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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5화 (5/85)

5화

시훈이 유치원에 등원하게 되면서 나에게도 새로운 프로필이 생겼다.

이름: 박윤진

나이: 32세

직업: 제약회사 연구원(여기까지는 사실)

결혼 여부: 이혼

자녀 관계: 아들 1명(박시훈 7세)

애인 유무: 애인 있음. 혹시 누가 찝적거리거나 이름이라도 물어보면 정강이를 걷어차 주길.

하하하. 결혼도 못 해 봤는데 바로 이혼남이라. 기분 아주 째지고 좋네.

“시훈아. 결혼식장 근처도 못 가 본 남친 이혼남 만드니 좋니?”

“어차피 설정인데 왜 과민반응하는 거지?”

“설정이라도 기분 나쁘거든? 왜 아예 사별이라고 하지?”

“아, 그건 안 되지. 내가 기분 드럽잖아.”

“뭐? 그럼 이혼한 전 남편 이름 물어보면 권시훈이요. 라고 대답하면 되니?”

“미쳤어? 난 자기의 영원한 남편이고! 누가 전남편 이름 물어보면 불알을 걷어차 버려! 어디 감히 내 거에 눈독 들여.”

전남편 이름 물어보는 게 어떻게 눈독 들이는 거라고 해석되는 건지 모르겠는데 꼬투리 잡으면 또 으르렁댈까 봐 참았다.

“박윤진. 넌 내 거야. 나 유치원 간 동안 한 눈만 팔아봐!”

“……회사 가야 하거든.”

“아무튼, 자나 깨나 남자 조심! 여자 조심!”

……망할 놈.

집착남의 정석이라 할 수 있는 권시훈 씨는 일과라고 해 봤자 집-회사밖에 없는 나를 못미더워 하고 있었다.

“이럴 거면 그냥 내가 집에 있을까? 아니, 아예 유치원에 따라가 줘?”

“싫어!”

“아니, 그럼 뭘 어쩌라는 건데?”

“그냥 다 싫어!”

“미쳐 버리겠네.”

말도 안 되는 생떼의 이유는 간단했다. 유치원에 가면 마음 놓고 내게 연락할 수 없으니까. 자기가 시시때때로 감시하지 못해 저리도 날을 세우고 경계하는 것이다.

“너 이거 걱정이 아니라 집착이야. 그리고 그림 상, 내가 너를 걱정해야 하는 게 더 맞지 않겠니? 무슨 애기가 어른을 걱정해.”

“뭔 소리야! 내가 왜 애기야! 나! 자기 남편이야!”

“……그래. 속 썩이는 꼬마 신랑이다.”

“꼬오마시인랑??”

“아오!! 말꼬리 잡고 늘어지지 좀 마!”

괘씸하고 괘씸해서 맘 같아서는 유치원도 너 혼자 다니라고 하고 싶은데 7살짜리가 혼자 동네를 왔다 갔다 하면 분명 아동학대로 신고당할 거라 못 하겠다.

그렇게 유치원 등원의 첫날이 밝았다.

귀찮으니 등원 버스 타고 가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죽어도 같이 가고야 말겠다고 우겨대서 반나절 간의 실랑이 끝에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출근길에 시훈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고-이것도 웃긴다. 뭘 데려다줘. 길도 다 알고 제 몸 지키는 건 얼마나 유난인 놈인데. 얘가 나를 연구소까지 데려다줘야 하는 거 아냐?- 퇴근 후에는 학원으로 데리러 가는 일과를 시행하게 되었다.

왜 학원이냐고?

유치원이 3시에 하원이라 어떻게 해도 퇴근 시간을 맞출 수가 없어 난감하던 차였다. 물론 시훈이 혼자 집에 돌아오면 그만이었지만, 역시나 동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그때, 기회를 엿보던 시훈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럼 나 학원 갈래!”

“……뭔 원? 시훈아.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니?”

“학원! 하! 건! 자기 학원이 뭔지 몰라? 학교 밖에서 지식을 쌓는 곳!”

“아! 알아! 아는데 그 몸을 하고 무슨 학원을 다닌다는 거야!”

학원이라기에 나는 당연히 ‘어른’들이 다니는 토익학원이나 취미학원이라고 생각했다.

관종미 낭낭하신 내 남친님께서 서른 살의 정신머리로 <고급> 사립 유치원에 가는 거로도 모자라 ‘토익학원에서 유창한 영어를 선보이는 7세 남자아이!’ 따위의 타이틀에 욕심내는 건가 싶었다고.

그런데 권시훈은 또다시 나의 예상을 뛰어넘어 버렸다.

“나 미술학원 다니고 싶어!”

“미술? 너 석고소묘 이런 데 관심 있었어?”

“아! 아니! 그런 거 말고! 크레파스로 햇님 달님 그리고 물감으로 막 이렇게 칠하는 거! 그런 거 하고 싶다고!”

“……그런 건 애기들이 하는 거 아니야?”

“나 애기잖아!”

하하하하하…… 진짜 돌아버리겠다.

나 얼마 살지도 않았는데, 아직 앞날이 창창한데 벌써 세상 다 산 것 같이 피곤해.

“진짜 돌아버리겠네. 지 편한 대로 애기였다가, 어른이었다가… 속 편하게 살아서 좋겠다. 아주. 어?”

“우우웅- 자기야. 내 소원이라니까?”

“……소원이 대체 얼마나 많은 거니.”

열 내는 것도 지쳐서 그냥 다 포기하고 무슨 학원에 가고 싶냐 하니까, 검도랑 피아노, 미술이라고 대답하더라.

“아까 전엔 미술이라며.”

“미술‘만’이라고 한 적 없는데?”

그냥 헛웃음만 나왔다.

<개 쩌는 시훈 어린이의 하루>

7:00 기상

8:30 등원

15:00 하원(유치원 버스로 이동)

15:20~16:20 검도(학원이 같은 건물에 있으니 도보 이동)

16:40~17:40 피아노

18:00~19:00 미술

19:10 하원(윤진이와 함께)

19:25 귀가 후 휴식 >ㅁ<

본인이 예쁘게 포토샵으로 편집까지 해서 냉장고에 붙여 달라고 당당히 내미는 일과표가 그야말로 개 쩌는 고퀄리티라 입을 꾹 다물었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집에서 편집이나 하지. 뭔 유치원을 다니겠다고 해가지고 이 고생을 시켜.

“빨리! 붙여줘!”

“…….”

그렇게 우리 집 냉장고 문에는 공과금 고지서와 나란히 권시훈 어린이의 하루 일과표가 자리하게 되었다.

* * *

절대 말도 안 될 것 던 이 짓을 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당연하겠지만 시훈은 본인의 생활에 아주 적응을 잘했다. 처음에는 아가들이라고 무시하던 유치원 친구들(?)도 함께 지내다 보니 그냥 귀엽고 웃기단다.

어느 날은 자기 반에서 자기가 제일 크다고 자랑도 했다. 그뿐이랴. 자유 놀이시간에 친구들과 함께 놀-시훈이 놀아주는 쪽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때 얼음 땡 룰을 애들이 이해를 못 해서 짜증을 낸 적도 있었다.

‘아니! 얼음을 하면 멈추고! 땡을 하면 움직이라니까 그걸 못 알아듣는 거야! 말이 되냐고!’

‘시훈아. 그동안 수천 번 얼음 땡을 한 너랑, 태어나서 처음 얼음 땡을 한 애들이랑 같겠니? 네가 차분히 알려 주면 되는 거잖아.’

‘규칙이라고는 고작 그 두 개뿐인데 그걸 못 알아듣는다고?’

‘너는 뭐 처음부터 잘했어?’

‘어! 난 처음부터 얼음 땡도 잘했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개 잘했거든?’

어떻게 보면 수준이 유치원생과 딱 맞는 것 같다. 유치하고, 질투심하고, 말도 안 되는 억지나 부려대는 것이. 하지만 이 말을 했다가는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서는 하루 종일 징징댈 테니 역시나 속으로 삼키고 만다.

“시훈이 아빠에게 잘 다녀오겠습니다. 인사!”

샛노란 티셔츠에 남색 반바지, 무릎까지 올라오는 니삭스에 뽀짝뽀짝한 남색 스니커즈를 신고, 총천연색이 난무하는 유치원 가방을 등에 멘 권시훈 어린이가 나에게 힘차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동그란 머리통이 아래위로 움직이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개인적으로 난 시훈이가 유치원 등원 전 나에게 기합 빡 넣고 구십도 인사하는 모습이 제일 좋았다. 아마, 하루 중 가장 깔끔한 모습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어, 허허 그래. 시훈이 잘하고. 이따 보자.”

“헤헤. 네에.”

아…… 진짜 난 쓰레기인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자책했다.

오늘따라 내가 늑장을 부려 호다닥 나오는 바람에 발그레 상기 된 오동통한 두 볼.

……이러면 안 되지만 그 볼따구가 너무 귀여워서 깨물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안 돼. 윤진아. 너 기어코 돌아버렸구나. 쟤는 네 남친이야! 네 자식이나 조카가 아니라고! 몸만 애기지 머릿속은 시커먼 어른이라고!

“아버님. 출근 잘하시고요. 이따 뵙겠습니다.”

“……네, 네에. 아무쪼록 우리 시훈이 잘 부탁드립니다.”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네…….”

사회적 체면을 지키기 위해 후다닥 선생님께 묵례하고 시훈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돌아섰다. 선생님의 인사가 아니었다면 넋 놓고 시훈의 뽀짝한 모습을 넋 놓고 쳐다보다 침이라도 떨어뜨렸을 것이다. 그때 난데없이 시훈이 나를 불렀다.

“아빠!”

“……?”

채 걸음을 멈추기도 전에 시훈이가 오도도 달려와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보드라운 팔이 허리를 감싸자 순간 당황한 나는 어벙한 얼굴을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시, 시훈아?”

“헤헤. 아빠 사랑해여~”

시선을 내려서 보니 나를 꼭 끌어안은 시훈이 그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훈의 까만 눈동자에 나의 얼뜬 얼굴이 그대로 반사되어 보인다. 우는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닌 것이. 아주 가관이다. 하하하…… 나 이것 참.

“으, 으응. 아빠도 사, 사랑해?”

“헤헤. 아빠. 안아줘.”

내 대답에 시훈은 그야말로 햇살같이 미소 짓더니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려왔다. 나는 허리를 숙여 작은 몸통을 살짝 감싸 안았다. 혹여 꽉 껴안으면 부서질까 무서워, 애매하게 팔을 걸치고 있으니 가는 팔이 내 목을 끌어안았다. 아이 특유의 달달한 체향이 훅 끼쳐왔다.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시훈의 작은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아, 얘가 내 애인은 맞긴 한 거겠지? 혹시 내가 어디선가 실수로 낳아온 숨겨 둔 아들이거나 이런 건 아니겠지.

“시훈아~ 이제 들어갈 시간이에요. 이리와.”

선생님의 부름에 한참을 내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던 시훈은 몸을 떼어 잠시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어, 어. 시훈아. 얼른 들어가. 선생님 기다리시겠다.”

“자기야.”

“어어? 왜? 이러지 말고 빠, 빨리 가.”

“박윤진.”

“아, 왜에…….”

아, 그냥 부르는 것뿐인데 왜 떨리는 거지. 괜히 민망해져서 애써 시훈의 눈을 피하며 우물우물 말하자, 시훈은 내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아주 작고 낮게 속삭였다.

“내가 많이 사랑해.”

!!!

내가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자 시훈이 내게서 몸을 완전히 떼어내고 씨익 웃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선생님에게로 뛰어가 버렸다.

“…….”

……차라리 내가 그 망할 맥주인지 독약인지를 마시고 애가 되었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 같다. 아이의 얼굴을 하고 어른의 말을 하는 권시훈은 아무리 겪어도 적응이 안 된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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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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