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침이 흐를 뻔했다.
“와. 여기 유치원 맞아? 우리 잘 못 온 거 아니지?”
“자기야. 여기 봐봐. [Apple seed English Academy(애플 시드 잉글리시 아카데미)] 영어는 읽을 수 있지?”
“영어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재미로 다니기에는 너무 본격적인 거 아냐?”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자고?”
“아니, 그건 아닌데…….”
보기만 해도 주눅 들어서 걸음이 안 떼어지는 걸 어쩌라는 거야.
시훈이 노래 노래를 부르던 ‘비싼 사립 유치원’은 바로 앞까지 와서 마주하니 실로 그 위용이 대단하기 그지없었다.
그냥 동네 어머님들이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하는 것만 들었지, 이 정도로 번쩍번쩍한 곳인 줄 몰랐다. 어느 나라 궁전을 방불케 하는 휘황찬란한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른들이 축구를 해도 될 만큼 큰 잔디 운동장이 펼쳐져 있고, 운동장 한편에는 놀이동산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엄청난 규모의 놀이터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너무 부담스러운데, 그냥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혀엉. 자기야. 얼르은…… 가자아.”
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시훈이 내 손을 꼭 붙들고 앞장서는 바람에 나는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는 소처럼 질질 뒤따라 걸었다.
슬쩍 시훈을 내려다보니 얼마나 기대를 하고 있는지 동그란 눈이 별을 박아 놓은 것처럼 반짝였다.
아니, 대체 서른 살이 영유아들 다니는 유치원에 입소할 생각에 신나 하는 건 또 뭐냐고. 제정신이 박혀 있는 건 맞는 거겠지?
“좋니……?”
넌지시 물어보니 동그란 머리통이 위아래로 크게 움직인다.
“응! 개 좋아!”
“……넌 유치원 가면 그 입부터 어떻게 해야겠다.”
“아, 그러네. 입조심 해야겠네? ‘개’, ‘시X’, ‘존X’ 이것 말고 또 뭐가 안 되더라? 아, 또 있네. 이 X같은…….”
“그만 하세요. 지옥의 주둥아리 씨.”
“헤헤.”
난 분명 비아냥거린 건데 눈치채지 못하고 연신 싱글벙글이다.
“아이고 내 팔자야. 세상에 어느 놈이 남친 유치원 입학시키려고 오겠니. 키워서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자기야. 역키잡이겠지. 키워서 잡아먹힐 거잖아.”
“…….”
이 와중에 본인 포지션 주장을 하시겠다?
똘똘해 보이는 눈이 얄미웠지만 차마 쥐어박을 수는 없어 몰래 이를 악물며 화를 참았다.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해. 재밌잖아.”
“속 편해서 좋겠다. 진짜.”
“자기가 너무 생각이 많은 거야.”
내 손바닥만 한 발이 잘 깔린 대리석을 타박타박 밟고 지나간다. 내 기분 탓인지 뭔지 그 걸음 소리마저 경쾌하게 느껴졌다. 이러면 내가 싫은 소리 하기 뭣하잖아.
그래. 내가 생각이 많은 거겠지. 그런데 천성인 걸 어떡하라는 거야.
* * *
“마침 결원이 생겨서 다행이네요! 저희 원이 대기도 길고 결원도 잘 생기지 않아서 입소하기 굉장히 어렵거든요. 시훈이가 저희 원이랑 인연이 있나 봅니다.”
“아…… 네. 그런가요. 참…… 다행이네요.”
생각했던 것보다 유치원 입학은 너무 간단히 해결되었다. 이렇게 쉽게 풀려도 되나 싶을 만큼.
사실 엄청 걱정했다. 찾아보니 애들 유치원을 보내려면 필요한 서류도 많고, 뭐 증명해야 하는 게 어지간히도 많았는데, 주민등록상 30세인 권시훈이 합법적으로 유치원에 갈 방법은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밤새 머리를 쥐어 싸매고 고민하다 결국 될 대로 되라. 안 되면 돈 아끼는 거라 생각하고 무작정 이곳까지 쳐들어왔는데, 막상 자리에 앉으니 괜한 걱정이었구나 싶었다.
상담실로 안내받고 교육과정과 유치원 소개가 이어졌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원장은 나와 시훈의 신상을 캐기는커녕 오히려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증빙서류가 부족하니 돌아가라고 해 주길 내심 바랐는데 이렇게 쉽게 통과되다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등본이 없는데 어쩌냐니까 나중에 내도 된다며 언제든 편할 때 제출하면 된단다. 역시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
“여기 저희 원 소개 브로슈어구요. 내일 수업 때 필요한 준비물 목록이에요. 등원 때 챙겨 보내 주시면 됩니다.”
실내화, 칫솔, 물티슈, 양치컵……? 그냥 아무 컵이면 되지 왜 꼭 스테인리스로 되어 있어야 하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애 안 키워본 티 내는 꼴이 될까 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수업 과정 안내해드릴게요. 아시다시피 오전 시간에는 영어로 수업이 진행되고요. 원어민 선생님께서 지도해 주실 거예요.”
“아…… 영어요.”
“네. 수준별로 지도 들어가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훈이 혹시 영어 좀 할 줄 아니?”
걱정 마세요. 얘 영어 겁나 잘해요. 미국에서 대학 나왔거든요.
“잘은 모르는데…… 열심히 하께요.”
“그래그래. 어차피 친구들도 유창하게 말하는 친구는 없어. 선생님이랑 친구들이랑 그냥 재미있게 놀고 공부하면 돼요. 알았지?”
“녜에.”
눈을 돌려 옆에 앉은 시훈을 흘긋 바라보았다.
어른용 소파에 앉아 있어 땅에 닿지 않은 짧은 다리가 얌전했다.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려두고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거리며 아직 주변이 어색한 듯 큰 눈을 도로록 굴리면서 이곳저곳을 살핀다. 거기에 한껏 어눌해진 발음은 덤이다.
틀림없다.
시훈은 지금 제 역할에 심취한 거다. 처음 온 유치원이 낯설어 조금 겁을 먹었지만 새로운 경험을 할 기대감에 가득 찬 유치원생.
기가 차네. 정말로. 저건 감독이 아니라 배우 했으면 월드 스타 됐을 거야. 서른 살의 정신상태를 가지고 어떻게 저런 뽀짝함을 뿜어낼 수 있지?
“이야! 우리 시훈이 씩씩해서 다행이네! 그러면…… 영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앞으로 초등학교 준비하려면 한글이랑 수학도 어느 정도 할 줄 알아야 하거든. 그러다 보면 공부를 시훈이 생각보다 많이 할 수도 있어. 괜찮겠니?”
“네! 저 공부 좋아해여!”
“이야! 멋지구나!”
사실, 무엇을 어떻게 공부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정규교육과정을 착실히 밟아온 몸만 7세 권시훈…… 아니지 박시훈이지. 여튼 시훈 어린이는 한글을 알다 못해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경지에 이르렀고, 수학은…… 뭐 본인 말로는 재능 없다고 했지만 어지간한 초등학생보다는 잘할 테다.
어쨌거나! 나한테 중요한 건 가격이라고. 가격. 대체 이 으리으리한 유치원은 돈이 얼마나 있어야 다닐 수 있는지!
“시훈이랑은 어느 정도 이야기된 것 같으니 이제 비용을 설명드려야겠죠?”
“아, 네.”
“입학금은 일괄 납부해 주시면 되시고요. 원비는 매달 납부입니다. 특별활동 비용은 선택 시 별도 청구되시니까 시훈이랑 상의해 보시고 결정해 주세요.”
“아…… 네에. 알겠습니다.”
헉…… 미친. 개 비싸잖아. 심봉사도 개안할만한 가격에 눈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시훈이 놀란 티 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자꾸 옆에서 허벅지를 꼬집어 대서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원장선생님을 향해 꽃 미소를 발사했다.
“교육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신가 봐요.”
“아, 그런 편은 아니…… 네. 그런 편이죠.”
“저희 원을 선택해 주신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저희 원이 이 근방에서는 교육 커리큘럼이나 시설 면에서 모두 최고 수준이니 시훈이 믿고 맡기시면 훌륭한 아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버님.”
“컵. 아, 아버님…….”
앞의 다른 말은 다 건너뛰고 마지막 ‘아버님’이라는 한마디에 머리에 직격탄을 맞아버렸다.
엄마. 나 졸지에 애 아빠 됐어. 엄마는 할머니 됐어. 난 뭘 한 것도 없는데 갑자기 어디서 내년이면 초등학교 가는 남자애가 뚝 떨어졌네? 그런데 그 애가 며칠 전까지 나랑 배 맞추던 사이야…….
“우리 시훈이도 늦게 들어왔지만, 친구들이랑 잘 지낼 수 있지요?”
“녜! 열심히 하겠씁니다!”
가증스러운 새끼…….
원장선생님에게 활짝 웃으며 씩씩하게 대답하는 게 영락없는 일곱 살 어린이다. 좋냐. 네 남친은 애 아빠 만들어 놓고 너는 유딩 코스프레하니까 아주 기분 째지니? 에휴…….
좀 환멸 날 것 같기도 하고…… 귀여운데 어이없기도 하고, 이 복잡한 감정을 뭐라 설명할 길이 없어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유치원을 나서는 시훈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못해 곧 날개를 달고 날아갈 거 같다. 덕분에 내 지갑도 하늘로 날아갈 만큼 가벼워졌다. 이 새끼는 지가 다닐 거면 지 돈을 낼 것이지 왜 불쌍한 월급쟁이의 돈을 터는 건데. 돈은 네가 더 많이 벌잖아.
“그렇게 좋냐…….”
“웅! 말했잖아. 내 소원이었다고.”
“……별.”
“어쩌면 신이 내가 그동안 엄청 어엄청 열심히 살아서 한 풀어보라고 이렇게 만들어 준 게 아닐까?”
“이 재앙을 그렇게 해석하다니…… 긍정적 사고 칭찬한다.”
“아니,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겠어?”
“아예 돌아갈 생각이 없구나. 너?”
“일단은 즐기는 거지.”
“에휴…… 모르겠다.”
그래. 모르겠다. 네 말 대로 어찌 되겠지. 본인이 괜찮다는 데 뭐 어쩌겠어. 답답함에 한숨을 푸욱 내쉬니 시훈의 눈이 내 쪽으로 도르륵 굴러왔다. 시선이 느껴졌지만 눈 돌리기도 귀찮아서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자기야.”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장난기가 가득 묻어났다. 쟤는 남친이 아니라 진짜 웬수다. 웬수! 너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 살고 죽으면 너 꼭 삼베옷 입고 백일장 치러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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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