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벽증이라도 있는 것 같은 순백의 갑주는 투구부터 각반과 부츠까지 티 하나 없는 새하얀 색이었고, 가슴팍에 여신교의 심볼이 음각된 것 말고는 아무런 장식도 문양도 존재하지 않았다. 흉갑 부분만 제거한다면 갑옷이 아니라 대리석 조각인가 의심이 될 정도.
-어우 눈아픔 ㅋㅋㅋㅋ
-저거 피 묻으면 빨래 어떻게 하냐
-겜 방송 보면서 신성 기사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근데 왜 신전 기사임? 저것도 팔라딘 아님?
-갑옷을 빨래라고 표현해도 되는건가
“와, 근데 갑옷이 저렇게 하얀색이면 전투 끝나고 손질하기 귀찮겠다. 하얀색 티셔츠도 국물 먹을 때 꺼려지는데 무슨 갑옷이 저렇게 흰색이냐.”
피부 하나 드러나지 않은 신전 기사의 위압적인 모습에 모험가들도 시청자들도 저마다 숙덕거리기 시작한다. 현대인의 시선으로 보자면 저 새하얀 갑옷은 독특하면서도 옷에 때 타는 게 걱정될 뿐이지만, 중세인의 시선으로 보자면 보물에 버금가는 귀한 물건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탁 걱정하는 한세아와 시청자들과는 달리 묘한 압박감을 느끼며 웅성거리는 걸 멈춘 모험가들.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는 신전 기사는 문 앞에 서서 커다란 두루마리를 양팔 벌려 펼친 채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덩치가 엄청나게 크지만, 갑옷으로 완전히 모습을 숨기고 있길래 사실은 미녀 기사였다- 같은 걸 예상해 봤는데 아니었네.
“여신의 이름으로, 이 땅의 생명을 위하여-”
낮은 저음이 인상적인 신전 기사가 쫙 펼쳐 든 두루마리는 아무래도 신전의 포고문인 듯했다. 이런저런 종교적 미사여구를 빼고 핵심만 요약하자면, 신전 기사단이 전력을 다해 탑의 내부로 진입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어차피 탑 내부의 몬스터야 수천 명의 모험가가 매일매일 사냥해도 무한 증식하는 놈들. 따라서 신전 기사들은 모험가들이 이 사건의 원흉을 파악하고 마탑이 해답을 찾을 때까지 안전지대를 담당하여 모험가들을 무제한으로 지원하겠다며.
“세상에, 신전이 탑 내부에 성역을 펼칠 생각인가?”
“하기야 언데드 아닌가. 탑이 신전의 영역 안에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가만히 둘 순 없겠지.”
그 말에 모험가들이 흥분해서 술렁이기 시작한다. 모험가라 해도, 아니 목숨을 걸고 탑을 오르는 모험가라서 더욱 미신에 가깝게 종교에 심취한 녀석들이 있기 때문이다.
헌금을 내면 죽을 위기가 비껴갈 거라 믿고 꼬박꼬박 거액을 신전에 바치는 녀석이나, 사제나 수녀에게 불손하게 대하면 여신의 분노가 찾아올 거라고 믿는 녀석 등등 다양한 미신을 믿는 게 용병과 모험가.
그런 미신적인 부분은 상급과 최상급이라 해서 다를 바 없었다. 대형종 따위와의 싸움이나 네임드 몬스터와의 사투에서 운 좋게 살아남는 걸 여신의 은총이라 믿는 녀석이 꽤 있었으니까.
“으음, 롤랑? 우리는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냐니?”
두루마리를 전부 읽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휙 돌아서서 길드를 떠나는 신전 기사. 그 모습에 숙덕거리며 의논을 시작한 다른 모험가들처럼 한세아 또한 내 쪽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질문을 던진다.
고개는 내 쪽을 향하지만, 슬그머니 굴러가는 눈동자가 향하는 쪽은 아이린 쪽. 아무래도 언데드를 직접 목격한 아이린의 단호한 태도가 마음에 걸리나 보다.
테이블에 함께 앉아 신전 기사의 발표를 들은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불이 붙었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열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늘 유순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꼬리까지 위로 뾰족 치솟아서 인상이 조금 바뀌었다고 생각이 될 정도.
“한나 양, 설마 31층에 가지 않겠다는….”
“아니이, 언니! 그럴 리 있겠어요. 31층을 샅샅이 뒤지며 천천히 올라가야 할지, 40층까지 빠르게 돌파해야 할지 고민을 한 거죠. 탑에 이변이 생길 때마다 결국은 10층 단위로 이변이 생겼으니까요.”
“으음,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10이라는 숫자가 마왕의 사악한 흑마법과 연관이 있는 걸까요? 그렇다면 이번에도 40층까지 가 보는 게 좋겠어요.”
-화가 잔뜩난 마망도 좋아 헤으응
-그 10층마다 보스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긴 한데 ㅋㅋㅋ
-하긴 NPC 입장에선 좀 의심스럽긴 하겠다
-애초에 탑도 의심스러운데 지들이 의심해봐야 뭐 어쩌겠슴
-한세아 마녀사냥 엔딩으로 게임 오버되면 좋겠다.
“나 같아도 존나 이상할 것 같긴 해. 그나마 골렘은 21층부터 나와서 크게 의심하는 NPC는 없는 것 같은데. 오크는 20층에 몰려나왔지만 골렘은 21층부터 30층까지 골고루 나왔잖아. 그래도 10층마다 계속 보스가 나오고 내가 계속 클리어하면 NPC들이 막 의심하는 거 아니야?”
-그래도 개소리에 필터링 걸려 있는 거 보면 그렇게는 안 흘러가겠지
-영웅으로 플레이어 빨아주는 쪽으로 가겠지 설마 마녀 사냥을 하겠어
-한 70층 뚫었는데 정치질 당해서 게임오버로 교수형당하면 시발 ㅋㅋ
-ㄹㅇ 그딴 엔딩이면 회사에 불이나요
-불이 문제냐? K-게이머 생각해보면 칼 들고 방문하는거 씹가능임
아이린의 합리적인 의심에 식은땀을 흘리는 한세아. 그렇게 우리 파티의 행동방침은 평소보다 유달리 강력하게 제 의견을 내세우는 아이린에 의해 정해졌다.
신전 기사들이 31층을 향해 진격했다 해도, 안전지대를 확보하고 사제와 수녀들이 부상자를 무상으로 돌봐 주기 위함이기에 우리들의 전투가 획기적으로 편안해진 것은 아니었다.
궁수와 언데드의 상성 문제로 그레이스는 화살을 신중하게 아껴 사용해야 하고, 케이티는 한세아가 만든 좁은 땅 위에서 제한된 전투를 치러야 했다. 그나마 아이린의 신성력 덕분에 독액이 튀어도 무사할 뿐이지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
“후우, 확실히… 층이 바뀌었다는 느낌이네. 30층보다 훨씬 힘들어.”
“골렘만 가져올 수 있었어도 이런 독 따위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는데…!”
32층으로 올라가는 통로를 코앞에 둔 일행들이 작게 중얼거린다. 동굴 지형도 좁은 건 마찬가지였지만 상대도 그 좁은 지형에 맞춰 움직였다. 하지만 늪지대에 나타나는 언데드들은 독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고 움직이니 일방적으로 불리한 모양새.
검술뿐만 아니라 보법이 더해져 민첩한 몸놀림을 주특기 삼은 케이티에게 있어 스트레스가 쌓일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탑의 지형이 이따위로 악랄한걸. 레베카 등 최상급 모험가 인맥들에게 듣기론 늪지대 다음은 절벽이 가득한 고원에서 비행형 몬스터인 하피 따위를 상대해야 한다던데.
… 아니꼬워도 미리 적응하는 수밖에 없지.
-잼민이는 아직도 골렘 타령중이네 ㅋㅋㅋㅋ
-근데 보면 볼수록 꼬접하고 마법사 마렵긴 하네
-아빠 만나기 싫어서 튀었으면서 뭔 장난감 뺏긴 애새끼처럼 ㅋㅋ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채팅입니다]
-이제 20층이라 로봇 탈 생각에 싱글벙글 했는데 31층 보니까 마음이 식어버린다;;
그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본 시청자들의 걱정도 늘어만 간다. 게임을 할 생각 없이 구경만 하는 사람들은 낄낄대며 웃지만, 한세아와 김석현의 뒤를 따라 우르르 몰려오는 공략파 플레이어들은 웃을 수 없겠지.
한세아는 그나마 마법사라서 일행들이 발 디딜 땅을 만들고 늪을 메우는 식으로 서포팅에 집중을 하고 있지만, 채팅을 치는 시청자 대부분은 케이티처럼 저 좁은 길목에서 좀비와 스켈레톤을 상대로 칼부림을 해야 하니까.
“그래도 32층으로 향하는 통로를 생각보다 빨리 찾았네.”
“이게 다 한나 덕이지. 한나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우리는 무릎 아래가 독액에 홀딱 젖어서 신성력으로 치료받고 있었을걸.”
“그래도 애매하게 늦었으니, 32층에 올라가면 곧바로 안전지대를 찾아야겠네요. 형제님들이 계신 곳을 바로 찾긴 힘들 테니, 작은 웅덩이를 한나 양의 마법으로 메운 다음 거기에 텐트를 설치해야 할까요? 음… 거기에 제 정화의 성법까지 있다면 가능할지도.”
“그러려면 그 끔찍한 회색 나무도 다 베어버리자. 꿈틀대는 게 우리가 잘 때 목을 조를 것 같아. 잿빛 나무는 북부에서 많이 봤는데, 이렇게 기분 나쁜 녀석들은 처음이야.”
리저드맨 스켈레톤들을 박살 내고 뼈가 마석이 되는 광경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일행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 향한다. 나무가 듬성듬성 나 있는 늪지인지라 저 멀리 통로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울창한 숲이나 어둑한 동굴보다 시야는 확보되어서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건 조금 더 빠르네. 동굴과 달리 여차하면 한세아의 마력을 전부 사용하던가, 내가 두 명씩 어깨에 태워서라도 독 늪을 가로질러 지날 수 있으니까.
“이번에도 통로를 넘어가자마자 다친 모험가가 있지는 않겠지?”
“에이, 설마. 이야기가 퍼지고 신전이 공표까지 했는데 해독제 정도는 준비해 왔겠지.”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 초급과 중급이 아니라 상급이라 해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녀석들은 늘 있으니까.”
“롤랑, 말이 씨가 된다는 거, 알지?”
곧바로 통로를 찾아낸 것에 들뜬 일행들과 수다를 떨며 깊어 보이는 독 웅덩이를 피해 빙 둘러 통로로 향했다.
게이트 너머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탱커로서 언제나 가장 먼저 게이트를 넘는 것. 그건 우리 일행들도 알고 있는 암묵적인 룰이였다. 탐색하는 그레이스가 내 곁에 서고, 후열을 엄호하는 케이티가 아이린과 한세아의 주변을 맴도는 것처럼.
그런 나를 맞이하는 32층의 첫 풍경은, 그레이스의 말대로 중독된 채 도망치는 모험가가 아니었다.
“뭔, 씨발!”
갑작스럽게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트롤의 몽둥이였지.
※
“롤랑? 이게, 콜록, 뭐야?”
“으, 우웨엑― 아, 악취가….”
“케혹, 케흑-! 여, 여신이시어!”
게이트를 넘어온 일행들이 마치 화생방 훈련실에 들어간 신병처럼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야 그럴게, 그녀들이 넘어온 통로의 앞에는 내가 박살을 낸 트롤의 잔해가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냥 트롤의 시체가 아닌, 언데드로 변이했는지 가스 폭탄처럼 펑! 터져버린 트롤의 시체가.
다짜고짜 날아온 몽둥이에 놀라 반격을 하자 일격에 죽어버린 누런색 트롤. 아무래도 마력이 아니라 신성력을 사용한 스킬은 언데드에게 추가 데미지를 주나보다. 그나저나 누런 종양으로 뒤덮여서는, 죽으면 가스 폭발을 일으키는 트롤이라니.
“저거, 케흠, 트롤이야?”
“맞아. 늪지대가 오염되면서 위에 있어야 할 몬스터도 마구잡이로 나타나는 모양이다. 트롤은 뿔늑대나 오크 사냥꾼, 장님뱀처럼 40층에만 나와야 할 녀석인데.”
“그런 위험한 놈이 32층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