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연구소에 도착하니 오형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서 거하게 쇼핑이라도 하고 온 건지 의자 옆에 상자가 그득히 쌓여 있었다. 누군 누구 때문에 속이 안 좋은데 저 자식은 태평하게 돈이나 쓰고 다니는구나 싶어 부아가 치밀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이고. 윤진 씨. 이제 출근하십니까! 왜 거기 그렇게 서 있어요. 앉아요. 앉아!”
회의실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우렁찬 목청으로 아저씨 같은 인사를 건넨다.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지만 괜히 민망해져 어깨를 움츠렸다.
“…좋아 보이시네요.”
“헛. 그래 보입니까? 오늘이 3일째 철야라 볼살이 빠져서 그런가. 하하핫!”
얼굴색 좋아 보이는데 철야 3일째라…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못 미더웠지만 본인이 그렇다니 믿어 주기로 한다.
“어쩐 일이십니까. 연구소까지 직접 찾아오실 줄은 몰랐는데.”
“아, 그렇죠? 제가 연락을 미리 드렸어야 했는데 마음이 급하니 까먹어 버렸지 뭡니까.”
“제게 급한 볼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아무래도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이야기해야겠다 싶어서요.”
“그렇게 긴급한 건이면 전화로 하시지.”
“따로 전해 드릴 것도 있고 해서요.”
‘전해 드릴 것’이라는 말에 내 눈이 번뜩였다. 나와 오형석 사이에서 긴급한 일이라면 분명 시훈에 관련된 것일 테니 어쩌면 치료제 개발이 완료되었을지도 몰랐다.
“뭡니까.”
“별건 아니고… 이거.”
오형석은 의자 옆의 짐 더미를 뒤적이다가 작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순간 불길한 느낌이 등 뒤를 스치고 지나갔다.
뽀짝뽀짝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핑크색… 그냥 지나가면서 봐도 아이들이 사용하는 물건이 들어 있을 것 같은 디자인의 봉투.
“…….”
“우리 때는 남자애들은 죄 로보트 그려진 시퍼런 추리닝 밖에 없었잖습니까. 그런데 요새는 확실히 세상이 좋아져서 그런가. 애들 옷이 귀여운 게 많더라고요. 그래서 그 윤진 씨 애인분 생각나서 몇 벌 사봤습니다.”
“…….”
“제가 애를 안 키워봐서 사이즈가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크거나 작으면 교환도 해 준다니까 한번 입혀보세요.”
“…….”
“핫핫핫.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정-말 지나가다 산 거고, 얼마 하지도 않아요.”
받아든 봉투를 슬쩍 들여다보니 차마 말로 표현하기 민망한 무늬의 천 쪼가리들이 가지런히 개켜져 있었다. 차라리 시퍼런 로보트 추리닝이 나을 정도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총천연색의 향연….
“시훈이가 좋아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감사합니다.”
“하하. 별말씀을. 제가 보니까 애들은 유치할수록 귀엽더라고요.”
오형석은 시훈이 정신까지 어린아이가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형석 씨. 모르고 계시는 것 같아 말씀드리는데 권시훈 씨는 몸만 작아진 거지 정신상태는 서른 살 그대로입니다. 애들이라고 하면… 매우 불쾌해할 것 같은데요.”
“에이. 우리끼리인데요. 뭐. 당사자 앞에서는 그런 말 안 하지.”
“애인인 저도 썩 기분 좋게 들리지는 않는데.”
“헛. 그렇습니까? 농담이었는데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 새끼는 원래 저렇게 속이 없는 건지 내 속을 뒤집으려고 일부러 그러는 건지… 마음 같아서는 멱살이라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지만, 사회적 위치가 있으니 꾹 참았다.
“그런데… 혹시 급한 일이라는 게… 제 애인 옷 선물하기였습니까?”
“네?”
“엄연히 업무시간인데 이런 사적인 이유로 제 시간 빼앗으러 오신 건 아니시죠?”
만약, 볼일이 정말 ‘옷 선물하기’가 다라면 뒤통수를 갈겨 버리겠다 굳게 마음을 먹고 오형석을 노려보았다. 눈치 없는 오형석은 혼자 껄껄대다 뒤늦게 이상함을 느끼곤, 서서히 웃음기를 거두며 큼큼 헛기침했다.
“흠… 그, 그럴 리가요. 물론! 선물은 부수적인 겁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한 피해자분에게 드리는 위로의 표시랄까.”
“그런 건 필요 없고 용건이나 말하세요. 저 바쁩니다.”
시훈이 돌아오는 시간 전에는 무조건 오늘치 업무를 미쳐야 했기에 근래의 내 하루는 연구원 생활을 시작한 이래 가장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내 앞으로 떨어지는 급한 업무만 처리하더라도 하루가 모자랐다. 그래서 새로운 프로젝트의 선임연구원 자리도 고사했다.
물론 시훈은 몸만 어린이일 뿐이니 홀로 집에 있더라도 밥도 잘 챙겨 먹을 것이고, 제 방에 들어가 잠도 잘 자겠지만, 그 작은 아이가 넓은 집을 외로이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닌 걸 알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이가 있는 연구원들이 오후가 되면 불안한 눈으로 시계만 쳐다보다가 퇴근 시간이 되기 무섭게 튀어 나가던 게 이해 가지 않았었는데, 막상 내가 그 입장이 되고 나니 새삼 그들이 존경스러워질 정도였다. 나는 기껏 한 달 넘었는데도 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데….
여유가 없어지니 점점 표정이 굳어갔다. 어쨌거나 지금 이렇게 의미 없는 입씨름할 시간이 없었다. 나 바빠. 일하러 가야 해. 시간 없다고.
“다름이 아니라 제가 찾아온 이유는요. 뭐 좀 여쭤볼 게 있어서입니다.”
“…뭡니까.”
“권시훈 씨가 최근에 성장했다 하셨죠? 현재 다니는 기관에서 특별히 불편한 점은 없나요?”
너무 늦게 물어보는 거 아닌가. 기가 막혀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불편한 점이야 수도 없이 많죠. 일단 능력치가 보통 아이들과 차이가 심하게 나니 관심받는 것은 당연하고, 어쩌다 제 신분까지 다 공개되는 바람에 동네 돌아다니는 것도 힘들 지경이네요.”
“에? 윤진 씨가요?”
“…싱글 대디라고 사방에서 어찌나 관심을 두는지 모릅니다.”
경비 아저씨, 주리 맘, 서아 어머님, 정윤이 어머님, 우현이 아버님, 동네마트 사장님, 심지어 우리 아파트 동대표 아주머니까지 나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다들 측은지심과 선량한 마음에서 베푸는 호의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주목받는 것은 역시나 내 취향이 아닌지라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다.
“그거야 윤진 씨가 워낙에 어려 보이기도 하고 거기에 잘생기기까지 하니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이 나이 되도록 잘생겼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고, 앞으로 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에이….”
“관심받는 데에는 면역이 되어 있지 않아서요. 정말이지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이사까지 고려하고 있습니다.”
끊이지 않는 주변의 오지랖에 과부하가 걸려버린 나는 동네 어머님들의 톡 알람도 모조리 꺼버리고, 정말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집 밖에 나가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늘 그렇듯 자발적 아싸의 길에 재입성한 것이다.
내가 너무 힘들어 보였는지, 어느 날 시훈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정리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는 것은 어떻겠냐고 물었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심적으로 괴롭다 하더라도 이사까지는 너무 멀리 간 것 같아 괜찮다고 둘러대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어디 산에 틀어박히고 싶었지만.
“저런. 그 정도로 스트레스받으실 거라고는 생각 못 했네요.”
“제 성격 탓이니 제가 감수해야 하는 게 맞지만,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네요.”
“잘됐네요! 사실 제가 제안을 하나 드리려고 했는데 갑작스러울 것 같아서 망설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윤진 씨가 지금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계신다니 도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뭔가 불안한데 안 들어볼 수는 없으니 일단 입을 다물고 오형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제부터 권시훈 씨는 누가 봐도 눈에 띄게 성장을 거듭하게 될 텐데 그때마다 주변 신경 쓰는 게 불편하실 테죠.”
“알고 계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래서 말인데 괜찮으시다면 저희 쪽에서 마련한 임시거처로 옮기는 건 어떨까 하고요.”
“…갑자기요?”
“갑자기는 아닙니다. 내부에서는 예전부터 논의되던 사안이었어요. 그런데 갑작스러운 사고 겪으신 분들에게 거처까지 옮겨달라 부탁드리려니 좀 죄송스러워서 제 선에서 입 다물고 있었거든요.”
“아쉽네요. 오늘이 아니었다면 당장 뒤집어엎었을 텐데.”
“…임시 거처는 저희 연구소와 가까워서 만약의 상황에 대한 대응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신속할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 시훈 씨의 학교 입학이나 기타 행정절차도 두 분께 피해 가지 않도록 조처하도록 하겠습니다.”
가만 듣다 보니 절대 나와서는 안 되는 단어를 들은 것 같아 다급히 손을 휘휘 저으며 오형석의 말을 끊었다.
“잠깐만요. 학교요?”
“네? 네. 학교요.”
“지금 유치원생 수발하는 것도 벅찬데 학부모까지 하란 말입니까?”
“어… 이건 꼭 하셔야 하는 건 아닌데, 일종의 연구라고 해야 할까요. 시훈 씨가 몸만 어려지고 정신은 그대로라 ‘추측’은 하지만 확실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신체적 나이가 비슷한 또래 집단과 섞여 있을 때 어느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는지에 대한 지표도 세우고, 실제 학교생활을 하면서 학습능력이나 사회성, 신체발달 사항을 체크하면 보다 효율적인 치료가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와서요.”
“하아….”
“윤진 씨도 연구하는 사람이니 잘 아시잖아요. 이 일이 얼마나 과학자들에게 흥미로운 사건인지.”
“…….”
개소리라고 쏘아붙이려 했는데 직업병을 들먹이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오형석의 말대로 시훈의 변화는 과학자에게는 매우 구미가 당기는 일임이 틀림없다. 만약 내 애인이 당사자가 아니었다면 나 또한 눈 뒤집고 달려들 수도 있을 만큼.
아, 그런데 학교에 가게 되면 또다시 학부모 코스프레를 해야 하는 거잖아. 그건 또 싫다고.
오형석은 볼썽사납게 구겨진 내 얼굴을 보다 제 턱을 쓸며 헛기침을 뱉었다.
“윤진 씨가 영 내키지 않으시면 강요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거절하시기 전에 권시훈 씨에게 의사를 물어봐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시훈이한테요?”
“네. 이러나저러나 치료 대상자는 권시훈 씨이니 당사자의 의견이 제일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
젠장. 맞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닌 시훈이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시훈은 높은 확률로 쌍수 들고 환영할 것이다. 거기에 근래 이곳 생활에 지쳐버린 내 눈치를 보고 있었으니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다 하면 더욱 반대할 이유가 없겠지.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괜찮고 말고 할 게 있습니까. 당사자가 하겠다고 하면 따라야죠.”
“갑작스러운 건 알고 있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제가 뇌물도 드렸잖아요. 하하하.”
“뇌물이라고 하기엔 좀… 가지고 싶지 않은데.”
에휴.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건지 점점 꼬여가는 건지 모르겠는데 어쨌건 유치원 생활을 정리할 수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두어야 하나. 그래. 이 권태로움을 극복하는 데에는 새로운 환경이 답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좋게 생각하고 싶어도 또다시 학부모의 길을 가게 될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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