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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7화 (7/85)

7화

박윤진이 이 땅에 태어나서 학부모 상담을 가게 되는 날이 오다니. 감격에 겨워 눈물이라도 흘려야 할까. 아니면 어이가 없어 웃어야 할까. 둘 중에 뭐가 되었건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다.

“뭐 하는 짓이야. 이게.”

불만스럽게 툴툴대면서도 시훈의 교실 문 앞에 선 채로 몇 번이고 옷매무새를 고쳤다. 꼴에 부모 코스프레한 지 좀 되었다고 오늘 선생님한테 잘 보이면 앞으로 시훈의 유치원 생활이 더 편해지겠지 싶어 평소에 불편해서 쳐다보지도 않던 셔츠에 슬랙스를 꺼내 다림질까지 했다. 시훈은 어디 선보러 가냐며 노발대발했지만 그렇다고 평소처럼 후줄근한 티셔츠 쪼가리나 걸치고 갈 수는 없잖아.

나는 손에든 파일을 고쳐 잡았다. 흠집 하나 없는 투명파일에는 자필로 정성스럽게 작성한 <1학기 원아 상담일지>가 끼워져 있었다. 혹시 구겨질까 봐 얼마나 조심했는지 아직도 어깨가 아프다.

며칠 전이었다. 퇴근 후 집에 들어왔는데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훈이 종이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뭔가 싶어 종이를 내려다보니 18포인트 돋움체로 <1학기 원아 상담일지>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다.

‘이게 뭐니?’

‘상담일지. 자기 상담 오래.’

‘무슨 상담?’

‘권시훈의 원 생활에 대해?’

‘난 하겠다고 한 적이 없는데?’

‘웅. 상담 가능 날짜 알려달라고 안내문 나온 거 있었는데 그건 내가 알아서 보냈지.’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어차피 자기 내일 노는 거 내 뻔히 아는데. 굳이 물을 필요가 있나.’

쉬는 날에는 무조건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게 여기서 문제가 될 줄이야.

‘방문상담 말고 전화상담 이런 것도 있을 거 아냐.’

‘응. 있어.’

‘난 전화로 하고 싶은데?’

‘아! 왜!’

또 짜증이네. 역시 몸이 작아지면서 소갈머리도 작아진 게 틀림없어.

‘나 쉬는 날에는 집에만 있는 거 알잖아. 진짜 피곤하다고…….’

‘사람이 햇빛도 보고 그래야 뼈도 튼튼해지고, 정신도 맑아지는 거 몰라?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모르냐구!’

‘내 건강은 내가 알아서 할게…….’

‘싫어! 자기 유치원 와서 내 그림이랑 만들기 봐야 한다고! 얼마나 개 쩌는지 알아?’

‘…….’

‘아무튼 안 돼! 꼭 와! 알았지?’

‘…….’

‘어? 응? 윤진아. 자기야아아아!’

‘아유! 알았어! 그만 좀 해!’

이러다 청각 손상되는 거 아니야? 쪼끄만 게 어찌나 목청이 큰지, 어른일 때도 이따금 애교랍시고 징징거리기야 했었지만, 아이가 되더니 아주 땍땍거리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귀를 틀어막고 노려보니까 또 입술을 삐죽대면서 친히 내 손에 펜을 쥐여주었다.

‘자, 빨리해!’

‘아, 이게 뭔데! 어떻게 하는 건지는 알아야 할 것 아냐!’

‘한글 못 읽어? 보이는 대로 적으면 되겠네!’

‘하, 시훈아. 나 오늘 회식하고 온 건 알지?’

‘알지.’

‘그럼 술 마시고 온 것도 알고 있겠네?’

‘그거랑 이거랑 뭔 상관인데!’

‘내가 수틀려서 헛소리라도 적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그럴 리가 없어. 자기는 날 사랑하잖아. 그리고 엉터리로 적어봤자 결과적으론 자기 손해지 내 손해는 아냐.’

그럴 거면 글솜씨 좋은 본인이 적으면 될 걸 굳이 굳이 나를 시키는 이유가 뭔지.

‘그러니까 얼른 해! 낼까지 가져가야 한다구!’

‘어휴…… ’

고개를 숙이니 배 속에 들어찬 소주가 역류할 것 같았지만 동글이가 눈을 땡그랗게 뜨고 땍땍거리는 게 또 귀여워 못 이기는 척 펜을 들었다.

<1학기 원아 상담일지>

1. 생활습관 (식습관, 수면, 배변, 정리정돈 등)

<식습관>

주는 대로 잘 먹는 편이지만 단 음식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간식보다는 끼니를 잘 챙깁니다.

<수면>

평소에는 규칙적인 편이지만 휴일에는 깨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이것저것 하는 모양입니다.

<배변>

알아서 잘합니다.

<정리정돈>

필요 이상으로 깔끔합니다. 사용한 물건은 반드시 제자리에 두고, 집에 있는 날은 청소도 하루에 두 번씩 합니다. 분리수거도 어찌나 철저한지 페트병을 물에 씻고 다 마르고 난 뒤에나 버립니다.

2. 대인관계 (어른, 형제, 또래)

어른에게 예의 바르고 또래들과도 원만한 교우 관계를 유지하는 듯합니다. 단, 관심받는 것을 심각하게 좋아해서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반응하지 마시고 무시하시면 됩니다.

3. 발달 정도 (언어, 신체 등)

<언어>

보이스피싱범을 역으로 속여서 울린 적이 있을 정도로 말을 잘합니다. 글 쓰는 것도 매우 잘하고 좋아합니다. 시간 날 때마다 소설 같은 것도 쓰는 것 같습니다.

<신체>

운동은 안 해 본 게 없을 정도로 고루 잘하고 좋아합니다.

최근에는 격투기에 빠져 있습니다.

4. 행동특성 (좋아하는 놀이, 교구 활동 등)

게임, 책 읽기, 글쓰기, 누워서 빈둥대기도 하고, 심심할 틈이 없습니다. 그 와중에 쉴 틈 없이 말을 거는 게 좀 부담스럽습니다.

5. 학습

원에서 받은 숙제를 제외하고는 따로 학습하는 건 없습니다.

6. 상담하기 원하는 내용

힘드실 텐데 잘 부탁드립니다.

적고 보니 어째 이게 애인지 아저씨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거짓말을 꾸며 쓸 수 있을 정도로 상상력이 풍부한 편도 아니고, 망한 글을 커버할 작문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라 사실대로 쓰고 적당히 모른 척 둘러대기로 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하하하 있다 보면 바보인가보다 하고 넘겨주겠지…….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문고리를 잡았다. 이게 뭐라고 면접 보는 것보다 더 떨리는 거니.

“긴장하지 말자. 박윤진아.”

솔직히 여기서 긴장하는 게 더 웃긴 거 아닌가. 유치원생 남친 칭찬이나 좀 하고 오면 되는 건데 이놈의 성격 때문에 쉽게 되는 일이 없어.

정신 차렷! 박윤진! 넌 할 수 있다!

드르륵.

“아, 안녕하세요…….”

문을 열고 쭈뼛대며 안으로 들어서니, 말갛고 뽀얀 얼굴의, 기껏해야 2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선생님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이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시훈이 아버님 맞으시죠? 시훈이 담임 장보미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장보미 선생님.”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일하시느라 바쁘실 텐데 원까지 찾아와주시고 감사합니다.”

“당연히 한번 와 봐야죠. 저희 시훈이가…… 다니는 덴데.”

“감사합니다. 아, 여기 앉으세요.”

선생님은 나를 마치 회사 임원 대하듯 깍듯이 대했다. 일부러 의자를 빼주며 앉으라고 하는데 너무도 융숭한 대접에 몸 둘 바를 몰라 우물쭈물 걸음을 옮겨 내 엉덩이 반쪽만 한 의자에 억지로 걸터앉았다.

“더우세요? 마실 것 드릴까요?”

“아, 아닙니다. 방금 물 마시고 왔어요.”

“아이고. 그러시구나.”

선생님께서는 무언가 아쉬운 듯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왜 아쉬운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억지로 웃으며 교실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아이들이 지내는 곳이라 그런지 모든 게 다 작다. 기껏해야 내 정강이 정도에나 올법한 높이의 책상과 의자, 손바닥만 한 수첩, 아기자기한 집기들을 보고 있으니 꼭 소인국에 온 것 같았다.

와, 그러고 보니 시훈이도 여기에 앉아서 애기들과 올망졸망 모여서 공부도 하고 만들기도 하겠구나. 그 하얗고 오동통한 고사리 같은 손으로 글씨를 쓰고, 클레이로 토끼 따위 만들겠지. 집중한다고 빨간 입술을 쭉 내밀고…….

아, 미친. 너무 귀엽잖아.

아이를 좋아하긴 하지만, 떠올리면서 흐뭇하게 미소 지은 적은 단연코 없었는데 이것도 중증이라면 중증일 테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리려 손으로 턱을 쓰는 척했다. 다행히 선생님은 시훈의 상담일지를 들여다보느라 내 입꼬리에는 관심 없어 보였다.

그런데 선생님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불안하게 왜 저러시지? 내가 뭐 잘못한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 뭐 실수한 게 있나? 아니면 뭔가 마음에 안 드나?

“…….”

침묵이 길어졌다. 꼭 엄청나게 나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 이젠 먼저 말을 꺼내기도 모호해져 엄지손가락 끝 삐져나온 살을 뜯으며 선생님이 먼저 말을 꺼내주길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손가락에 피가 나기 바로 직전, 선생님이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저, 시훈이 아버님.”

“네, 네??”

너무 놀란 나머지 꼭 나쁜 짓 하다 들킨 사람처럼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내 목소리에 더 놀라 버린 선생님은 나보다 더 사색이 되었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가정에서 시훈이 취침시간이 많이 늦나요?”

“……네?”

“상담일지 보니까 어, 음……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무언가를 한다고 해서요. 얼마나 늦게 자는 건가 싶어서…….”

“아아. 그게요…….”

망했네. 술김에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아무렇게나 휘갈겼던 게 ‘아이 수면시간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무심한 아버지’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지난날의 나를 후려치고 싶은 걸 겨우 참으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핑곗거리를 생각해내야만 한다. 이대로 가다간 이미지 파탄 나게 생겼어.

“시훈이가 요새 생각이 많은지 잠을 통 못 자더라고요…… 자라고 해도 싫다 하고.”

“아아. 그렇구나.”

거짓말이다. 나는 저녁 10시면 잠이 들고, 시훈이 밤새도록 편집한다고 서재에 틀어박혀 있느라 언제 자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버님. 조금 있으면 초등학교 가야 하는데 그때는 지금보다 등교 시간이 훨씬 빠르거든요. 올바른 생활습관 형성이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건 알고 계시죠? 힘드시겠지만 지도 부탁드릴게요.”

“초등…… 학교요?”

“네. 아버님. 시훈이 지금 7세니까 정말 얼마 안 남았어요. 학습적인 부분은 걱정할 필요 없다 해도 아무래도 수면시간이 모자라면 학교생활 자체에 스트레스받을 수 있으니까요.”

“초등학교…… 네에.”

거듭 말하지만 나는 자식은커녕 주변에서 아이를 만나 볼 수 없었던 환경이었다. 선생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유치원을 졸업하면 초등학교가 있고, 그 뒤에는 중학교, 고등학교가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젠장. 왜 이걸 간과하고 있었을까.

권시훈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내 남자친구의 제2의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내야 할지도 몰랐다.

그것도 다름 아닌 부모의 자리에서.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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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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