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쪽같은 내 남친-11화 (11/85)

11화

내가 얘를 어른으로 보고 있는지 아이로 보고 있는지 헷갈리는 시점이 왔다. 왜냐하면… 모습은 영락없는 아이인데, 하는 행동은 너무 어른 같아서 당황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아침에 일어나서 다 죽어가는 소리를 내며 스트레칭을 한다든지, 외출하고 돌아오면 ‘아이고 죽겠다!’라며 추임새를 넣는다든지, 무의식적으로 담배나 술에 손이 간다는 것 등….

그래. 시훈의 입장에서는 아이들 사이에서의 우위는 점했을지 몰라도, 어른의 삶을 잃어버렸으니 상당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할 테다.

그 기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저 곱디고운 작은 앵두 같은 입술로 ‘야! 이 나쁜 새끼들아!’ 따위의 욕설을 내뱉을 때면 꼭 아들내미 잘못 키운 것 같은 죄책감이 든다.

“오형석 씨가 샘플 치료제 보내 준다고 했는데 그냥 받는다?”

“어엉… 아랐어~”

본래 자기가 어른 시절에 쓰던 초고가의 게이밍 체어에 쿠션을 몇 개를 올려두고 컴퓨터 앞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편집점을 잡는 시훈을 보며, 얘를 영재 프로그램에 내보내면 유명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심각하게 고민도 해 봤다. 관종 권시훈이라면 방송 출연하자고 하면 쌍수 들고 환영할 것 같은데 문제는 아빠 역할을 해야 하는 내가 인간이라면 학을 떼는 심각한 아싸라는 것이다.

“난 아무래도 부작용이 걱정되는데….”

“걱정할 게 뭐 있는데?”

“치료제 하나 개발하는데 얼마나 오랜 기간이 걸리는지 네가 몰라서 그래. 이번에 받게 될 건 임상검증도 못 한, 말 그대로 야메 약이라고.”

“그런데?”

“내 생각인데 말이야. 아무래도 안정화될 때까지는 조금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게 어떨까?”

“어차피 내가 안 먹으면 달리 임상할 데도 없잖아. 나랑 같은 케이스 찾는 게 더 일일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

“누가 박사님 아니랄까 봐 까다롭기는. 아, 잠깐만. 핫 씨. 애매하게 짤렸네.”

중얼중얼 욕지거리를 뱉으며 모니터에 코를 처박는 시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른 책상에 매미처럼 붙어서 쪼끄만 손으로 뭘 그리 열심히 두들겨 대는지 키보드 치는 소리가 요란했다-아마 손가락이 짧으니 타자가 마음처럼 안 쳐져 성질이 나나 보다-.

시훈이 아이가 된 후 가장 적응이 안 되는 게 집에서 일하는 모습이다. 재택근무한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는지 어느 날, 나를 아바타처럼 부리며 여기에 뭐 놓아라, 뭘 설치해라 명령해대더니 ‘아이 권시훈’에게 최적화된 작업실을 구축하곤 그날부로 본업에 들어갔다.

본인은 진지하게 업무에 매진하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내 눈에는 그저 조카가 삼촌 컴퓨터에 몹쓸 게임이나 깔고 있는 모양새였다.

“…일 많아?”

뒤로 슬쩍 다가가 뭐 하나 보니, 역시나 0.001초 단위로 영상을 멈춰 보고 있었다. 왜 이걸 이렇게 나노 단위로 나눠서 보냐고 물어본 적 있었는데, 내가 연구소에서 현미경으로 세포 분리하는 거랑 비슷하다고 비유해 줘서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이유가 없어 보이는 개삽질로만 보인다는 말이다.

“왜? 일 안 하고 놀아줬으면 좋겠어? 우리 애기 심심해?”

“응?”

“어쩐 일루 서방님이 일하는 데 관심을 가질까아.”

“말은 똑바로 하자. 애기로 따지면 네가 애기 아니야? 오히려 내가 너랑 놀아줘야 그림이 맞는 것 같은데?”

“요즘 애기들은 바빠서 어른이랑 놀아 줄 시간이 없써요.”

“칫.”

“어? 왜 삐지고 그래.”

왜 삐졌냐고? 삐진 거 아니거든? 그냥 기분이 드러워서 그런 거거든?

보이지 않게 입술을 삐죽이며 시훈의 정수리를 노려보았다. 사실 좀 심심하긴 했다.

개 쩌는 유치원생 권시훈 군은 각종 학원과 유치원 축구 모임 등으로 주중 스케줄이 빠듯하신 터라 주말에 밀린 일을 몰아 했는데, 덕분에 권시훈과 나는 하루 종일 집에 같이 있어도 얼굴 볼 일이 별로 없었다. 독수공방하는 것도 짜증 나는데 이젠 저 조그만 녀석이 기어오르는 것까지 참아줘야 한다니. …그래도 역시 귀여우니까 내가 참아야지.

“아니이. 그건 아닌데, 그렇게 할 게 많나 해서….”

“안 하려 해도 자꾸 뭘 보내네. 집에 있는 거 아니까 안 할 수도 없고. 팀장 새키… 웃는 것도 이상하게 웃어서 기분 나빠. 개샛키….”

그래, 이상하긴 하더라 힉힉힉! 유리창 닦는 소리.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시훈은 피식 웃으며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

일단 웃고 넘어갔지만 또 심란해진다. 언제까지 이 꼴로 살아야 하는 거지. 안전성 따위 개나 준 약을 남친에게 먹여야 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복잡한데, 너무나 태연한 내 애인을 보고 있자니 아주 복장이 터질 것 같다. 차라리 이 모든 게 내 꿈이라든가 상상이 만들어 낸 망상이었으면 덜 괴로웠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완벽한 현실이라 나오는 건 한숨뿐이다.

“두 달 안에는 치료가 되어야 할 텐데.”

바래봤자 소용없는 가정을 해 본다. 내 목소리에 힘이 다 빠진 걸 알아차렸는지 시훈의 눈이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왜? 신경 쓰여?”

“어엉… 갑자기 몸이 크면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고. 그것도 일종의 노화나 마찬가지니까.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잖아.”

“흠….”

대답도 뭣도 아닌 애매한 소리를 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버린다.

이렇게 작은 권시훈을 뒤에서 내려다볼 일이 언제 또 있을까. 한 품에 들어오는 작은 어깨와 가늘고 하얀 팔이 마우스와 키보드 사이를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눈에 담으며, 좀 심각해지려고 하는 기분을 애써 눌렀다. 동글동글 뒤통수가 참 예쁘기도 하네. 거기에 톡 튀어나온 집중한 입술이 씹덕 포인트고.

“시훈아. 이러나저러나 난 너 잘못될까 봐 걱정이다.”

“뭘. 걱정까지야. 그런 거 하지 마.”

“너 같으면 걱정이 안 되겠니?”

“시간 낭비야. 벌어진 이를 어쩌게쒀. 앞으로가 중요하지.”

“그건 그렇지만….”

“난 할 수 있으면 고등학교도 다시 한번 가 보고 싶은데?”

“왜? 수능 다시 보려고?”

윤진아. 시훈이 수능 안 봤잖아.

“아니, 학교 재밌잖아. 축구도 하고. 땡땡이도 쳐보고.”

“…뭔 하고 싶은 게 다 노는 것밖에 없어.”

“그럼 인생 2회차에 공부를 하리? 학교 가면 놀아야지.”

“하이고….”

“있어 봐. 우리 윤지니 심심해하는 거 같으니, 이것만 하면은 놀아주…. 하, 미치이인! 으아아아아아악!!”

한창 실실 쪼개던 시훈은 갑자기 책상을 쾅 내려치더니 머리를 쥐어뜯고 발작을 시작했다.

아이고 저런. crtl+s를 안 눌렀구나. 그렇게 어른 놀려 먹더니 쌤통이다. 이 시키야.

* * *

유치원 5주 차.

시훈은 유치원뿐 아니라 이 동네 슈퍼스타가 되어 있었다. 입학과 동시에 전 과목 수석-유치원에서 이런 말 너무 웃긴다. 꼬맹이들 등수 매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에 빛나는 이 시대의 모범 어린이.

거기에 유치원생치고 길쭉하게 뻗은 피지컬과 떡잎부터 남다른, 빛이 나서 눈이 부신 외모가 동년배 여아들의 첫사랑 재질이라 시훈 주변에는 항상 아이들이 우글우글거렸다.

그뿐만이랴. 온 동네 여자아이들이 권시훈 눈에 한 번이라도 들어보겠다고 공주 드레스에 공주 머리띠, 귀걸이, 팔찌, 목걸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보기에도 불편해 보이는 신데렐라 구두를 신은 채 등원하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그런데 얘들아. 미안해서 어쩌니. 시훈이는 고추 달린 사람 좋아해.

역시나 본래 성격 어디 안 간다고 시훈은 유치원생 아가들에게도 철벽을 쳤다. 매일 같이 아이들이 가방이 터져나가도록 선물 공세를 해대었지만 특유의 ‘사무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안 했다. 괜히 말 붙였다가 여지 남기는 게 싫다나 어쨌다나. 웃긴 건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 망할 관종끼 때문에 정색하고 밀어내지도 않는다.

한번은 아이들이 너무 전전긍긍하면서 권시훈 뒤만 쫓아다니기에 내가 다 민망해져서 오며 가며 좀 친한 척이라도 해 주라고 했더니.

“아니, 내가 무슨 자원봉사자야? 난 애건 어른이건 다 싫다니까? 박윤진만 있으면 된다니까. 왜 자꾸 귀찮게 해.”

“야. 그 말이 아니라… 같은 유치원 다니는 친구들이니까 좀 아는 척해 주고, 여차했다 싶으면 멘트라도 한 번 날려주면 유치원 생활 얼마나 편하니.”

“이 이상 뭘 얼마나 더 하라는 거야?”

“니가 울리고 간 여자애들이 몇 명인 줄 아냐?? 그 집 엄마들이 매일 같이 전화 와서 나한테 하소연한다고. 시훈이가 우리 애랑 안 논다고 해서 대성통곡을 하고 난리가 났다고!”

“…나 모르게 통화를 했다고? 그 사람들이 자기 번호를 어떻게 아는데?”

왜 거기서 나랑 엄마들이랑 통화한 게 문제가 되는 거지…?

“어휴. 머리 아퍼. 말을 말자. 미저리야.”

“내가 왜 미저린데! 아니거등??”

“세상 사람들은 너 같이 말도 안 되는 걸로 집착하는 애를 미저리라고 한단다.”

“하. 망할. 어이가 없네?”

“욕 좀 하지 마! 제발!”

“언제부터 망할이 욕이었는데!!”

몸이 어려지니까 정신도 어려지는 걸까. 어째 날이 갈수록 유치해지는 것 같아, 지끈대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사실, 시훈보다 불편한 건 내 쪽이었다. 동네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았던 나는 어느새 학부모 커뮤니티의 핫이슈로 떠올랐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불필요한 관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뭐든지 잘하는 아이를 키우는 박사 싱글 대디’ 타이틀은 조용한 동네에 아주 맛있는 가십거리가 되었다. 시훈을 데리러 가던 날 담벼락에서 만난 엄마들은 내 연락처를 멋대로 공유해서 단톡방에 나를 초대했고, 수시로 개인 톡을 보내며 귀찮게 했다.

시훈 아빠. 시훈이 요새 무슨 공부해요?

시훈이는 선행학습 하나?

시훈 아빠는 밥은 먹고 다녀요? 애기랑 둘이 살면 반찬 같은 것도 없을 텐데 좀 가져다줄까요?

시훈 아빠. 주말에 뭐해? 우리 애들이랑 같이 놀이동산 갈까?

시훈 학습에 관한 내용이 7, 내 사생활에 대한 질문이 3 정도였는데, 권시훈은 집에서 공부 따위 하지 않기 때문에 학습적인 부분은 답할 수가 없었고, 이들이 내 사생활을 왜 알려 하는지도 의문이어서 그것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시훈이 알면 뒷목 잡고 게거품 물면서 그 새끼들 다 죽여 버린다고 난리 칠 게 뻔해서 그냥 입 다물고 있는 중인데 솔직히 좀 그렇다.

(다음 편에서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1)============================================================

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