이 모이자 자연스럽게 엘리스가 설명을 시작한다. 테이블에 같이 앉아 있는 꼴이 파티의 일원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럽네.

 “일단, 길드는 오크 보스가 남기고 사라진 마석의 보상으로 생각해 둔 게 여럿 있었는데….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어.”

 “무슨 상황?”

 “기사단과 마탑이 마석을 가지고 경쟁을 하기 시작했거든.”

엘리스의 설명에 일행들이 그게 왜 문제냐는 듯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그녀들은 구매자끼리 경쟁이 붙으면 물건값이 올라가니 그저 좋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네.

마법사들끼리 경쟁이 붙었다면 그런 생각이 맞지만… 하필 이번에 끼어든 건 왕국의 기사단이다. 국가를 위하여, 명예를 위하여, 왕실을 위하여~ 뭐 그런 핑계가 덕지덕지 붙으면 되레 보상이 낮아질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이 중세랜드 판타지에도 애국페이가 있다고.

 “모험가 길드는 마석을 대리로 판매해 주는 거지, 가지고 있던 재화를 모험가들에게 나눠주는 게 아니야. 모험가들이 부당한 가격에 모험의 결과물을 빼앗기는 걸 막아주기 위해 설립된 단체니까.”

 “그런가요? 그러면 기사단이 구매하게 되면 어떻게 되나요?”

 “왕실을 위해 힘썼다는 훈장 따위를 받고 보상이 없을 수도 있고, 축복받은 땅을 정화하는 게 당연한 의무라면서 보상을 깎아버릴 수 있지.”

 “하? 뭐 그런 게 다 있어?”

 “그럴 수 있다는 거지, 확정인 건 아니야 그레이스.”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험가 길드는 가난하다. 돈으로 돈을 굴리는 재능이 있으면 상인을 하지 왜 모험가 길드에 있겠냐고. 의뢰를 주선하고 마석을 팔아먹으며 수수료 장사를 할 뿐이지 금고에 두둑하게 금화를 쌓아 놓은 건 아니다.

더군다나 판매처가 정해지지 않았는데 길드가 먼저 보상을 주는 것도 웃기지. 판매 대행을 하고 나서 수수료를 받아 가야 하는 건데 팔지도 않고 길드가 마석을 매입하는 꼴이 되잖아.

기사단과 마탑이 자존심 싸움을 하며 마석 구매로 경쟁을 한다면 판매 시기가 뒤로 밀려버리고, 판매 시기가 뒤로 밀려버리면 길드가 지급할 수 있는 보상도 덩달아 밀려버린다. 그러니 엘리스가 상황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이고.

 “마음 같아서는 마탑에 팔아 버리고 손을 터는 건데, 하필 상대가 왕국 기사단이라서 길드도 곤란한 상황이야.”

 “그놈들이 좀 귀찮기는 하지.”

 “롤랑은 개인 의뢰로 자주 겪어봤지?”

길드 입장에서야 누가 구매하던 돈만 후하게 쳐주는 게 좋다. 받을 수 있는 금화가 많아져야지 수수료로 떼어먹을 금화도 많아지는 것이니까. 고작해야 마석 하나로 벌 수 있는 금화가 그리 많을 리 없지만, 조금이라도 더 많이 벌고 싶은 게 모든 모험가의 속마음이다.

마탑이 구매한다면 늘 그렇듯이 조금 부족한 금화와 함께 다양한 마도구, 장비, 게이트 이용권 등 모험가에게 도움이 될 것 약속하겠지. 문제는 갑자기 끼어든 왕국 기사단.

그들이 금화로 찍어누르려 할지, 명예로 퉁치고 입을 싹 닫을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길드의 입장으로서 가장 최고의 시나리오는 풍족한 금화 주머니를 받고 거래를 종료하는 것. 최악의 시나리오는 돈도 되지 않을 상장이나 훈장 쪼가리를 받고 마석을 빼앗기는 것이니 고민될 수밖에.

 “단순히 수수료를 떼먹을 수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지. 탑에서 나온 전리품을 모험가 길드가 왕국에 상납하는 선례가 될 수도 있으니 정치적으로 좀 복잡할 거야. 물론 우리가 알 바는 아니고.”

-롤랑센세 ‘알빠노’ 시전

-ㄹㅇ 정치고 나발이고 내 보스전 보상 내노으라고 ㅋㅋㅋㅋ

-퀘스트완료 안되는이유가 저거 정치싸움때문임?

-정치적 이슈로 인해 질질 끌리는 토론… 이것이 현실성인가

-NPC한테 보스막타도 뺏길번하더니 보상도 삥뜯기게생겼네 혁명마렵다

 “보상은 확실하지만 떼먹을 수 있는 수수료가 적은 마탑, 보상이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는 불안정한 기사단. 그 사이에서 딱히 결정권 없이 눈치만 보는 길드. 뭐 그런 상황인 거지.”

 “길드 접수원 앞에서 그렇게 적나라하게 깎아내려도 되는 거야?”

 “내가 없는 말 하는 것도 아닌데, 뭐.”

엘리스가 그건 그렇다며 배시시 웃자 일행들의 심각한 분위기도 풀어진다. 처음에야 고생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홀랑 먹히는 거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모양새였지만 모험가 길드 또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발 벗고 나선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우리가 여기서 안절부절못해봐야 결과가 달라지는 일은 없다. 마탑이 이기든 기사단이 이기든 지들끼리 박 터지게 정치질해서 누군가는 마석을 차지하겠지.

 “그러면 보상은 잠시 기다려야 하는 거네? 그동안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롤랑?”

 “글쎄… 아직 남아 있는 20층의 의뢰를 맡아서 해결해도 되고, 21층으로 넘어가 동굴 지형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20층에 남은 의뢰를 진행하는 건 일종의 노가다에 가깝다. 만월 늑대를 잡았다고 뿔늑대가 소멸한 건 아니듯이, 오크 추장이 죽었다고 오크 부락이 다 사라진 건 아니니까 의뢰는 남아 있거든.

21층으로 넘어가는 건 반대로 진도를 빼는 행위다. 숲과는 전혀 다른 동굴에서 거대한 거미와 박쥐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 날아다니고, 벽을 타고 다니며, 거미줄 따위가 가득한 좁은 동굴에서의 전투는 숲에서의 전투와 전혀 다르지.

 “그래서, 너희 파티에 들어온 제안이 하나 있는데…. 기사단에서 온 의뢰야.”

 “의뢰요, 언니? 롤랑이 아니라 우리 파티한테?”

 “맞아, 마법사 한나 파티를 지명한 의뢰야.”

보상을 받을 때까지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20층에서 머무를 것이냐, 진행도 1위의 방송답게 바로 21층으로 향할 것이냐. 그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던 한세아에게 엘리스가 다시 설명을 시작한다.

 “이번에 오크들이 축복받은 오베르뉴 숲에 자리를 잡았잖아? 그리고 보스 몬스터를 처리해도 20층에는 오크 부락이 남아 있고. 그러니 이번 사건을 해결한 모험가들에게 숲의 정찰을 의뢰하고 싶은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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