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평화로운 숲속을 걷기를 한참. 다시 한번 수풀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적어도 세 명 이상, 몸무게가 꽤 나가는 묵직한 상대들.
가장 먼저 그레이스가 알아차리고 곧이어 내가 눈치를 챘다. 그와 동시에 하나둘 멈춰서는 일행들. 이번에야말로 오크가 나타나는 걸까? 하며 긴장하는 일행들. 그리고 일행들 사이에서 멋쩍게 웃어 보이는 북부 대공.
인기척이 점차 가까워지자 철걱, 철걱 하는 쇳소리가 들린다. 우리 일행들은 눈치를 채지 못했는지 긴장을 풀지 않지만, 나는 맥이 빠져 방패를 내렸다.
“왜 그래, 롤랑?”
“발걸음 소리가 오크의 것이 아니야. 부츠에 각반까지 제대로 챙겨 입은 기사의 발소리다.”
내 말을 증명하려는 듯 수풀에서 허겁지겁 튀어나온 건 얼굴까지 헬름으로 가린, 중무장한 세 명의 기사들이었다.
“대체, 잠시 일 보러 가신다는 분이! 왜 여기까지!”
“으하핫! 미안하구나, 딸아.”
“웃어서 넘길 일이 아니거든요!”
정확히는, 두 명의 중무장 기사와 한 명의 아름다운 은발 여기사라 해야겠네.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사람들은 제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었다.
“아버님. 아버님은 북부를 담당하는 대공으로서의 자각이―”
“거, 미안하다니까!”
북부 대공과 그의 딸, 그리고 호위 기사 두 명. 갑옷의 흉갑에는 가문의 문장으로 보이는 웅크린 늑대가 음각되어 있었고, 허리춤에 걸린 검은 뽑지 않았음에도 서늘한 기운을 풍기는 게 마력이 담긴 검 같아 보인다.
정리하자면 왕실 소유의 축복받은 숲에서 가문의 인장을 가리지 않고 무기까지 챙긴 채 활보하는 무장 집단. 귀족 사칭이나 변장한 암살자 따위일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겠지. 갑옷과 무기, 가문의 문장은 둘째 치고 수풀에서 나온 여인을 보며 케이든이 엄청 티가 나게 움찔거렸으니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정체를 숨긴 가출 공녀님이 우리 일행에 있는데, 의뢰 중 아버지로 예상되는 사람이 튀어나오질 않나, 그 딸과 호위 기사가 튀어나와 일행에 합류하지를 않나. 거기에 새로 튀어나온 아가씨는 케이든을 못 알아본 듯 딱히 눈길조차 주지 않는 상황.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파악하기도 힘들 지경이다.
그렇게 한세아와 시청자들의 추리극을 보며 나 또한 케이든의 가정 상황을 유추하며 걷기를 한참. 자연스럽게 북부 대공의 일행들을 안내하듯 걷다 보니 녹색으로 가득하던 시야가 확 트이며 병사들이 우글우글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거기, 누구… 대공님?!”
인기척을 숨길 생각도 없이 시끌벅적한 북부 대공 일행들. 그 덕에 숲에서 튀어 나가자마자 몇 명의 병사들이 마치 포위를 하듯 우리 쪽으로 다가와서는 화들짝 놀라서 뻣뻣하게 굳는다.
털북숭이 거한을 목격하자 무슨 메두사라도 본 것처럼 차렷 자세로 몸이 굳어버리는 병사들. 하기야 K-판타지의 대공은 황실의 피가 섞인 공작 가문을 뜻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 정도면 스타 앞의 일병보다 더한 상황이구나.
“아,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닷!!!”
“그럴 필요는 없네. 이쪽 모험가들에게 탑 이야기를 좀 듣고 싶거든.”
“그렇다면, 응접실과, 다과를 준비하겠습니다앗!!!”
재앙처럼 갑자기 등장한 북부 대공의 모습에 병사 중 하나가 목에 핏줄이 터질 정도로 우렁차게 외친다. 기사가 올 때까지 높으신 분을 숲의 초입에 멀뚱히 세워둘 순 없다고 판단했는지 바들바들 떨면서도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병사.
바들바들 떠는 그 안쓰러운 모습에 북부 대공이 손을 내젓는다. 모험가인 우리에게도 딱히 격식을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병사들에게도 관대한 모습. 물론 대공씩이나 되는 사람이 편히 쉬란다고 일개 병사 따위가 진짜로 편히 쉴 수 있을 리 없다.
“쁠르 그스늠 므스그 으르그, 으 븡슨싀끄야….”
목에 핏대를 세운 병사 뒤에서 입술을 앙다문 채 중얼거리는 또 다른 병사. 얼빠진 후임을 갈구느라 턱의 힘줄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보일 정도다.
작게 중얼거린답시고 중얼거려봐야 코앞에 있는 초인들에게 안 들릴 리 있나. 반쯤 울먹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에 멋쩍게 뒷머리를 긁은 북부 대공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생각보다 지리를 잘 알고 있는지 안내하는 병사 없이 자연스럽게 손님용 건물로 향하는 그.
함께 우르르 몰려가는 등 뒤에서 터져 나오는 숨소리가 참으로 인상 깊다. 그나저나 이 사람, 너무 자연스럽게 우리랑 함께 움직이는데.
“이야기를 듣는다니요?”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게. 어차피 의뢰를 위해 이곳에서 머무는 게 아닌가? 적적한 늙은이 하나 말 상대해 준다 생각하고 모험 이야기 좀 들려주게나.”
“아버님! 늙은이라뇨, 스스로를 너무 낮추시면….”
케이든의 철벽과도 같은 태도에 마음을 바꿔 먹었는지 이번에는 내게 접근하는 그. 스스럼없는 그 태도에 아가씨가 화들짝 놀라며 만류하지만 곰 같은 외모에 걸맞게 그대로 밀어붙인다.
자연스럽게 같은 손님용 건물에서 머무르는 게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상황. 하기야 여기가 어디 모텔촌도 아니고 손님용 건물이 여럿 준비되어 있지는 않지.
권위를 중시하는 귀족이라면 모험가와 같은 건물에서 머무를 수 없다며 마차를 타고 이동할 테지만, 명백히 케이든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 대공님은 멋대로 내게 달라붙는다. 아무래도 일행들이 전부 여자다 보니 나한테 말을 건 것 같은데.
일행들과 호위 기사들은 2층으로 향해 방을 나누러 올라가고, 제 아버지의 허물 없는 태도에 뾰로통해진 아가씨는 산책이라도 하려는지 건물 밖으로 슬그머니 나간다. 남은 것은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는 북부 대공과… 슬그머니 촬영하러 온 한세아의 반투명 카메라 드론.
‘방송 괴물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지.’
카메라를 모르는 척 테이블에 앉자 눈앞의 곰 같은 양반이 먼저 입을 연다.
“함께 숲을 거닐었음에도 정식으로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군. 나는 아서, 아서 웰즐리라네. 북부를 다스리는 대공이자 서리 늑대 기사단의… 아니지, 귀찮은 작위는 전부 생략하는 게 좋겠어.”
거창하게 자기소개를 하려다 말고 말을 멈추더니, 턱의 흉터를 살살 긁으며 말을 고르기 시작하는 그.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웰즐리 가문이라는 이름을 내가 처음 들어본 게 맞다는 점.
아무래도 한세아가 이 세상에 접속하며 별이 붙고 나서야 생겨난 가문인 것 같았다. 아니면, 내 머리가 조금… NPC답게 굴러간다던가. 한세아가 시청자들에게 말을 할 때 인식하지 못하는 NPC들처럼 말이야.
그렇게 잠시 고민하고 있으니 눈앞의 남자가 어렵사리 입을 연다.
“…내가 이번 의뢰에 관심이 많아서 조사를 좀 했거든. 자네는 상급 모험가라고 들었네. 일행들은 초급 모험가에서 얼마 전 중급으로 올라섰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어째서 초급 모험가들을 이끄는지 이야기를 좀 들려주겠는가?”
명백히 평민 모험가를 대하는 귀족의 태도가 아닌 정중한 요청. 마음 같아서는 케이든 때문에 그렇습니까? 하고 대놓고 들이박고 싶지만… 머리 위에 있는 카메라가 문제다.
여기서 내가 북부 대공도 알고, 검의 공녀도 알고, 케이든의 여장도 알고, 사실 한세아 방송 덕분에 모든 비밀을 알아요~ 이딴 식으로 움직일 순 없으니까. 모험가 롤랑이 알 수 있는 선에서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한다.
반투명한 카메라 드론으로 내 사생활을 24시간 감시할 수 있는 플레이어에게 괜한 의심을 사고 싶지는 않거든. 나로서는 아무 의심도 사지 않고 한세아가 게임 엔딩을 보는 게 베스트니까.
“일단, 시작은 한나 양을 만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군요.”
“파티의 리더인 마법사를 말하는 것이로군?”
그러니 지금은 적당히 이빨을 털어서 한세아를 올려쳐 볼 생각이다. 부녀 관계가 나쁘지 않다면 일종의 후원자처럼 자리를 잡을 수도 있을 테니까.
“뭐, 조사를 하셨다면 아시겠지만 저는 탑의 37층에서 멈추고 아래로 내려온 모험가입니다.”
“듣기로는 꽤 긴 휴식을 즐겼다던데.”
“거의 10년을 모험했으니 잠시 쉬자는 생각이었죠. 뭐, 벌어 둔 돈도 꽤 있으니 여차하면 평생 쉴 수도 있는 거고.”
“어디에서나 안락한 노년은 중요한 법이지.”
그렇게 내 이야기를 적당히 이어나갔다. 접수원이 슬쩍 떠맡긴 마법사 한나, 모험 중 탑에서 만난 궁수 그레이스, 다른 파티에 속해 있다가 우리 파티로 이적하게 된 사제 아이린.
마지막으로 용병 출신으로 파티에 합류하게 된 케이든까지.
그전까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며 허허 웃던 양반이 레베카와 케이든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태도가 바뀐다. 손가락이 꼼질 거리기 시작하고 편히 앉아 있던 허리에 힘이 들어가 자세가 바뀌었거든. 덩치가 몇 배는 커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
-아서아재요 티가 너무 나는거 아닌가
-일단 거짓말은 못하는 사람인걸로
-접수원이 떠맡긴 한세아라니까 무슨 미아센터 보호아동같네
-아니 누가봐도 케이든 이야기 듣고 싶어서 몸 비트는 중 ㅋㅋㅋㅋ
-이쯤되면 롤랑이 일부러 다른 일행들 이야기 길게 했다
슬쩍 채팅창을 보니 시청자들이 봐도 티가 날 정도였나보다. 이러면 내가 무언가 눈치를 챈 척을 해도 상관없겠네. 퀘스트 보상 덕분에 이렇게 실시간 확인이 되니 얼마나 좋아.
“케이든은 모험가 시절 알고 지내던 용병단주의 추천으로 파티에 합류했죠. 제가 방패를 다루다 보니 좀 더 공격적인 전위가 한 명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으음, 그런가? 레베카, 레베카 용병단이라….”
“그래서 대공님의 아드님이 우리 파티에 합류하게 된 것이죠.”
시청자들의 말과 대공의 반응을 보며 머리를 굴린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넘어갈 수 있지만, 그 경우에는 얻어낼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모험가나 용병이나 언제나 이익을 보기 위해 몸을 비트는 직업.
눈앞에 북부 대공이라는 황금 꿀단지가 있는데 한 입도 먹지 않고 내뺄 순 없지.
모든 걸 안다고 잘난 척할 필요는 없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할 필요도 없다. 적당히 아는 척을 해서 유능함을 어필하고 파티에 대한 공작가의 지원을 얻어내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겠지.
“…알고 있었나?”
“케이든이 스스로 소개하기를, 몰락 가문의 후계자라고 말하며 제게 마법 갑옷의 수리를 의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