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난 맥주. 버드와이저.
시훈
꼭 그거여야만 해? 다른 건 안 되고?
그러게. 오늘따라 그게 땡기네. 없으면 다른 거 사 오든가.
시훈
아니야. 버드와이저는 어딜 가나 있는데. 우리 자기. 서방님이 사갈 테니까 딱 기다려.
웅♡
그래, 오늘 오후까지는 좋았다.
평소보다 퇴근이 빨랐고, 기다리던 드라마 시리즈 신작이 나왔으니 둘이서 오붓하게 맥주나 마시고 히히덕거리다 눈 맞으면 화끈하게 한 판하고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려 했지.
그런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난 분명 우리 집으로 퇴근을 했고, 현관문을 열었을 뿐이었다.
“시훈아. 시훈아? 뭐야? 집에 없어?”
분명 신발도 있고 짐도 있는데 사람이 없었다.
“……어?”
아니, 정확히는 누군가가 있긴 했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으아아악! 뭐야!”
나는 현관문 앞에 우뚝 멈춰 선 채로 그대로 바짝 굳어버렸다. 내가 집을 잘 못 찾은 건가? 아니지. 그러면 문이 열렸을 리가 없잖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문을 열고 나가 호수를 확인했다. 5동 13호 우리 집 맞는데?
왜인지 모르게 불안한 기운이 등 뒤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와 천천히 눈을 돌렸다.
커다란 옷더미에 둘러싸여 몸부림치고 있는 꼬맹이.
그런데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
흰 피부와 올망졸망한 코, 토끼같이 커다랗고 순둥한 눈.
어? 나 분명 쟤 아는데?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낯이 익은데…….
일단 나는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성은 맞았지만, 부득이한 이유로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몸이었기 때문에 우리 집에 대관절 저런 어린아이가 와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나는 외동이라 조카도 없다고!
“저기.”
목구멍이 덜덜 떨렸지만 겨우 입을 열어 내 앞의 꼬맹이에게 물었다.
“그쪽은 누구…… 누구세요?”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당황하면 지는 거다. 비록 콩만 한 꼬맹이에게 존댓말이 튀어나왔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
“…….”
억만년 같은 침묵이 지났고, 아이는 커다란 눈을 도르륵 굴리며 천천히 나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런데 마주친 눈빛이…… 어, 그러니까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세상만사 다 알아버려 찌들어버린 어른의 눈같이 퀭하고, 또 어딘가 몽롱한 것이 꼭 술에 취한 것 같은…….
“윤지나, 형…….”
헐?
헐?
뭐? 윤진이? 지금 쟤가 나한테 ‘윤진이’라고 했어?
“어, 너너…… 너??”
“윤진아. 왜 이제 와. 나, 나, 좀 이상해진 거 같은데.”
헙! 나는 볼썽사납게 입을 틀어막고 뒤로 물러났다.
나, 나! 저 눈빛. 저 말투 알아. 너무 잘 알아서 문제야!
재빠르게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 떡하니 앉아 익숙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초면이 아닌 것 같은 남자아이.
“혹시 너…… 권시훈이야?”
“아! 그럼 여기에 나 말고 또 누가 있는데!”
“헉…….”
진짜였네. 진짜 권시훈이었네.
“나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잠깐. 너 지금 이 꼴이 다 뭐야. 왜 갑자기 애기가 되었어?”
“안타깝지만 꿈 아니야…….”
“세상에.”
꼬맹이…… 아니다. 권시훈은 자꾸만 흘러내리는 옷을 작은 손으로 꾸역꾸역 주워들어 어깨에 걸쳐 올렸다. 아, 나 저 옷도 알지. 어디서 많이 봤다 했어. 왜 모르겠어. 내가 사준 옷인데. 젠장.
모른다고 잡아뗄 수 없었다.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거실에 주저앉아 울망울망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저 아이는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올해 딱 서른. 무려 190에 육박하는 장신. 몸무게는 85kg. 아주 훌륭한 근육질 몸을 가졌고, 어지간한 연예인 귀싸대기를 후려갈길 법한 비주얼을 가진 훌륭한 내 남친. 내 애인. 권시훈.
그 남자가 지금 제 반절도 되지 않은 꼬맹이로 변해 버린 것이다!
* * *
옷장을 다 뒤집어엎어 내 옷 중에 줄어들고 줄어들어 가장 작은 옷을 내주었다.-조금만 늦었다가는 아기 권시훈에게 로우킥이라도 맞을 것 같아서 군대에서 유격할 때보다 날래게 움직였다.- 비록 소매가 팔꿈치를 덮었고 엉덩이가 보이기 직전이었던 반바지가 종아리 정도에 닿았지만 역시 타고난 피지컬은 아이가 되어도 무시 못 하는 건지, 어깨나 품이 얼추 맞는 모습에 또 현타가 찾아왔다.
“괘, 괜찮아? 입을 만하……니?”
“뭐…… 일단은 몸은 가렸으니 됐어.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네가 언제부터 집에서 옷을 입고 다녔다고…… 아니야.”
무슨 말을 못 하게 하네. 어린애 주제에 그렇게 째려보지 말라고. 무섭게. 평소 집에서 옷 따위 걸치지도 않았으면서, 아이가 되니 새삼스레 옷 챙겨 입으려는 게 너무 웃기잖아.
안주 하나 없이 술만 들이켰는지 테이블 위는 깨끗했다. 어지간히 목 말랐나 보네. 시훈이 마셨다던 맥주는 이미 빈 깡통이 된 채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
널브러진 옷가지를 치울 정신이 없어 일단 문제의 테이블 앞에 앉았다. 시훈은 유독 더 도드라지는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그래. 놀랐겠지. 나도 지금 벌렁거리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는데.
“너 이 맥주 대체 어디서 산 거야?”
“퇴근하다 편의점에서 샀지.”
“뭔가 이상한 건 못 느꼈어? 이거 처음 보는 브랜드인데?”
“아니…… 자기가 버드와이져 사 오라면서. 난 그것만 사려고 했는데 점원이 무슨 행사한다고 그냥 준 거야. 준다는데 버려? 아까워서 갖고 왔지.”
“야…… 너 진짜 공짜 좋아하네.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그냥 두고 왔어야지.”
“핫씨! 내가 그걸 알았으면 이러고 있겠냐고! 자기는 곧 죽어도 버.드.와.이.져.만 먹고 싶다 하니까! 내가 이거 마셔버리고 치우려 했지!”
“참 고마워 돌아가시겠다. 어? 지금 나한테 성질내는 거냐? 이런 대형 사고를 쳐놓고?”
“뭐엇? 사고를 치다니! 사고를 당한 거겠지! 나라고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냐고!! 그놈의 버드와이져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앗!”
그래. 사고당한 것 맞지. 네가 아이가 되고 싶어서 된 건 아닐 테니까.
“푸, 푸흡……”
지금 할 말은 아니긴 한데 평소에도 약간 새던 발음이 아이가 되니 더 그 증세가 심해져 ‘버드와이저’를 ‘버드와이져’라고 하는 거 진짜 씹덕사 할 것 같다. 거기에 말투나 단어 선택이 서른 살 권시훈 그대로니까 더 돌아버리겠다.
“흠흠. 그래도 경솔했던 건 맞잖아.”
“내가 아니더라도 그 상황을 의심하고 수상하다고 생각할 사람이 어딨다고 그래!”
“나는 의심할 것 같은데.”
“몰라! 난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한 게 다야!”
“이상한 맥주 받아 와서 냅다 마시라는 말은 한 적 없는데?”
“아오!! 진짜! 지금 나 놀려?”
정말이지 이 심각한 상황에 내 남자친구를 놀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아니, 없었다. 그런데 작고 짤뚱한 발가락에 힘을 바짝 주고 나를 ‘너’, ‘자기’라고 부르며 바락바락 성질내는 게 너무 귀여워 보여 멈추기가 힘들었다.
“와…… 시훈아. 나한테 너라고 더 해 줘 봐. 이거 기분이 이상하네.”
“……뭐? 설마설마했는데 자기 변태였어?”
애기가 정색하며 변태였냐 하니까 진짜 무슨 범죄자 된 것 같잖아! 아니거든?
이상하다기보다는 좋은 쪽이었지만 솔직하게 말했다가는 정말 변태 취급을 면치 못할 것 같아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난 그냥 신기해서 그러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어른이었던 남친이 애기가 되어버렸잖아.”
“하…… 너 진짜 어이가 없따.”
“그런데 너 왜 자꾸 혀 짧은 소리 내니? 컨셉이야?”
“아! 몰라!! 발음이 자꾸 이렇게 나오는 걸 어떻게 해!”
“컨셉 같은데…….”
“맘대로 생각해라.”
정말 다들 알아야 한다. 저 어린아이의 얼굴에서 만사 통달해버린 어른의 표정이 나오면 어떤 느낌인지.
“진짜 믿을 수가 없다.”
“나도.”
“이걸 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뭐, 또 할 말이 남아서 그래.”
“있잖아. 시훈아. 사실 나 옛날부터 너 어렸을 때는 어땠을까 보고 싶긴 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아. 미친! 쫌 적당히 놀려!”
“어어. 아가가 욕하면 못써요?”
“야아! 박윤진! 안 그래도 심란한데 까불지 마!”
어지간히 분했는지 유아 권시훈 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쿵쿵대며 내 바로 앞까지 걸어왔다.
암만 보폭을 벌려 봐도 애치고 보폭이 큰 거지 그래봤자 애기였다. 종종거리는 걸음걸이가 너무 귀엽고 깜찍해서 품 안에 꽉 가두고 깨물고 싶어!
“너 적당히 해! 어? 진짜 빡칠라고 하거든?”
큽…….
미안. 시훈아……. 하, 정말 귀여워 진짜로.
하지만 지금 티를 내면 영원히 삐져서 상대도 안 해 줄 것 같아 부러 표정을 굳히고 아기 시훈을 마주 바라보았다.
“흠, 흐음. 시훈아. 흥분 그만하고 우리 생각이라는 걸 해 보자.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흥분을 하지 마아? 네가 먼저 약 올렸거든?”
“아. 너도 적응이 안 되겠지만 나도 어색해 미치겠거든?”
“그래서 뭐! 어쩌라고!”
어떻게 해. 화내는 것도 너무 귀엽다.
“시훈아.”
“이씨. 왜 자꾸 부르는데?!”
작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시훈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상황에서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나 뽀뽀 한 번만 해 주면 안 되나?”
씩씩대며 열을 올리던 시훈은 제 어깨를 붙잡는 어른의 손에 파드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진짜 신기하다. 어른 권시훈의 어깨는 내 손에 반도 안 들어찼는데, 아이가 되고 나니 한 손에 그러쥐고도 남았다.
누굴 놀리거나 열받게 하는 취미는 없었지만 이번 기회에 덩치만 믿고 기고만장 나대던 남친을 놀려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사실, 내가 권시훈을 만나면서 단 한 번도 얘를 이겨본 적이 없어서 그랬는지도.
내가 얼굴을 앞으로 쑥 내밀자 시훈은 그야말로 기가 찬다는 듯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내가 진짜 애인 줄 아나 봐.”
씩씩대며 코앞까지 다가온 시훈은 작고 하얀 손으로 내 양 볼을 세게 움켜쥐고는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아기 시훈의 갑작스러운 뽀뽀에 난 화들짝 놀라 고개를 얼른 뒤로 뗐다.
“아! 뭐 하는 건데!”
“야! 내가 아무리 미쳤다고 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애 상대로는 도저히 못 하겠다!”
“뭐? 내가 애냐고! 나 권시훈이라고! 서른 쌀!!”
“…….”
“…….”
“와 방금 발음은 너무했다.”
“……하, 시바.”
그래. 너무했다. 시훈은 입술을 소매로 거칠게 문질러 닦더니, 발을 동동 구르며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내가! 씨이! 다신 맥주 먹나 봐라!”
이렇게 뽀뽀 이상의 스킨십은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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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