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걸어 다니며 다양한 샘플을 채집했으니 슬슬 도시로 귀환해야 할지, 아니면 안전지대를 찾아봐야 할지 결정을 해야 할 타이밍이다.
“어쩔까, 한나. 안전지대나 숙영을 할 수 있을 장소를 찾으러 갈까, 아니면 정비를 위해 30층으로 내려갈까.”
“흐음….”
그리고 그건 당연하게도 파티의 리더인 한세아가 결정할 몫. 잠시 시청자들과 떠들던 한세아가 내 질문을 듣고 고민에 빠져든다.
일단 길드에서 받은 의뢰는 전부 완료한 상황. 시약용 병에는 보라색 액체와 끈적이는 마비 진흙이 들어 있고, 잿빛이 된 나뭇가지와 바짝 마른 나뭇잎 따위도 인벤토리에 챙겼다. 좀비 악어도 리자드맨 스켈레톤도 촉수뱀도 전부 만나 마석 또한 종류별로 챙긴 상황.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돌아가자. 날이 늦었고 31층에 대한 정보도 부족하니까, 혹시 탑 내부에서 밤을 보내더라도 30층의 안전지대에서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
“확실히, 정보가 부족하긴 하지.”
“좋아요, 이런 불경한 땅에서 식사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짧은 고민 끝에 내려진 그녀의 결정은 퇴각. 몬스터만 변한 게 아니라 필드 자체가 변해버렸으니, 야영하기에는 위험하다는 주장은 타당하게 느껴졌다. 그런 한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아이린.
음… 생명을 여신이 내려준 고귀한 것이라 믿는 여신교라서 그런지 언데드에 대한 반응이 장난 아니네. 평소 화를 안 내던 사람이 화를 내기 시작하면 무섭다는 게 이런 뜻인가.
묘하게 날이 서 있는 아이린의 목소리에 일행들이 군말 없이 좁은 길에서 몸을 돌린다. 나야 신성력으로 갑옷을 코팅해 얕은 독 웅덩이를 마음껏 밟고 돌아다닌다지만 일행들은 그럴 수 없다 보니 한세아가 지팡이를 꺼내 들고 고민을 할 정도. 결국, 내가 손을 뻗어 균형을 잡도록 도와준 뒤에야 포지션을 변경하고 온 길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저 보라색 웅덩이, 채집할 때 만져봤는데 묘하게 끈적거린단 말이지. 실수로 장비에 묻으면 손질하기 엄청 귀찮을 것 같아.”
“미약한 독성을 띠고 있는 만큼 장비도 마모시키거나 부식시킬 수 있으니까, 최대한 닿지 않는 게 좋지.”
케이티와 아이린의 장비는 잘 몰라도, 한세아와 그레이스의 장비는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귀한 가죽 장비들이다. 마법과 연금술로 제련하고 가다듬은 장비들이다 보니 미지의 독극물을 듬뿍 묻히긴 좀 그렇다는 거지.
신발 좋아하는 사람이 새로 산 신발을 신고 비 오는 날 진흙탕을 돌아다닐 리 없는데, 취미도 아니고 직업과 목숨이 걸려 있는 모험가의 장비를 마구 다룰 리 있나.
“어으, 길이 이래서야 마차가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네.”
나란히 서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일행들 옆으로 퐁퐁 피어오르는 끈적한 거품. 그 광경을 보며 케이티가 징그럽다는 듯 중얼거린다.
솔직히, 이 난리가 났으니 보급 마차를 호위하는 데 돈이 엄청나게 깨질 것 같긴 했다. 말이 중독되지 않도록 해독제를 먹이고 이동하던지, 중급 이하의 마법사 수십 명 고용해서 어스 컨트롤로 길을 만들면서 가야 할 수준이니까.
“왜 이렇게 변했는지 밝혀내고,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다….”
“되돌릴 수 있다면 반드시, 되돌려야 해요.”
시청자를 향한 게 아닌, 허공을 향해 중얼거린 한세아의 혼잣말에 곧바로 대답하는 아이린의 모습에 일행들의 어깨가 묘하게 움츠러든다.
※
탑에서 나온 부산물로 밥 벌어먹고 수수료 장사해야 하는 모험가와 모험가 길드. 탑에서 나온 마석과 탑의 환경에 관해 연구하고 논문을 작성하는 마탑의 마법사들. 이 두 집단에 이어 신전이 갑작스럽게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탑 내부에서 외부로 몬스터가 뛰쳐나오는 건 별로 신경도 안 쓰더니, 내부에 언데드 존이 생겼다니까 눈이 뒤집힌 상황이다― 라고 엘리스가 전해주었다.
“하루 만에 그 사람들이 전부 튀어 나왔다고?”
“그렇다니까. 머릿수 부족해서 사제들도 잘 안 내보내는 신전에서 고위 사제들이 우르르 몰려나와선 길드장을 막 찾더라고.”
길드로 돌아와 보라색 독병과 마비 진흙이 담긴 병, 나무껍질 따위의 의뢰 받은 물품을 제출하자 슬그머니 테이블로 다가온 엘리스.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호들갑을 떨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호들갑을 떨 만한 일이었다.
이 세상의 신전은 엉덩이가 꽤 무겁다. 그야 여신이라는 존재가 실존하고, 1년 단위로 신탁 같은 걸 내려줄 때가 있으니까.
신적 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신성력과 신탁으로 입증하다 보니 신전의 권위가 어마어마하게 높아졌지만, 권위가 높아진 만큼 경거망동을 할 수 없게 되는 건 당연한 이치다. 신성력을 사용할 줄 아는 사제 하나가 부덕한 행위를 저지르면 그게 바로 신성 모독 아니겠는가.
“신전이 협력하겠대?”
“음, 아마도? 정확한 이야기는 엿듣지도 못했어. 새하얀 법복 입은 높으신 분들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길드장이랑 같이 마탑으로 향했거든. 그런데 모험가 길드와 마탑의 수뇌부를 이끌고 갔다면 신전이 직접 나서겠다는 뜻 아닐까?”
어깨를 으쓱이는 엘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일행들. 화전민 마을의 소녀부터 북부의 귀족 아가씨까지, 신전에 대한 믿음이 꽤 두텁다. 하긴 이 판타지 세상 10년 살면서 신전만큼 든든한 녀석들은 찾아보기 힘들지.
명분이니 실리니 이것저것 따지는 귀족들과 달리, 여신의 이름 아래 뭉치기 시작하면 응집력 하나는 장난 아닌 게 종교인들이다. 사제와 수녀만 있는 것도 아니고 체술을 단련하는 몽크와 신성력으로 육체를 강화하는 신전 기사들도 존재하고.
아래층의 퀘스트가 마법사들의 협력으로 진행되었다면, 31층의 퀘스트는 아무래도 신전 세력과 함께 진행될 것 같네.
[갑작스럽게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린 탑 내부의 늪지대]
[생명을 모방해야 할 존재들이 죽음을 모방하기 시작한 것은 명백히 이질적이다]
[대체 마왕은 탑에 무슨 짓을 했길래 살아 있지도 않은 것들이 언데드로 변한 걸까…?]
“오, 엘리스 언니 말 들으니까 퀘스트 갱신된다. 결국, 이것도 마왕이 한 게 맞나보네. 오염의 근원 같은 걸 찾아야 하나 봐. 보스가 막 거대한 오염 물질이려나? 촉수 괴물이나 오물 슬라임 같은 거. …그걸 내가 잡아야 하고? 으웩…….”
-근캐 고른 플레이어들 개같이 멸망 ㅋㅋㅋㅋㅋ
-답은 뭐다? 연금술 길드에서 구매할 수 있는 폭탄이다
-하 시발 쌍검단도충이라 돚거 시작했는데 리셋마렵네
-시체 골렘이나 오염된 슬라임 등 더러운 보스몹 떠오르는 게 너무 많은데
-비비게임즈는 마법사 편애를 멈춰라 근딜들 다 죽는다 아이고
한세아의 중얼거림에 격하게 반응하는 채팅창. 그 내용을 읽다 보니 나 또한 긴장감으로 몸이 뻣뻣해지고 침이 꿀떡 넘어간다. 시체 거인이니 오물 덩어리니 더럽고 커다란 보스 몬스터라면, 100% 확률로 내가 그걸 뒤집어쓰게 될 테니까.
전에 오우거를 잡을 때, 피와 뇌수를 흠뻑 뒤집어썼다가 악취가 사라지지 않아 마도구까지 사용해야 했었는데, 언데드 계열의 보스라면 얼마나 지독하려나.
…신성력과 마나로 육체를 코팅해 보호한다 해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다.
엘리스에게 신전의 참전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날. 길드의 테이블에 모여 앉은 일행들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신전에는 사제와 수녀만 있는 게 아니다. 신전은 나름의 권력 집단이자 여신의 신탁에 따라 움직이는 대행자기 때문에 무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당장 도시에서 멀어진 산골짜기로 가면 맹수부터 떠돌이 몬스터까지 나타나는 세상인데 맨몸의 사제와 수녀만 내보낼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신전이 세속적으로 용병들과 전속 계약을 맺고 활동할 순 없고.
그렇기에 신전에서는 몽크와 신전 기사를 육성해 몬스터를 토벌하고 고행길을 나선 사제와 수녀를 호위하는 등 다양한 곳에 써먹는다.
그리고 그들은, 어지간해서는 만나볼 수 없는 존재들이다.
“내가 신전 기사들과 함께 탑을 오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북부에 있을 땐 얼굴도 못 본 신전 기사들이라니.”
“어릴 적 아빠가 읽어주던 영웅담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야.”
고행이라는 명목으로 육체를 끝없이 단련하여 체술과 성법을 사용해 적을 제압하는 격투가 몽크, 마나 대신 신성력을 이용해 묵직한 중장갑과 방패를 사용하는 신전 기사. 이들이 직접 나설만한 일은 어지간해서 없으니까.
세상 물정 모르는 무식한 산적들이 고행 사제들을 습격했다든가, 신전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여신을 모독하는 일이 있어야 나서는 존재들이다. 신성력으로 여신이 제 존재를 입증한 세상에서 그런 짓을 벌일 무식한 놈들이 많아 봐야 얼마나 많겠는가?
거기에 더해 그들이 용병이나 모험가와 협력을 할 일도 없고. 사제와 수녀들도 고행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험난한 일을 겪는데, 사명을 위해 전투에 나선 그들이 모험가와 용병에게 손을 벌릴 이유가 없지.
“롤랑. 롤랑은 몽크나 신전 기사랑 만나본 적 있어?”
“싸우는 걸 본 적 있긴 하지만, 함께 한 적은 없지.”
10년을 판타지 세상에서 구른 나도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니까. 의뢰 때문에 시골 마을로 갔다가 산적들을 생포하는 몽크를 본 게 전부. 뭐, 카페에서 일하는 바리스타가 연구실에서 실험하는 과학자를 구경할 확률과 비슷하지 않을까.
“한창 의뢰를 위해 왕국 곳곳을 돌아다니던 때… 그레이스의 마을을 도왔던 것처럼 떠돌이 몬스터나 왕국 외진 곳에 흘러들어 온 대형종을 처리하려고 남부의 산맥에 갔을 때 한 번 만나본 적 있어. 신전으로 보내는 식량을 약탈한 산적들을 퇴치하기 위해 나선 몽크들이었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일행들. 심지어 예비 성녀인 아이린도 신기하다는 듯 귀를 기울인다. 신전에서 나고 자랐다 해도 몽크와 신전 기사는 못 만나 본 걸까.
게임식으로 비유하자면 체술을 익힌 몽크는 PVP 특화, 두꺼운 중장갑을 입은 신전 기사는 PVE 특화라 볼 수 있다. 산적을 체포하러 온 몽크들이 가죽 두꺼운 거인족을 때려잡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
그래서 내가 길을 막은 대형종을 사냥하고, 몽크들이 그 혼란스러운 틈을 타 산적들을 토벌하는 애매한 협력 작전을 진행한 적 있었다.
“신전 기사는 몰라도 몽크들은 정말 잘 싸우던데. 물론 상대는 언데드가 아니라 산적들이었지만… 나무를 박차고 화살을 피하며 달려드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지.”
몽크의 전투는 뭐라고 해야 할까, 아크로바틱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지 않으려나. 땅을 박차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나무와 목책 울타리 따위를 디딤대 삼아 무슨 무림 고수처럼 허공을 붕붕 날아다니며 싸우니까.
차이나 드레스처럼 갈라진 수녀복 사이로 드러난 허벅지가 매력적이던 몽크 여캐들이 왜 체력이 도적 수준으로 낮고 회피율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스탯을 가졌는지 알 것 같았지.
“헤에… 롤랑도 신전 기사는 본 적이 없다는 거네?”
“확실히, 귀족 가문에 있던 나도 그들을 본 적은 손에 꼽으니까. 아버지께서 신전에 방문할 때 먼발치에서 본 것 말고 싸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대공 가문도 본 적이 없으면 진짜 보기 힘든 거네.”
“애초에 귀족 가문이 신전 기사가 싸우는 모습을 보려면, 굉장히 불미스러운 일과 엮여야 하잖아.”
“아… 그게 그렇게 되는구나?”
그렇게 테이블 하나를 잡고 몽크와 신전 기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벌컥 열리는 길드의 문.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상급 모험가들은 물론이요, 의뢰를 받았음에도 귀한 구경을 하려던 하급, 중급 모험가들의 시선도 몽땅 그곳을 향한다.
모험가들의 시선과 한세아의 카메라를 통한 시청자들의 이목까지 한 몸으로 받으며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새하얀 갑주를 입은 덩치 큰 기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