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그때, 저편에서 똘망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살았다.
단박에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채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 지를 뻔했다.
“아빠, 아빠 거기서 뭐 해!”
시훈은 유치원 정문을 나서다 아줌마들 틈바구니에서 패닉 상태가 되어 있는 나를 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어른들은 시훈을 발견하고 홍해가 갈라지듯 쫘악 갈라졌다.
순간, 저 작은아이가 어찌나 크게 보이던지. 순간 눈물이 핑 돌고 코가 시큰거렸다.
“시훈아아.”
“왜 이렇게 빨리 왔어? 회사는?”
“오늘 시연회 있어서 일찍 끝났어….”
“아. 마따. 내가 듣고 깜빡했네. 미안.”
시훈은 사람 많은 곳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는 나를 알기에, 혹시 내가 잘못될까 봐 다급히 그 사이를 해쳐온 것이다.
하얗고 작은 손이 내 손을 꼭 쥐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괜히 눈시울이 시큰거려 시선을 내리니 까맣고 커다란 눈동자가 걱정을 가득 담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눈물이 도로록 떨어질 것 같아 다급히 눈가를 팔로 문지르며 울컥이는 감정을 추슬렀다.
“…괜차나?”
“응?”
“그냥 집으로 가지. 사람 많은 데 있는 거 힘들어하면서.”
“오늘은 같이 가고 싶어서….”
“걱정되잖아.”
다정한 손길이 뺨을 감싼다. 울렁이던 속이 조금은 안정되는 것 같아 낮게 한숨을 내쉬곤 시훈을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덕분에 괜찮아.”
내 미소를 본 시훈도 한결 마음이 놓인 듯 그제야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네가 시훈이니? 어머 반갑다. 얘!”
감동도 잠시, 등 뒤에서 처음 듣는 여자의 목소리가 시훈을 불러세웠다. 동그란 눈동자가 순간 날카롭게 위로 향하며 경계의 빛을 띠었다.
“…누구세요?”
“저번에 하원 할 때 봤었는데 기억 못 하나 보구나. 아줌마는 시훈이랑 같은 반 친구 지호 엄마야. 신지호 알지?”
“아… 안녕하세여~”
여자의 정체를 확인한 시훈은 여전히 좀 꺼림칙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일단 지호 어머니에게 예의 바르게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지호 어머니는 퍽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똘똘하게 생겼네. 네가 공부를 그렇게 잘한다면서?”
“그냥 머, 남들 하는 만큼 하는 거 같아요.”
“어쩜 생긴 것처럼 말도 예쁘게 하네.”
“…네, 네에. 감사합니다아.”
지호 어머님은 분명 시훈과 초면인 것 같은데 지나치리라 만치 친절했다. 시훈 역시 무언가 이상한 듯 머리 위에 물음표를 퐁 띄우고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의중을 추측할 필요도 없이 지호 어머님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시훈아. 지호 어때?”
“지호요? 지호 착하고 좋아요.”
“어머! 그러니? 지호가 시훈이 이야기 참 많이 하거든.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하던데?”
“…아, 네에.”
“그래서 말인데 혹시 지호랑 같이 학원 같이 다닐 생각 없니? 공부도 같이하고 그러면 서로 도움도 될 것 같은데.”
아이고. 어머님. 시훈이는 공부하려고 학원에 다니는 게 아니랍니다. 그저 본인의 사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요.
하지만 내 속의 외침을 알 리 없는 지호 어머님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 아이에게 뛰어난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어 말 그대로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그런데 지호 어머님. 지금 시훈이는 공부에 관련된 학원은 다니고 있지 않은데….”
조심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어 정정해 주었다. 그런데 지호 어머님은 도리어 펄쩍 뛰며 목소리를 높였다.
“엥?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데? 시훈 아빠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그럴 리가요. 시훈이는 집에서 공부하는 게 다예요. 그렇지 시훈아?”
“아니야. 기왕지사 공부할 거 친구들이랑 같이 학원 다니는 거 재미있지 않겠어요? 다른 친구들은 다 그렇게 하는데.”
“어어,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저분이 더 시훈을 꼬드겼다가는 <개 쩌는 시훈 어린이의 하루>에 종합학원이 들어갈 것 같아 다급히 말렸다. 지금 학원비만 해도 어마무시한데 더 이상 헛돈 쓰는 건 안 될 말이라고. 물론 우리가 돈이 부족해서 뭘 못하는 형편은 아니다마는 서른 살이 가나다라를 배우려 몇십만 원을 낸다는 게 도저히 용납이 안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권시훈은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우움. 전 학원에서까지 공부하고 싶진 않아요.”
역시.
대쪽 같은 대답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그러나 지호 어머님은 예상과는 다른 대답이었는지, 당황한 듯 눈을 굴리다 이내 다시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시훈이도 앞으로 초등학교도 가야 하잖니. 학교 가면 배울 게 많아서 힘들다던데 미리 알아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잘 모르겠는데….”
“너희가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요새는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해야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시훈이네 아빠도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하고 돈도 많-이 버는 박사님 된 거 아니겠니.”
“네에.”
“시훈이랑 지호랑 같이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 가고 돈 많-이 버는 사람 되면 아빠가 엄청 기뻐하실 것 같은데?”
지호 어머님의 말은 설득력이 없었다. 나는 가방끈에 비해 실속 없는 수입이었고, 오히려 돈이 차고 넘치는 쪽은 지금 어른들 사이에 껴서 오잉또잉하고 있는 영화감독 권시훈 어린이였다.
“근데, 이모.”
“으응?”
“저희가 하는 공부가 같이해서 도움이 되는 공부예요?”
“응? 무슨 말이니?”
“움… 제 생각에는 공부는 스스로 하는 거지 누구랑 같이 한다고 더 잘하고 못하고 그런 문제는 아닌 거 같아서요. 다니는 건 어렵지 않지만, 친해지고 싶다는 이유로 학원에 돈 쓰는 건 좀….”
여태 건성으로 대답만 하던 시훈은 우물우물 어눌한 발음으로 지호 엄마에게 천천히 제 생각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아마 지호 엄마의 지나친 친한 척과 속이 빤히 보이는 태도가 심기에 거슬린 것이리라. 그나저나 발음이 애기 같기에 망정이지, 유치원생치곤 꽤나 조리 있는 자기주장 아닌가. 누가 눈치라도 채면 어쩌려고 저런데.
나는 혼자 속으로 쫄아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지호 어머님은 다행히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저 입을 떡 벌리고 시훈을 바라볼 뿐.
“어휴, 시, 시훈아. 너 정말 생각이 깊구나. 그래도 공부는 중요하니까 다시 한번 생각을….”
“이모. 저 공부 싫어하는데요.”
“어, 어?”
“학원에서 공부하기 싫어요. 그냥 지호도 유치원에서 재미있게 놀면 안 대요? 지호 제가 놀자고 해두 친구들이랑 가치 안 놀아요. 공부만 해요. 1등 못하면 아빠 엄마한테 혼난다구.”
옆구리를 때리는 카운터 펀치에 지호 어머님은 그야말로 한 방 제대로 먹었는지 시뻘게진 얼굴을 가릴 생각도 못 하고 입을 떡 벌렸다.
여태 모른 척 딴청을 부리던 학부모들 또한 하나같이 얼굴이 빨개지더니 입을 틀어막으며 웃음을 참았다. 짐작건대 지호 어머님은 공부로 지호를 어지간히 볶아대었고, 그 사실은 주변인들에게 퍽 유명한 일인가 보다.
“흠, 으음. 그래. 생각해 줘서 고맙, 고맙다. 시훈아?”
“아녜요오. 저더 지호랑 친해지고 싶은데 지호가 자꾸 안 된다고 해서 속상했거든요. 엄마가 친구도 가려서 사귀라고 했다구.”
“…….”
“근데 지호가 저랑 친구 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낼부터 같이 놀자고 할게요.”
“…그래? 그, 그래 주면 고맙겠구나.”
“그런데 그러면 공부는 많이 못 할지도 모르는데 괜차나요?”
“응? 어, 어, 어쩔 수 없지.”
“아, 알겠습니당. 낼부터 재밌게 놀게요! 감삼니다아.”
시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한껏 귀여운 말투를 장착하고 생글생글 웃으며 지호 어머님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어휴. 내 정신 좀 봐. 벌써 학원 갈 시간이 넘었네. 시훈 아빠, 나 먼저 갈게? 다음에 봐요?”
“어, 네. 들어가세요.”
완전히 시훈의 말솜씨에 말려들어 버린 지호 어머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나에게 다급히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그러게. 상대를 보며 덤벼야지. 건드려봤자 본전도 못 찾을 걸 왜 들쑤셔서는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을까.
“아빠. 나 배고파아. 오늘은 학원 안 가구 집에 가도 대지?”
“아, 그, 그래! 당연하지. 집에 가자. 시훈아.”
얼른 맞잡은 손을 고쳐 잡고 차로 향하려는데 시훈이 내 손을 잡아끈다. 돌아보니 시훈은 입을 삐죽거리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나 안아줘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대며 새침한 표정을 짓는 게 참으로 앙큼한고로. 시훈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웃음이 흘러나왔다.
“읏차.”
시훈의 엉덩이를 받쳐 들고 안아 올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른일 때는 아무리 용을 써도 한 뼘도 들기 힘들었는데, 아이가 되고 나니 얼굴을 마주 볼 정도로 번쩍 들 수 있었다.
시훈은 두 팔로 내 목을 감아오며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은은하게 베어오는 아기 냄새. 그대로 으스러져라 꽉 껴안아 버리고 싶다.
“아까 곤란했지. 내가 좀 빨리 나올걸.”
목덜미에 고개를 기댄 채 시훈은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아냐. 나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뭐.”
“거짓말.”
“아니라구우.”
“아니긴 뭐가 아냐. 나 보자마자 앙탈 부리더만.”
아, 내가 아까 아기 권시훈에게 앙탈 부렸었구나. 정신없어서 몰랐네.
“기 빨리지.”
“괜찮아.”
“자꾸 거짓말한다?”
그래. 기 빨리는 건 사실이네. 들을 필요도 없는 호구조사에 무례한 언사까지. 그닥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던 걸로.
조수석에 시훈을 태우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평소 같았다면 미주알고주알 유치원 일과가 들어와야 했는데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
왜인지 싸한 기분에 시동을 걸고 안전벨트를 매다 말고 조수석 쪽으로 흘긋 시선을 돌렸다.
시훈은 벨트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벨트 안 매고 뭐 해. 가자며?”
“…….”
“아, 왜 또 그래. 그렇게 보면 민망하다고.”
“하아.”
어린아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짧은 한숨이 시훈의 입술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그 한숨 소리에 내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아 눈을 거두지 못했다.
“어려져서 좋았는데 이럴 때는 짜증 나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갑자기 시훈의 몸이 기울어지더니 내 뺨에 따뜻한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위로해 줘야 하는데 위로도 못 해 주고. 꽉 안아주고 싶어도 그게 안 되니까.”
“…….”
“그냥 좀 아쉽네.”
다시 조수석에 털썩 몸을 묻은 시훈은 표정을 지우고 앞을 바라보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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