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자기는 나 몰래 이 사람들이랑 연락하니까 좋았어?”
“야! 솔직히 몰래 한 건 아니다. 네가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어차피 알아봤자 별 소용도 없는 거 일일이 말할 필요는 없잖아.”
“뭐? 알아봤자 소용이 없어?”
“그럼 네가 어쩔 건데. 엄마들한테 가서 우리 아빠랑 연락하지 말라고 소리라도 지르게?”
“왜 못 해! 그렇게라도 해야지!”
“…미치겠네. 너는 괜찮겠지만 나는 자식 교육 잘못시킨 놈이라고 욕먹어.”
아무리 말해 봤자 듣지 않는다. 어차피 시훈의 머릿속에는 답이 정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도 이번만큼은 굽힐 생각이 없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어김없이 햇살반 단톡방에 공지사항이 올라왔고 자연스럽게 몇몇 어머님들이 나에게 개인 톡을 보내며 걱정을 가장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대충 무시하고 있었는데 마구마구 올라가는 대화창을 질투의 화신 권시훈이 봐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개인 톡 내용들이 죄 ‘시훈 아빠의 연애 여부’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못마땅한 건 알겠다. 그건 나도 동의하는 바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좋은 말로 둘러 거절하고 불편한 기색을 보여도 정말 모르는 건지,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질문 공세를 어떻게 일일이 받아치냐고. 이거야말로 인력 낭비 아니야?
“답해 주기 뭣하면 차라리 차단하고 아예 보질 마. 그러면 되겠네.”
“차단한 거 상대방도 알 수 있는 건 알지?”
“그게 뭐!”
“그게 뭐냐니! 영문도 모르고 차단당하면 그쪽이 얼마나 기분 더럽겠어.”
“내 기분이 더러운 건 생각 안 하고?”
“아, 진짜. 제발 시훈아. 나도 내 입장이라는 게 있잖아. 적당히 무시하면 될 걸 굳이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는 거 아냐?”
“아오! 띠바!”
제 화를 참지 못한 권시훈은 뒷머리를 거칠게 털어내며 욕설을 내질렀다. 물론 애기 목소리에 뽀짝한 말투라서 별 위협은 되지 않았다.
예상했던 반응인지라 놀랍지는 않았지만 앞으로가 문제이긴 했다. 아무리 위협이 되지 않더라도 불필요한 경계 대상이 생겼다는 사실은 집착 그 자체인 내 애인으로 하여금 엄청난 분노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을 터였다.
“어쨌거나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 넌 신경쓰지 마.”
“뭘 어떻게 할 건데.”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시훈은 삐죽삐죽 입술을 앞으로 잡아 빼며 부루퉁하게 말했다.
“최대한 모른 척해 보다가 정 안 되면 애인 있다고 하지 뭐.”
“그렇게 말할 각오가 되어 있었으면 진작 지르지 그랬어.”
“최후의 카드다. 연애한다고 하면 상대방 신상 캐려고 달려들게 뻔한데 그 사지를 들어가라고?”
시훈은 내심 그 사지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내 애인을 안줏거리 삼아 떠들어 대는 게 싫었다. 차라리 꼭꼭 숨겨서 아무도 보지 못하는 편이 나았다. 권시훈에 관련된 이야기를 다른 사람 입에서 듣고 싶지 않았다.
“시훈아. 난 네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어.”
“뭐?”
“넌 이미 유명한 사람이고 관심받는 걸 즐기니 이해 못 할 수도 있지만, 나 같이 속 좁은 놈은 내 사람, 내 걸 잘 모르는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아.”
“그게 애인 있다고 말하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아직도 모르겠어? 난 네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 더럽다고. 뺏긴 것 같아서.”
“…….”
“그러니까 그냥 내가 하는 대로 둬. 부탁할게.”
이상한 소유욕이라 해도 할 말 없었지만, 솔직한 내 마음이 그랬다. 권시훈은 적어도 최소한의 선을 지키며 사생활을 존중해 주었고 그 행동에는 거짓이 없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 이해하는 척해 놓고 뒤에서 홀로 속을 끓였다. 어쩌면 권시훈의 집착보다도 내 소유욕이 더 지독할지도 몰랐다.
“하… 박윤진. 무슨 말을 못 하게 하네.”
내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진 것을 본 시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말해 봤자 싸움밖에 되지 않을 테니 이쯤에서 물러나겠다는 암묵적인 신호였다.
그 행동이 또 너무 어른 권시훈의 것이어서 속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알았으면 이리 와.”
“왜.”
“…안아보게 이리 오라고.”
시훈은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나 또한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잠자코 입을 다물고 앞에 서 있는 작은 몸을 끌어당겨 내 품에 안았다.
“작다. 진짜.”
“…….”
“어떻게 이렇게 작아질 수가 있지.”
어른일 때도 따뜻했지만 아이가 되고 나니 기초체온이 올랐는지 안은 몸에서 금세 열이 올랐다. 혹시 사라질까 무서워서 품에 꼭 안고 머리칼을 뺨에 부볐다.
“그래서, 싫어?”
“싫다기보다는 그냥 이 상황이 좀 그래.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보면 아닌 것 같고, 한편으로는 적응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무슨 뜻이야.”
“아이인 권시훈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인정하고 나면 다 포기해 버릴까 봐.”
“…….”
권시훈을 품에 안고 있지만, 진짜 권시훈은 아닐 것이라고 속으로 끝없이 되뇌었다. 네가 어른이었다면, 품에 안긴 건 네가 아니라 나였겠지. 넓은 가슴에 기대어 가만히 네 맥박을 귀에 담고 편안히 잠이 들었을 텐데.
“시훈아.”
“응.”
“권시훈.”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먹먹해진다. 결코 살면서 감정 기복이 심하다 느낀 적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 자꾸만 기분이 이상하다. 끝도 없이 막연해졌다가, 갑자기 슬퍼진다. 그래서 눈물을 떨구려 할 때 즈음 돌아서면 또 괜찮아져 버린다. 차라리 옥신각신하며 열을 낼 때가 나았다. 이런 식의 먹먹함은 정말이지 느끼고 싶지 않았다.
순간 목구멍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것 같아 턱에 힘을 주고 시훈을 더 꽉 끌어안았다.
* * *
이게 꿈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깨어나기 싫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목을 길게 뺐다. 딱딱하게 굳은 어깨 근육이 주욱 늘어났다. 감은 눈꺼풀에 기다란 속눈썹이 바람에 흩날려 뺨을 간질였다. 아직 피부에 닿는 공기가 많이 차가웠지만, 곧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고개를 내려 내 다리를 베고 누운 어른 권시훈을 내려다보았다.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조차 사라진 겨울 풍경에 고롱고롱 숨소리가 잔잔한 음악처럼 듣기 좋았다.
모처럼 평온하게 잠든 나의 연인의 모습은 수묵화와 같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흰 뺨을 쓸어내리고 붉게 물든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누른다. 허리를 숙여 입술을 맞췄다.
‘으음….’
숨을 죽이고 인기척을 줄이려 했으나, 곧 시훈의 눈꺼풀이 스르르 열렸다.
‘나 얼마나 잤어? 너무 오래 잤지…?’
밤바다처럼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스르르 움직여 나를 응시했다. 그간 많이도 고단했던 듯 여태 잠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니야. 한 시간 좀 넘었을 거야.’
‘벌써 그렇게 됐어? 깨우지. 다리 아팠겠다.’
비척대며 몸을 일으키려는 시훈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보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더 누워 있어도 되는데.’
‘너 힘들잖아.’
‘피곤하면 들어가서 더 잘래? 침대로 가자.’
‘윤진이 너야말로 피곤할 텐데.’
‘아니야….’
몸속 어딘가가 간질거려 옷자락을 꽉 쥔 채, 걱정이 가득 담긴 까만 눈동자를 마주했다.
‘…….’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짧게 입술이 맞부딪혔다.
‘이리 와.’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끌어당기는 손길에 잠시나마 몸을 맡겼다. 이렇게라도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더 절망스럽게 했다.
* * *
그날 이후 시훈은 영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신체나이 7세에 무기력증이라도 온 듯 유치원 등원 시간이 가까워져 올 때까지 침대에서 미적거리다 버스가 도착하기 30분 전에 겨우 일어나 대충 옷만 주워입고 집을 나섰다.
“시훈아. 잘 다녀와.”
“으응.”
“…어디 안 좋아? 힘들면 오늘 학원으로 데리러 갈까? 아니면 오늘 유치원 빼고 집에서 쉴래?”
“아니야. 집에 있으면 뭐 해. 할 일은 해야지.”
“유치원 재미없어?”
“재미없다기보다는 이 생활이 괜찮은 건가 싶어서.”
“잘 다니다가 무슨 소리야….”
“아니야.”
눈썹을 늘어뜨린 채 고개를 젓는다. 내가 보기에 별 쓸모없는 7세의 일상이었지만, 시훈에게는 이미 습관이 된 지 오래였나 보다. 싫어도, 귀찮아도 해야만 하는 것. 직장인이 휴일에도 칼같이 출근 시간에 맞춰 눈이 떠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 않을까.
“가끔 필요할 때는 쉬어도 되잖아.”
“…….”
“걱정돼서 그래.”
“걱정해 주니 고맙네.”
“시훈아….”
“다녀올게.”
축 늘어진 콩알만 한 등을 한참 바라보다 돌아서는 내 기분도 물먹은 이불처럼 가라앉았다. 등원 버스에 올라 손을 흔드는 모습마저도 오늘따라 안쓰러워 보였지만 나까지 시훈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어설프게나마 미소 지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말간 얼굴이 미미하게 풀어지며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이대로는 안 돼.”
멀어지는 노란색 버스 뒤꽁무니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홀로 중얼거렸다. 이제 권시훈도 한계에 부딪힌 게 분명했다. 우울한 연인의 얼굴을 마주한 이상, 망설일 이유 따위 없었다. 어떻게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3)============================================================
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