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시훈은 유치원생답지 않게 휴대폰이 있다. 당연했다. 어른 시절(?)에 쓰던 휴대폰이었으니까. 유치원에도 항상 가져갔는데 보통 그걸로 몰래 업무를 보는 듯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교실 구석에서 가열 차게 휴대폰 화면을 두드리는 시훈을 발견하곤 너는 대체 이걸 왜 가지고 다니냐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혹시나 본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빠에게 연락하려 했다고 했단다.
그리고 그날의 키즈노트에는,
아버님 ^^ 시훈이가 휴대폰을 아주 잘 다루네요! 정말 야무지고 똑똑한 아이인 것 같아요. 하지만 원에서의 사용은 자제할 수 있도록 지도 부탁드립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졸지에 아들놈에게 휴대폰 쥐여주고 방치한 부모가 되어버린 나는, 시훈을 앞에 앉혀 두고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았다. 그러자 시훈은 입을 삐죽거리면서 눈을 홉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뭐! 네가 째려보면 뭐 어쩔 건데!”
“자기가 우리 엄마야? 왜 자꾸 잔소리해!”
“어어? 이것 봐라? 쪼끄만 게 어디서 말대꾸야?”
“누가 쪼끄만데!”
“너요. 너!”
“진짜…… 와. 박윤진. 너무하네.”
“잔소리 듣기 싫으면 알아서 잘해. 제발 튀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그럼 들어오는 일을 무시하라고? 나 없으면 일이 안 된다는데 뭐 어쩌라는 거야!”
일 때문이라는데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라고 권장하기에는 어른의 의무가 아닌 것 같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 몰라 몰라. 너 알아서 해. 네 입으로 너 애기 아니랬으니까 눈치껏 안 걸리게 잘 해 봐.”
“……무책임하네. 자기. 이렇게 귀여운 시훈이를 방치하려고 하다니.”
“너 진짜 욕 나오게 할래!”
차마 저 동글이에게 상스러운 욕설을 날릴 수는 없어 이성이라는 이성을 다 끄집어내서 화를 참고 있는데 하는 말마다 복장을 뒤집는다.
“자기야. 욕은 나쁜 거야. 듣는 사람에게는 상처고 말하는 사람 입도 더러워지고. 그건 알고 있지?”
“……네가 입만 다물어 준다면 욕할 일도 없을 것 같은데.”
“에이. 그건 안 되지. 난 자기의 기쁨조잖아. 옆에서 계속 떠들어서 자기 기분 좋아지게 해 줘야지.”
그냥 얌전히만 있어 준다면 지금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하아. 나 진짜 어디 상담이라도 받아야 할까. 육아 전문가 이런 분 찾아가서 한바탕 쏟아 내고 나면 속이 좀 풀리려나. 정말이지 울고 싶다.
이 망할 휴대폰 때문에 곤란한 게 몇 가지 더 있는데, 그중 하나가 권시훈이 보내는 톡이다. 키즈노트 사건 이후 내가 하도 뭐라고 해서 유치원에 있을 때는 연락이 뜸한데-그전까지는 20분에 한 번씩은 톡이 왔다. 이쯤 되면 몰폰에 일가견이 있는 듯하다- 학원에만 가면 대체 뭘 배우러 간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메시지를 날려대었다.
내 강아지
윤진아
윤진아
자기야
공주야
찐아
찌니야아
아니, 이게 뭐냐고. 지금 이게 일곱 살이 아빠한테 보내는 톡 맞냐고. ‘윤진아’라고 이름 부르는 것도 어이없는데 자기니 공주니…… 텍스트로만 봐도 민망한 호칭들을 줄줄이 보내는 건 뭔데.
왜
내 강아지
왜이제봐
자기나무시해?
ㅇ_ㅠ
무시한 게 아니라;;;
실험실에 있었어.
진짜야.
내 강아지
훔ㅇ_ㅠ
아
미안. 진짜로.
내 강아지
알았어
장난이야
알지?
……
그런데 왜
내 강아지
오늘 미술학원 올 때 스케치북 가져 와야 할 것 같은데.
가방 안에 넣은 줄 알았는데 없네.
뭐?
학원에는 없어?
내 강아지
학원에도 여분이 없어
아무래도 자기가 챙겨와야 할 듯.
아래층 문구점 가서 사면 안 돼?
나 오늘 시간 없을 것 같은데.
내 강아지
아. 그러려고 했는데
지갑이 없어서ㅠㅠ
어른 때 들고 다니던 지갑은 아저씨 같다며 유치원 친구들이 들고 다니는 동그란 동전 지갑을 사달라고 그렇게 떼를 쓰더니만 결국 그것마저 집에 놓고 다니는구나.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어떻게 좀 버텨봐……
내 강아지
많이늦어? ㅠㅠ
최대한 맞춰 가긴 할 텐데…… 늦을 수도 있어.
선생님께 나 늦을 것 같다고 말씀드려 주라.
내 강아지
……
자기 이제 내가 안 보고 싶구나?
힝……
아, 왜 또 이래;;
진짜 오늘 바빠서 그래. 봐줘라 좀.
내 강아지
훔… ㅎㅅㅎ
ㅡㅡ
아, 너 오늘 그냥 혼자 집에 가라.
내 강아지
ㅎㅎ 알았어. 그 정도야 당연히 기다려 줘야지.
기다릴게. 자기야.
참…….
이렇게 톡으로 시훈과 대화하고 있으면, 어른 권시훈이 돌아온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이 특유의 어눌한 발음이 텍스트에서는 느껴지지 않으니 그런 건지, 귀여운 얼굴을 볼 수 없어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내 강아지
사랑해.
랜선 연애도 아니고 평소에 버릇처럼 말미에 붙이던 사랑해라는 세 글자에 심쿵했다가, 일곱 살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꼬물꼬물 저걸 보내고 있다고 자각하면 한숨이 나오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누구야? 어? 애인?”
심란해져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데 등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툭 튀어 나왔다.
“아. 심 박사님. 놀랐잖아요.”
“박박이야말로 뭐 이런 거 가지고 놀라. 아까부터 뒤에 서 있었는데.”
휴대폰 들여다본다고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나 보다. 괜스레 민망해져 하하 웃어 보이니 뱅뱅이 안경 너머의 새우 눈이 슬쩍 휘어졌다.
“보고서도 쓰다 말고 뛰쳐나가서 하도 안 들어오기에 사직서 들고 원장실 간 줄 알았어. 거지 같아서 때려치우겠다고.”
“그럴 리가요…… 여기 관두면 갈 데도 없는데.”
“자기 같은 천재가 갈 데가 없다고? 여기 나서자마자 스카우터들이 줄줄이 서서 모셔 가려 할 텐데?”
“아니에요. 그냥 남들 하는 만큼 하는 건데.”
“와, 박박. 다른 연구원들 다 백수 만드는 소리 하네? 열등감 생기려고 해?”
“사실인걸요.”
“하기야. 박박 성격에 여기만 한 데가 없기는 하지.”
잔업무가 유독 많아 짜증 나는 건 맞았지만 이곳만큼 개인 공간 보장되고 연구원 수가 적은 곳은 찾기 힘들다. 그래서 거지 같고 힘들더라도 관둘 수 없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사람이 어렵다. 특히 많은 사람 사이에 섞여 있으면 뚝딱이가 되어버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나이 들면 좋아진다더니 어째 가면 갈수록 심해지기만 한다. 더군다나 직업까지 이러니 이제는 시훈이 없으면 혼자 번화가도 나가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시훈은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니 자책할 필요 없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스트레스였다. 어디에서나 주목받는 것을 즐기는 사교적인 성격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나의 외출 길에 매번 시훈을 동행해야만 하는 민폐는 끼치고 싶지 않았다.
“뭐든 쉬운 게 없네요.”
뭔가 기운 빠지는 것 같아 한숨과 함께 대답하니 심 박사는 굳은 어깨를 통통 두드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뭐. 에휴. 그래도 이번 중간보고회 끝나면 이동 시즌이니까 좀 더 버텨봐야지. 그 전에 갈 수 있으면 더 좋고.”
아, 맞네. 곧 해외 지사 이동 시즌이구나.
“박사님은 이번에 이동하시게요?”
“한국에 박혀 있는 것보다야 한 번쯤 나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문제는 미국에서 끌어 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쪽 지사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랑 연락이 안 되니까 물밑 작업하기가 애매해.”
“아아. 저는 공고 나온 다음에 신청받는 건 줄 알았는데.”
“그건 사전에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행정처리 때문에 형식상 하는 일이고. 미리미리 누울 곳 정도는 봐 줘야 편하지.”
“……그렇군요.”
자발적 아싸인 내가 저 태평양 건너 아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지. 심 박사도 내 성격을 익히 하는지라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박도 생각 있으면 한번 알아나 보지.”
“전…… 생각 없어요. 외국 생활하는 거 자신도 없고.”
“시훈 씨가 결혼하자고 안 해? 둘이 결혼하려면 한국은 안 될 거 아냐.”
심 박사뿐 아니라 연구소 사람들 모두 나와 시훈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지간한 배우보다 유명한 영화감독 ‘어른’ 권시훈 씨가 매일 같이 나를 이 외진 연구소까지 실어 나르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와! 박사님! 저 사람 권시훈 감독 아냐? 어지간한 배우들 뺨따귀 갈긴다더니 진짜 잘생겼네.’
‘어머 어머! 진짜네? 그런데 둘이 어떻게 같이 차를 타고 와?’
‘그러니까? 형제? 친척? 그렇지 않고서야 매일 같이 이 먼 곳까지 출퇴근할 리 없잖아. 안 그래? 뭐라 말 좀 해 봐. 박박.’
궁금한 건 못 참는 과학자들만 드글대는 곳이 바로 이 연구소였다.
‘아, 그게요. 저…….’
거짓말하기는 싫었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니 뒷일이 걱정되어 머뭇대고 있는데, 애저녁에 간 줄 알았던 시훈이 불쑥 내 뒤에서 튀어나오더니 냅다 TMI를 남발했다.
‘인사가 늦었네요. 제가 바로 박윤진 씨 애인입니다.’
‘허어억? 애, 애인이요?’
‘네. 같이 살고 있는데 제가 요새 휴식 중이라 한가하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해서 드라이브 삼아 따라 왔습니다.’
‘네……?’
‘앞으로 자주 뵐 테니 얼굴도장 찍어두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윤진이 잘 부탁드립니다. 일 너무 많이 시키지 마시고요.’
너무도 아무렇지 않은 커밍아웃-아니, 내 경우엔 아웃팅 아냐?-에 연구원들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떡 벌렸더랬다.
다행히 후폭풍은 크지 않았다. 앞뒤 꽉 막힌 줄 알았던 동료들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다들 우리 사이를 자연스럽게 인정했다-아마 시훈의 잘생긴 얼굴이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주변에서 편하게 대해 주니 처음에는 뻘쭘하게 눈치만 보던 내가 도리어 예민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그냥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나는 남자친구가 있는 남자.’라는 것을 숨기지 않게 되었다.
그게 무려 5년 전 일이다.
“결혼은 모르겠어요. 당장 하겠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시훈이도 지금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사정? 돈이 없어 못 하겠어요는 아닐 테고. 부모님이 반대하시나?”
“그건 아닌데…….”
말끝을 흐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아무리 거짓말을 못 해 위험을 무릅쓰고 솔직하게 말하는 성격이라 하더라도, 미래의 내 남편이 유치원생이 되어버려서 장가를 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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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