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시훈 본인은 현재의 삶에 나름-아니다. 사실 매우- 만족하고 있지만, 일단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저 동그란 머리통의 꼬맹이는 지금 가상의 세계에 빠져 세상모르고 허우적대느라 사리 분별을 포기해버렸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과학자인 나는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대체 이런 일이 왜 나에게 일어난 건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소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옛 선인들의 말씀이 기억나 방구석에서 생각하는 대신 직접 몸으로 움직여보기로 했다.
휴일까지 기다릴 수 없어 연차를 내고 시훈이 갔다던 편의점에 쫓아가 물어보니, 문제의 맥주는 새로운 거래처에서 이벤트성으로 제공한 제품이라 지금은 구할 수 없다고 했다. 유통업체에서는 제조사에서 샘플로 줬다고 했고, 결국에는 제조사에서 운영하는 연구소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기어코 연구소까지 쫓아가 담당자에게 상황을 설명하니, 별 희한한 일이 다 있다며-그걸 누가 모르냐고- 껄껄 웃었다.
“이야. 제가 온갖 부작용을 다 봐왔지만, 몸이 작아진다는 말은 또 처음 듣네요! 이거 완전 연구대상 감인데?”
자신을 K제약 소속 연구원이라 소개한 오형석 연구원은 근래 신약 개발 중인 시료 중 하나가 모종의 문제로 인해 식품 쪽에 섞여 들어가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그, 애인분 상태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말씀해 주시고요. 아, 제가 말하는 ‘이상함’은 숨이 안 쉬어진다든가 발작 같은 걸 해서 곧 사망할 것 같은 상태를 말합니다.”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헛허허허. 뭐 큰 문제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알만한 분이 왜 이러실까.”
“…….”
“어어? 표정 푸세요! 풀어!”
여기저기 그냥 다 미친놈들밖에 없는 것 같아.
세상만사 생각 없이 즐거워 보이는 해맑은 얼굴로 남의 남친 죽네, 마네 하는 것도 어이없는데 또 그게 별거 아니라고 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다.
“흠흠. 어, 그러니까…… 제가 보기엔 약물 과다복용 부작용일 가능성이 클 것 같습니다만 혹시나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
“전 ‘만약’이라는 단어 제일 싫어합니다.”
“윤진 씨 생긴 거랑 다르게 굉장히 까칠하시네요?”
“뭐라고요?”
저 아저씨는 사람 속을 뒤집으려고 작정을 했나. 남이사 까칠하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인데?
열이 팍 치솟아 눈에 힘을 팍 주고 오형석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오형석은 별 타격 없는 듯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래. 나도 안다.
지금 저 새끼는 쓸데없이 어려 보이는 내 얼굴 때문에 나를 개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유. 아닙니다. 제가 실례를 했네요. 죄송합니다아.”
“…….”
내가 입을 꾹 닫고 오형석을 노려보고만 있자, 무안해졌는지 큼큼 헛기침하며 재빨리 말을 돌려 버린다.
“그, 저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일단은 너무 걱정 마세요. 진행 상황도 계속 공유드리겠습니다.”
“모쪼록 빨리 해결 방안이 나왔으면 하네요.”
“허허. 이런 일을 겪게 해드려 정말 죄송스럽고 그러네요.”
“……아시면 빨리 해결 좀 해 주세요.”
더 말해 봐야 무엇하리. 내 입만 아프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지만 눈치를 시베리아에 두고 온 오형석 씨는 그저 속없이 너털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저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이네요. 아시다시피 저희 연구소가 이런 쪽으로는 철저한 편인데.”
“그게 참 마음에 안 드네요. K같이 큰 기업이 이딴 식으로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다니. 경영진이 개판이어서 그런가.”
“네?”
“……아닙니다.”
오형석은 내 말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여기서 더 말하고 싶지 않아 대충 둘러대며 대화를 끊어버렸다.
언론이나 신문고에 제보하지 않는 대신 두 달 동안의 정신적, 신체적 보상이 제조사와 연구소를 통해 빠르게 이뤄졌다. 굴지의 대기업다운 빵빵한 액수에 시훈은 꽁돈 생겼다며 엄청 좋아했지만 나는 마냥 웃을 수 없었다.
“……하, 진짜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힘 빠져.”
“왜에. 힘이 왜 빠지는데. 자기 밥 안 먹었어?”
“무슨 뜬금없이 밥 타령이야.”
“으응. 자기 밥 안 먹으면 힘없잖아.”
“내가 무슨 밥에 환장한 것도 아니고…….”
“아, 그럼 뭔데!”
정말 몰라서 물어?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야? 갑자기 화가 욱하고 치솟아 올라 인상을 팍 쓰고 시훈을 노려보았다.
“와. 시훈아. 네가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지 않니? 어린이집도 아니고 내가 이 창창한 나이에 애기 뒷수발을 들면서 인생을 허비해야겠니? 그것도 기약 없이?”
시훈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에는 내 정신상태는 이미 사회에 찌들대로 찌들어 버려 도저히 좋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대외적으로 이 집에 남은 어른은 나 하나고, 그것은 곧 앞으로 발생할 모든 문제나 이슈들은 모두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 정말 어른 되고 제일 싫은 게 이 망할 책임지는 건데. 이제는 나 하나 책임지는 거로도 모자라서 몸만 일곱 살인 애인까지 책임져야 한다니. 이 얼마나 불공평한 처사인가!
“엥? 그게 고민이었던 거야?”
“넌 그게 고민이 아니야? 걱정이 아예 안 돼?”
“그냥 둬. 어차피 우리 손을 떠난 일인데 뭐.”
속 편한 새끼…… 너 같은 정신적 한량을 거두고 7년을 살아왔다니. 넌 평생 나한테 잘해야 한다.
“가만 보면 자기는 참 걱정이 많은 것 같아. 그것도 쓸데없는 걱정.”
“넌 약간 네가 너무 안일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니? 난 아직도 현실감이 없는데 넌…… 참…… 어휴.”
그냥 한숨밖에 안 나온다. 한숨으로 땅이 꺼졌다면 난 벌써 지구를 뚫고 우주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거야. 내가 태양계 어딘가에서 해매고 있으면 권시훈 너는 나를 구하러 올 거니? 그럴 거지? 당연히 그러는 게 맞겠지?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앞에 놓인 잔 속의 술을 목구멍으로 털어 넣고 식탁 위에 탁 내려놓았다. 나는 지금 너무 심란해서 혼자 식탁에서 김치에 소주를 까는 중이었다.
“이걸 왜 혼자 마시고 그래. 불쌍해 보이게.”
시훈은 짧은 다리로 종종 걸어와 맞은편의 식탁 의자에 걸터앉았다.
“……으휴.”
얼른 취해버리고 잠이나 자야지. 냅다 원샷 했다.
그걸 가만 보고 있던 시훈은 한쪽 눈썹을 씰룩이더니, 내 잔을 뺏어 들어 제 앞에 놓아두곤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
아니, 그런데 지금 얘가 뭐 하는 짓이야??
“야!! 야! 권시훈 너 뭐 하냐? 미쳤어?”
“나도 기분 더러워서 한잔하려고 하는데 왜!”
“웃기시네. 너 지금 몸으로는 한 잔은 고사하고 한 방울도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지?”
“아니. 이 예쁜이가 지금 뭐라는 거야? 안 되긴 뭐가 안 돼!”
“시훈아…… 너 거울 좀 보고 와라. 네가 지금 술 마셔도 될 만한 얼굴인가.”
씩씩대며 소리 지르는 것도 영락없는 꼬맹이구만, 어디서 겁도 없이 소주를 입에 대려고 해. 내가 아무리 네 남친이어도 이건 정말 아니야! 난 최소한의 도덕심과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와, 진짜 미치겠네…… 이젠 하다 하다 술 마시는 것까지 뭐라고 할 참이야?”
“아오! 야!! 너무 하잖아. 정말로! 아까 내가 그랬지? 지금 넌 영락없는 유치원생이라고! 거기다 대고 너랑 대작하면 내가 뭐가 되냐?”
“아무도 없는데 어때!”
“내 양심이 보고 있다! 그리고 내일 너 유치원 가는 첫날인데 소주 마시고 술 냄새 풀풀 풍기면서 유치원 가서 친구들한테 인사하려고 했어?”
“누가 친구야! 다 애기들이지! 나랑 이십 년 넘게 차이 나잖아!”
“하이고. 네 그러셨쪄여. 권시훈 어린이.”
“야!! 자꾸 애 취급할래!! 나 애기 아니라고옷!”
시훈은 빨간 입술을 감쳐 물며 씩씩대었다. 아이가 되니 안 그래도 동글동글 동글이가 온 데 다 안 동그란 데가 없어. 눈도 동글. 코도 동글. 입도 동글. 얼굴도 동글.
아, 얘는 진짜…… 어른일 때는 몰랐는데 작아지니까 왜 이렇게 귀여워. 아주 그냥 저 쪼끄만 앞니가 삐죽 튀어나와 있는 게 미쳐 버릴 것 같잖아.
“아! 뭐 하는 거야!”
이 세상 귀여움이 아닌 생명체가 앞에 앉아 눈을 도르륵 굴리고 있는데 어떻게 참니!
아무튼 나는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솔직히 말하면 조금 취했다- 시훈의 양 볼을 손으로 감싸고 쪽쪽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왜에- 귀여워서 그르치(쪽). 웅? 아오 너무 귀엽다. 진짜아(쪽).”
“이씨…… 감질나게 할 거면 때려치우라고!”
“오구오구- 우리 후니 감질나쪄? 아주 미쳐버리게써요? 아이고 이를 어쩌나아(쪽쪽쪽). 형아가 가슴이 아파 죽겠네.”
“아…… 쪼오옴.”
열 내봤자 소용없어. 끽해야 한 주먹도 안 되는 꼬맹이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떼쓴다고 될 일이 아니란다.”
“…….”
“지금 넌 지나가는 멍멍이가 봐도 유치원생이잖아.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해 줘야지.”
“…….”
다행히도 30년 세월 동안 착실히 도덕 관념을 쌓아온 권시훈 씨는 화는 나는데 딱히 반박할 말이 없는지 더 이상의 비행(?)을 저지르는 건 그만두고 제 머리를 쥐어뜯다 사자후를 외치며 괴로워했다.
“아오오오오!! 진짜. 박윤지이이인!”
그런데 내 남친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응당 함께 괴로워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입꼬리가 자꾸 비죽비죽 올라갔다. 유치하고 치사하게도 권시훈이 아이가 되고 나니 연애 기간 내내 질질 끌려다니기만 했던 내가 이겨 먹는 게 좀 생기는 것 같아 바닥을 찍었던 기분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쌤통이다. 이 시키야. 그동안 네가 날 숙맥이라고 놀려먹었던 거 생각하면 아주 뒷목 잡을 때까지 골려줘도 모자란단 말이에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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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