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가자! 가! 당장 가자.”
“아니, 잠깐. 시훈아. 진정 좀 하고 내 말을 들어봐.”
“이럴 때가 아니네. 짐부터 싸야겠다.”
예상대로 시훈은 초등학교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눈을 번쩍이며 대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더해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야 할 수도 있다 하니 당장 가자며 난리를 치는 바람에 말리느라 한바탕 진땀을 뺐다.
“지금 당장 가는 게 아니라 며칠 더 있어야 해. 그쪽도 준비라는 걸 해야 할 거 아냐.”
“왜? 오늘 가나 내일 가나 뭐가 다른데?!”
“네 동의를 얻은 다음에 일을 진행해야지!”
“응응! 할게. 한다구! 얼른 가자!”
“아우. 정신없어! 진짜 성격 급하네.”
누굴 닮아 이리도 성격이 급한 건지. 조금 더 늦게 말할 걸 후회했다.
“자기야.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동안 얼마나 속상한 줄 알아?”
“네 마음은 알겠는데… 앞뒤 따지지도 않고 바로 승낙해버리니 내가 할 말이 없다.”
“자기가 너무 생각이 많은 거야.”
그건 인정하는 바여서 또 할 말을 잃었다.
“아무튼 그렇게 전할게.”
“응. 사랑해. 자기야.”
이젠 저 사랑해라는 말이 무서울 지경이다.
유치원에 퇴소 소식을 전하자 원장선생님을 비롯해 담임선생님, 심지어 영양사 선생님까지 우리 원의 인재가 떠난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들이 난리가 난 것은 당연했다. 몇 날 며칠 시훈을 붙들고 가지 말라 울고불고하다 퇴소 날에는 고사리손으로 꼭꼭 눌러쓴 편지 더미와 꽃다발을 품에 안겨주었다.
시훈에게
시훈아 나는 서아야.
저번에 아파트에 내가 아파쓸 때 시훈이 휴지로 딱아주었잖아. 그때 고마웠써.
시훈아 나랑 사이조게 지내조서 고마웠써. 노래 불러주어서 고마웠써.
나중에 크면 나랑 결혼하자.
-서아가 씀-
대부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갈구하는 구애의 편지였지만 시훈은 퍽 감동한 듯 밤이 늦도록 편지들을 보고 또 봤다.
나와 알고 지내던 햇살반 어머님들도 매우 서운해했다. 대체 갑자기 어디로 이사 가는 거냐며, 시훈이 학교는 어디로 보낼 것이고, 내 직장은 어쩔 거냐며 걱정을 가정한 신상 캐기를 시전했다. 마음 약한 내가 어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니 세모눈을 한 시훈이 냅다 휴대폰을 빼앗아 들고,
겁나 멋진 사람과 재혼하게 되어서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라고 보내 버려서 순식간에 모든 상황이 정리되어버렸다.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니냐고 한마디 하려 했는데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대서 그래, 네가 하는 게 다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형석은 약속대로 시훈의 초등학교 입학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대신 처리해 주었다. 연구소 산하의 혁신학교라던데 설명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그냥 흘려들어 버렸다. 덕분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서 편하긴 했지만 정말 몸만 옮겨오려니까 괜히 무언가를 덜 한 것 같은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여기도 무지막지하게 크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어언 2n년. 그 이후로 초등학교라면 교문조차 지나가 본 적이 없는지라 지금 이 상황이 너무도 낯설다.
유치원과 학교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기는 했지만 마치 나주평야를 방불케 하는 운동장에 푸르른 잔디가 펼쳐진 광경은 내가 알던 초등학교의 그것이 아니었다. 벌어진 입을 좀처럼 다물 수 없었다. 하지만 놀란 티를 내면 촌스러워 보일까 봐 주먹을 꽉 쥐고 탄성을 참았다.
“자기야. 아파….”
“어, 엇. 미안.”
울상을 지으며 내 손을 흔들기에 퍼뜩 놀라 시훈을 내려다보았다. 속마음을 숨기려다 나도 모르게 손을 붙든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나 보다.
“저기… 시훈아.”
“웅.”
“원래 초등학교가 이랬었나?”
“그러게? 우리 때랑은 좀 많이 다르네.”
“세상 진짜 좋아졌네. 설마 저 큰 네트 있는 데가 테니스장이야? 저쪽에 수영장도 있네?”
“자기. 방금 좀 늙은이 같았다.”
“놀리니?”
“웅, 아니.”
“초등학생에 비하면 늙은이 맞지.”
지금 내 눈앞의 멀끔한 건물은 초등학교라 하기에는 매우 호화로웠다. 내 기억 속의 초등학교라 하면 일단 운동장에 잔디가 있으면 안 되었다. 어디서 퍼온 건지 알 수 없는 모래가 바람에 펄펄 날려 축구 한판 하고 나면 콧물이 흙색이어야 했고, 백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본관 건물은 흡사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져 복도에서 썰매를 탈 수 있었고, 화장실은 한여름에도 한기가 돌아야 했다.
“시훈아.”
“웅.”
“너 초등학교 때 기억나니? 난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
문득, 시훈의 ‘진짜’ 초등학교 생활이 궁금해졌다. 너무 들뜬 나머지 몸까지 들썩이려 하는 저 방정맞은 꼬맹이의 진짜 과거는 어땠을까. 나야 어렸을 때부터 경시대회니 뭐니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제대로 된 학교생활 따위 꿈도 꾸지 못했지만, 시훈이야 고등학교 때까진 착실한 학생이었을 테니 나보다는 추억이 많겠지.
“구령대에서 춤추고 교실에서 의자 쌓기 놀이했던 건 기억나는데 공부했던 기억은 없네.”
내 남친이 조신한 공붓벌레였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권시훈 씨는 내 상상 그 이상의 관종이었다.
“…공부는 안 했을 거라 예상을 했다만, 구령대에서 뭘 어떻게 해?”
“춤췄다고. 춤. 자기 춤 멀라? 둠칫둠칫 이렇게 하는 거!”
갑자기 세기의 춤신에 빙의라도 했는지 아무도 없는 운동장 한가운데서 쪼그만 팔다리를 휘저으며 정체불명의 몸부림을 친다. 그런데 그게 또 제법 그럴듯해서 순간 눈이 동그래졌다가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고 손사래를 쳤다.
“아, 제발… 그만. 넌 창피하지도 않니?”
“왜! 원래 초딩들은 이렇게 뜬금없는 게 제맛이라고.”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웅. 당연하지. 방금 내가 지어냈으니까.”
왜 쪽팔린 짓을 하는 건 너인데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이 되어야 하는 거니. 모른 척 도망가고 싶었지만, 누가 보면 자식 버리고 도망가는 못된 아빠라고 손가락질할까 봐 눈을 질끈 감고 참았다.
오늘도 덥다. 더워. 일사병이라도 걸린 건지 머리가 어질거린다. 이러다 시훈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걸 보기도 전에 내가 비명횡사하는 걸 아닐까.
“하아, 정말… 이 짓을 또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으웅. 나두.”
“너는 즐거워 보이는데?”
“으응? 아니야. 즐겁기는…. 자기가 싫으면 나두 싫지.”
말만 심드렁한 척하지 웅웅대는 거 보니 기분 째지는 게 틀림없다.
“그런데 너 꼭 그렇게 귀여운 척을 하면서 말해야 하니?”
“왜엥? 나 안 기여워?”
“…귀엽지. 그런데 좀 소름 돋아서.”
진짜 저 혀짧은 소리 좀 어떻게 못 하나. 어른일 때도 종종 되도 않는 애교를 부리기도 했지만, 아이가 되고 나니 그 정도가 심해진 것 같다.
지금에야 얼굴이 워낙 귀여우니까 절로 미소가 나오긴 하지만 문득 내 1.5배 정도 되는 덩치의 권시훈이 겹쳐 보일 때면 뭐랄까… 좀 징그러워서 등골에 소름이 올라온다.
* * *
막 1교시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담임선생님과 제대로 이야기도 나눠 보지 못하고 쫓기듯 건물을 나섰다. 시훈에게 잘하고 오라는 응원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타이밍이 맞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딩-동-댕-동.
이 종소리는 여전하구나. 교무실의 선생님들이 딱 봐도 나보다 어리거나 비슷한 또래처럼 보여서 새삼 내가 나이가 들었구나 싶어 울적했는데, 하나라도 내 기억과 맞는 게 남아 있어서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아우, 덥다.”
막상 회사에 들어가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도 가져오지 않아 꼼짝없이 버스 행인데 아침부터 푹푹 쪄서 정류장까지 걸어가기도 귀찮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운동장 앞 스탠드에 주저앉아 버렸다.
눈을 들어 절절 끓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따갑게 안구를 찌르는 빛에 얼마 못 가 고개를 떨구고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때 이른 더위 탓인지 밖에 나와 있는 학급이 없어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하기야 이런 날에는 그냥 밖에 서 있기만 해도 쓰러지기 딱 좋겠다. 바다나 계곡에라도 가면 모를까.
그러고 보니 학교에 다니게 되면 자연스럽게 여름방학도 보내게 되겠구나. 이제 여름 초입이니 학교 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집에 들어앉게 생겼네. 집에 꼬맹이를 혼자 둘 수는 없으니 학원이라도 돌려야 할까. 아니면 어디 여름 캠프라도 보내야 할까. 아니, 내가 불안해서 안 되겠다. 차라리 내가 휴직을 할까….
“아니지. 시훈이 어른이잖아.”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시훈이 눈에 밟힌다. 사실 지금도 회사에 가기 싫어서 밍기적대는 게 아니라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낯선 교실에 앉아 있을 시훈이 걱정되어서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이다.
나도 참 주책이지. 지금 저 학교에서 수업받고 있는 학생 중 가장 적응 잘하고 잘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꼭 품 안의 자식이라도 된 양 전전긍긍하고 있다니.
혼자서 혀를 끌끌 차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혼자 한심하다 자책해도 결국에 내 생각의 흐름은 시훈을 걱정하는 쪽으로 흘러갈 것이다.
DRRR-
상념의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려던 찰나,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아, 그래. 이럴 때가 아니지. 나 지금 회사 땡땡이 중이지. 고개를 저으며 주머니를 뒤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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