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2화 (152/175)

연계 퀘스트인 만큼 오크들이 노리는 무언가가 있겠지 싶어 말을 꺼내니 곧바로 추격하자는 의견을 제시하는 케이티. 귀족으로서, 모험가로서의 사명감과 의무감 때문에 조금 흥분한 것 같아 다른 일행들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스윽- 천천히 움직이는 내 시선을 받을 때마다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일행들. 피해자가 이미 생긴 상황이라 그런지 다들 눈에 열의가 가득하다.

 “탑보다 편안한 지형에서 고작 몇 시간 탐색했다고 지치진 않았어. 난 괜찮아, 롤랑.”

 “저희도 마을 주민분들의 하소연을 들었을 뿐이에요. 고통받고 있는 분들이 계시니, 발걸음을 서두르는 게 좋겠어요.”

 “어, 나도 롤랑이 들고 다녔으니까… 상관없어.”

-여기서 혼자 뺄 정도로 짠하진 않으시네여

-이 분위기에 쉬었다 가자면 인간성 결여 소시오패스로 몰릴 것 같은데?

-애초에 쉬었다 다음날 진행하면 방송부터 곱창나자너 ㅋㅋ

-ㄹㅇ 단서 찾았으면 진행이나 하라고 ㅋㅋ

-방송 진행 안했으면 시청자 타노스당할걸

성녀의 자비심, 귀족의 의무감, 동료를 찾고 싶어 하는 우정, 몬스터에게 위협을 받는 마을 주민에게 느끼는 동질감과 방송 민심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한 빠른 진행까지.

다양한 이유가 한곳에 모여 그녀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곧 해가 지면 한나의 라이트 마법에 의존해서 싸워야 할 거다. 다행히 날씨는 맑으니 달빛이 환하면 좋겠네.”

 “…응, 맡겨 둬!”

-옆구리에 끼워진 짐짝 vs 조명으로서 눈부신 활약

-그냥 두 발로 걸어다니는 조명 하자 세아야…

-덜렁덜렁보다는 터벅터벅이 낳지 않겠냐

-한세아가 낳는다고? 퍄퍄 존나 야하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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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나가라, 진짜 밑도 끝도 없네.”

우리가 에르트타에서 이 자그마한 마을로 올 때 사용한 길은 마차 하나가 겨우 지나갈 법한 오솔길. 좌우에 야트막한 언덕이 잔뜩 있는 비포장도로는 전술, 전략적으로 생각했을 때 습격을 당하기 너무 좋아 보이긴 했다.

왼쪽에도 관목에 뒤덮인 야트막한 능선이 있고, 오른쪽에도 수풀이 우거진 지대가 펼쳐져 있으니 아무리 무식한 오크라도 엎드려서 숨어 있을 수 있는 지형이다. 그러나 숨어 있기엔 딱 좋은 지형이기도 하면서 추적당하기에도 딱 좋은 지형이기도 하지.

푸른 수풀에는 누가 봐도 억지로 짓밟고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고, 키 작은 관목은 허리가 부러지거나 날카로운 발톱 자국 따위가 남아 있었다. 식물 하나 없는 척박한 언덕에는 늑대 발자국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황.

 “이 능선을 넘어 정찰을 왔다가, 되돌아갔네.”

 “가장 높은 언덕 위에서 주변을 둘러보다 사람이 보이면 습격을 하는 방식인가.”

 “늑대를 타고 다니니 냄새를 이용해 찾아다닐지도 몰라.”

너무나 명확히 남아 있는 흔적 덕분에 놈들의 진행 경로까지 알게 된 우리는 녀석들의 발자국을 따라 언덕을 넘었다.

그레이스가 분석하기론 지난번 내게 박살이 난 무리보다는 수가 조금 더 적은, 열 마리 남짓한 상대. 소도시 인근에서는 스무 마리, 작은 마을 근처에서는 열 마리 정도로 무리 지어 다닌다면 이 또한 오크 우두머리가 계산해서 내보낸 걸까.

 “……롤랑? 핏자국이 있는데.”

 “마을 사람인가?”

 “마차의 잔해가 있는 걸 봐선 소규모 행상인 무리일지도 몰라.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해.”

그렇게 언덕 몇 개를 넘으니 훅 풍겨오는 비릿한 피 냄새. 언덕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 보니 다른 마을로 향하는 길목에 박살이 나 주저앉은 작은 짐마차와 말 사체가 보인다.

말의 사체는 늑대가 뜯어 먹기라도 했는지 뱃가죽이 너덜너덜 뜯겨 있는 데다, 머리통도 저 멀리 수풀에서 끔찍한 모양새로 굴러다니는 상황. 짐마차는 무슨 땔감으로 만들 생각으로 도끼질을 했는지 짐마차라기보단 목재 더미로 보인다.

그 와중 비위가 상하지도 않는지 말 사체를 폴짝 넘어 박살이 난 짐마차 잔해를 발끝으로 뒤적거리는 그레이스.

 “이상하다니?”

 “…사람 시체가 없어. 이거 봐, 마차 안에 있어야 할 짐도 없고.”

 “오크가 물건만 턴 게 아니라, 사람까지 납치했다는 거네.”

 “그때 그 여기사처럼 말이지?”

그레이스의 말에 지난번 우리가 구출한 여기사를 언급하는 케이티. 그게 무슨 소리냐며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릴리에게 뺨을 긁적거리던 케이티가 오크들의 이상 행동에 관해 설명을 시작했다.

탑의 20층에 등장한 오크들이 어째서인지 여기사를 납치하고 귀족을 노리는 체계적인 모습을 보였고, 그놈들이 오베르뉴 숲에서 기사들의 눈을 피해 도망쳐 나와 서쪽으로 향한 것 같다는 이야기.

 “솔직히 말해서,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긴 하네.”

 “그렇지? 나도 처음엔 믿기 힘들었어. 오크 주술사의 움막 밑 땅굴에 여기사가 감금되어 있을 줄은 몰랐거든.”

 “뭐, 나를 도와주는 너희가 그런 거로 거짓말을 할 리 없겠지만… 대체 이놈들이 원하는 게 뭐지?”

 “그건 이 녀석들을 잡으면 알 수 있겠지.”

이번에는 여기사가 아니라 마을 주민을 납치한 오크들. 사람을 끌고 간 데다 말을 잡아먹고 짐마차를 박살 낸 상태라 그런지 흔적이 더욱 격렬하게 남아 있었다.

 “피 묻은 늑대 발자국이 이쪽으로 이어져 있네. 저 방향에서 와서 이쪽을 향해 떠났어.”

 “수풀에 대놓고 피 묻은 늑대 털이 남아 있으니 따라가기는 쉽네.”

-아니 오크들 너무 대놓고 오크인데?

-마주하면 존나 무섭긴 한데 따라다니니까 븅신이 따로 없네

-저렙때 만나면 튼튼하고 힘도쎄서 뉴비 절단기인데

-원래 뉴비 절단기들은 중렙 넘어가면 동네북 전투력 측정기자너

-저건 궁수나 도적이 아니라 마을 주민도 추적할 수 있겠네 ㅋㅋ

사람이야 늑대 위에 싣고 갔는지 딱히 흔적은 없지만, 두 마리의 말을 포식한 늑대들이 씻지도 않은 채 수풀을 헤치고 지나갔으니까.

꺾이고 짓밟힌 수풀에 피에 떡진 늑대 털 따위가 페인트 밟은 고양이 발자국처럼 이곳저곳에 듬뿍 묻어 있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명백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방향은 당연하게도 북쪽 황무지의 경계선.

 “말의 피가 아직 엉겨 붙지도 않았어,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것 같아.”

 “흐음, 따라가서 발견하게 되어도 놈들의 본거지가 나올 때까지 참아야겠네.”

 “그렇네요. 눈앞의 악을 소탕하는 것보단 근원을 치워야 마을의 형제자매님들이 안전해질 테니까요.”

늑대의 흔적을 따라 다시 한번 언덕을 넘자 저 멀리 자그마한 먼지구름이 보인다. 아무래도 늑대가 식사하는 동안 오크 놈들도 휴식을 푹 취한 모양.

반나절이고 나발이고 그냥 코앞에 있었네.

기척을 숨길 생각은커녕 동네방네 광고를 하듯 우르르 몰려다니는 오크 기병들. 우우우- 하고 길게 우짖는 늑대 소리와 함께 흙먼지 구름이 황량한 황무지를 향해 흘러간다. 마치 누구든지 덤벼도 좋다는 듯 위세 좋게 난동을 피우는 모습.

고작해야 열두 마리 정도의 늑대와 오크라면 철퇴 한 방에 으스러트릴 수 있지만, 놈들의 본거지를 알기 위해서는 조용히 따라가야 한다.

다행인 점은 놈들이 신이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무지로 향하고 있다는 것. 우리가 놈들을 발견할 수 있었듯이 우리도 몸을 숨길 곳이 충분하지 않은데 대놓고 터벅터벅 걸어서 언덕을 넘어도 오크들은 그저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이젠 언덕도 없는 황무지인데, 들키지 않을까.”

 “하는 꼴을 보니 관심도 없는 것 같은데?”

 “오크라는 건, 이렇게까지 부주의한 놈들이었어?”

오크와의 전투는 익숙하지만, 오크의 생태에는 익숙하지 않은지 한 마디씩 던지는 일행들. 거리를 두고 따라간다지만 이렇게 대놓고 따라가면 야생 동물들도 기척을 느끼고 도망칠 텐데- 하며 그레이스가 중얼거리자 다른 일행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친다.

그야 탁 트인 황무지에서 대충 200m쯤 거리를 두고 따라가는데도 아직 안 들켰으니 놀랄 수밖에.

그 덕에 늑대 등 위에 몇몇 마을 사람들이 밧줄로 꽁꽁 묶여 짐처럼 실려 있다든가, 깨어났는지 버둥거리는 사람을 주먹으로 퍽퍽 후려쳐 다시 기절시키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오크의 평소 성질머리라면 버둥거리는 순간 목을 꺾어버릴 텐데, 진짜 이상하긴 하네.

-그 머냐, 난이도 응애로 낮춘 게임 구경하는 기분인데

-이 악물고 모르는 척 하네

-그 앞만 보는 감시자들이 옆으로 지나가면 모르는 거랑 비슷한 원리냐?

-돼지 구경도 슬슬 지루한데 대충 롤랑빔으로 다 때려뿌수고 끝내줘

-이 정도면 발견 못한 기사단이 오크랑 붙어 먹은거 아니냐?

 “어허, 음모론 멈춰. 근데 약간 신빙성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부패한 귀족이 똑똑한 몬스터랑 막 손을 잡았다, 이런 거 판타지 소설에서 은근 나오지 않나?”

그 덕에 한세아의 방송에서는 기사단이 무슨 인류의 배신자가 되어 몬스터와 손을 잡았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상황.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오크 따위가 기사단이 인류를 배신하게 만들 방법이 없겠지만, 게임 퀘스트 적으로 생각하면 은근 현실성 있긴 하네.

오크를 잡고 30층으로 올라가 퀘스트를 해결하고 나왔더니, 탑 밖에도 오크가 있더라. 하긴 고블린의 위협보다는 오크의 위협이 조금 더 무시무시해 보이니 밸런스 적으론 이게 맞겠지.

그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는 동안 먼지구름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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