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외전. 개 쩌는 박시훈 어린이의 초등학교 정복기
내 조카뻘의 아이들일지라도 나는 절대 그들을 우습게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난 지금 서른 살 영화감독 권시훈이 아닌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미래가 될 초등학생 박시훈이기 때문이다. 라고 전학 전전날부터 스스로 세뇌했다.
윤진이는 내 손을 놓는 순간까지 걱정을 놓지 못했다. 하여간 그놈의 걱정 병은 나이가 들수록 더한단 말야. 내 몸이 작아져 버리니 진짜 나를 본인 자식이나 조카 정도로 착각하고 있는 건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잘할 수 있지?’
‘나 없어도 괜찮겠어?’
라고 지치지도 않고 물어보았다.
어쨌거나 벌어진 일이고, 이 상황을 즐기다 보면 어떻게든 결론이 나겠지. 윤진이는 내가 이럴 때마다 속 편한 소리 한다고 혀를 끌끌 차지만 안 되는 일 붙잡고 있어봤자 머리만 아프니 좋게 생각하는 게 낫다는 게 내 지론이다.
‘자기야. 나 서른 살이야. 그건 알지?’
‘으응. 알지. 아는데 하는 행동이 딱 봐도 초딩이잖아.’
‘뭐? 어딜 봐서?’
‘어딜 봐도….’
‘아니거든!’
‘걱정돼서 그래. 으휴….’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포옥 한숨을 내쉰다. 내가 몸만 작아진 거지 정신연령은 그대로인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 눈에 밟히는 모양이다. 귀엽게.
* * *
아무리 내가 관종에 컨셉충이라도 민망한 건 민망한 거다. 기분상으로는 진로체험 초빙 강사 정도로 교단에 선 것 같은데 지금 이 교실에 서 있는 권시훈은 그냥 애였으니, 이 괴리감은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을 테다. 하지만 여기서 평소처럼 굴었다가는 선생님의 의심을 살 게 뻔했고, 이 일에 관련된 모든 사람이 곤란해지겠지.
집중하자. 권시훈 넌 초등학생이다. 그것도 전학 오자마자 이 학교를 주름잡아버릴 사기 능력치의 초등학생.
“시훈아. 이쪽으로 와. 인사해야지.”
“넵!”
우렁차게 대답하고 위풍당당하게 교탁 옆으로 성큼 다가가 섰다. 웅성임이 잦아들고 동글동글한 꼬맹이들의 눈이 도로록 굴러 일제히 나를 향했다.
그 시선들을 한 몸에 받으며 최대한 어깨를 쫙 폈다. 나는 비록 전학을 왔지만, 너희 같은 조무래기들에게 질 수 없다는 기세를 한가득 담아서.
“얘들아. 오늘부터 같이 지낼 친구야. 시훈아. 인사하렴.”
“안녕? 나는 박시훈이라고 해! 좋아하는 건 축구야! 잘 부탁해!”
아이들은 신기한 것을 보듯 눈을 초롱하게 뜨곤 나를 위아래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마음껏 봐라. 귀여운 것들. 8년 인생에 나 같이 잘생기고 까리한 초등학생은 처음 볼 것이다.
“어디 보자. 시훈이는 키가 크니까 뒷자리 괜찮지? 혹시 눈 나쁘니?”
“저 시력 좋아요! 양쪽 다 2.0입니다.”
“으응? 그, 그렇구나. 그럼 저쪽에 가서 앉으렴.”
선생님의 동공이 흔들리는 걸 보니 적잖이 당황하신 모양이다. 그렇겠지. 이제 1학기 끝자락의 1학년이면 유치원생이나 다름없는데 이렇게 성숙하고 의젓한 아이가 들어올 줄 누가 알았겠냐고.
“여러분. 시훈이랑 사이좋게 지내고 시훈이 궁금한 거 있다고 하면 친절하게 알려 주는 거예요. 알았죠?”
“네에~”
아직 속마음을 숨기는 데에 서툰 아이들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대놓고 나를 흘긋거렸다. 악의 없는 순수한 관심이 귀여워 자꾸만 웃음이 픽픽 새어 나왔다.
흠흠. 이러면 안 되지. 아무리 그래도 첫날부터 너무 튀어버리면 아이들은 몰라도 선생님이 의심할 수도 있다. 들뜨는 기분을 애써 가다듬으며 내 자리로 가 앉았다.
“이제 수업 시작할게요. 모두 책 펴고.”
진도를 알 리 없는 나는 잠자코 책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교실을 관찰했다. 일단 균형 안 맞는 나무 책상이 아니었고 무려 천장에 선풍기가 아닌 시스템 에어컨이 달려 있었다. 사물함이나 칠판도 내가 기억하는 것들과는 사뭇 달랐다.
“지난 시간에 몇 페이지까지 했는지 기억하는 친구?”
“저여!”
“저욧!”
요즘 친구들은 자기 표현력이 남다르네. 선생님의 질문에 아이들이 앞다투어 손을 치켜들었다. 이 교실 안에서 손을 들지 않은 아이는 나뿐이었다. 정말 달라도 너무 다른 거 아냐? 나 때는 발표 할 타이밍만 되면 선생님과 눈 마주칠까 봐 책 속에 숨는 친구들이 절반 이상이었는데.
“저여! 선생님! 13페이지여!”
“야! 그걸 말해버리면 어떻게 해!”
“아 씨!”
딴생각하는 사이에 발표 경쟁은 점점 과열되어 급기야 관심을 끌려 선수를 치는 친구까지 나오고 말았다.
“선생님~~~ 내가 말하려고 했는데 쟤가 먼저 말했어요! 혼내주세요!”
“마자! 반칙이야! 첨부터 다시 해!”
“응~ 내가 1등.”
“아니거든!”
흥분한 아이들은 내가 이겼네, 네가 이겼네. 하며 너나 할 것 없이 한 마디씩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잖아도 수선스러웠던 교실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시끄러워라. 쪼그만 것들 목청이 왜 이리 큰 거야. 도저히 고막이 버티질 못해 귀를 틀어막으며 선생님을 바라보니 모든 것을 달관한 성인처럼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이 난리 통을 관전하고 있었다. 설마 귀가 안 들리시는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면 소리를 골라 듣는 능력이라도 있다던가.
“이것들이 진짜….”
선생님께서는 능력자라 할 지어도 나는 아니었다.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윤진이 덕에 일할 때 빼고는 절간과 같은 정적을 유지하는 생활을 오래 했더니 내 청각도 덩달아 예민해져 버린 탓인가보다.
그리고 하나 더 이유를 말하자면, 의미 없는 입씨름으로 신성한 수업 분위기를 흐리는 것을 어른으로서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꼰대인가 보다.
“야! 조용히 해! 시끄러워!”
“?”
“??”
“이것들이 지금 수업 중이잖앗! 그만 싸우고 자리에 앉아!”
언젠가 윤진이가 몸이 작아지더니 소갈머리도 작아졌다고 핀잔을 준 적이 있었다. 그때는 웃기지도 않는다고 코웃음을 쳤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하나 보다.
“?? 머야?”
“???”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교실이 조용해졌다. 내 사자 후에 놀란 선생님과 아이들은 토끼 눈을 뜨고선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당연했다. 나도 내 목청이 생각보다 커서 놀랐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쫄아 버릴 권시훈이 아니었다. 일단 여기서 꼬리를 내리면 죽도 밥도 안 되었다. 그래서 허리를 더욱 꼿꼿하게 세우고 짐짓 엄한 말투로 아이들에게 말했다.
“여기는 학교고! 너희는 학쌩이야! 소리 지르고 싸우러 오는 데가 아니라고! 어디 버릇없이 선생님 앞에 계신 데 소리를 지르는 거얏!”
매우 꼰대 같은 발언이었는데, 아직 진정한 꼰대질을 경험해 보지 못한 초딩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저 입을 떡 벌리고 자리에 앉은 지 채 10분도 되지 않은 전학생을 넋을 놓고 바라볼 뿐이었다.
“시, 시훈아. 괜찮아. 화내지 말고 진정하렴.”
이 교실 안에 남은 유일한 이성인 선생님이 씩씩대는 나를 말렸다. 하지만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걸 보니 당황한 건 매한가지인가보다.
“죄성합니다. 선생니임. 제가 부리를 보면 참지 못해서요.”
“불의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어쨌건 화내지 않아도 된단다.”
“네엡. 죄성합니다.”
무려 ‘불의’라는 고급단어를 사용하는 초1을 본 적이 있는가. 아이들은 나의 화려한 언변에 감탄을 금치 못했는지 입을 다물고 선생님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니 꾹꾹 눌러 담았던 관종력이 슬금슬금 비집고 나오려 한다.
오늘 아침 윤진이가 내 어깨를 꽉 쥐고 했던 당부를 가장한 부탁을 아직 잊지 않았으니 자제해야 하는데.
‘시훈아. 학교 가서 뭐든 열심히 하고 성실한 건 좋은데 제발 튀지 말고 얌전히 있어.’
‘그냥 앉아만 있어도 눈에 띄는 걸 어쩌라구.’
‘…그래. 너 잘난 건 내가 제일 잘 알지. 그러니까 더 조심하라는 거 아냐. 괜히 눈에 띄었다가 책잡히면 곤란하니까.’
‘아니, 초등학교에서 책잡힐만한 일이 뭐가 있는데?’
‘괜히 나대다가 왜 그런 거 있잖아. 학폭이라든가….’
‘자기야. 아무리 내가 관종이고 정신연령이 낮아도 애들 상대로 주먹을 휘두르진 않아.’
‘당연한 거 아냐? 그건 쓰레기고.’
‘나 애 아니야. 걱정하지 마.’
‘걱정이 되는 걸 어떻게 해.’
‘으휴. 그래. 자기가 그렇게 신경 쓰여 하니까 내가 최대한 얌전히 있어 볼게. 됐지?’
‘제발, 부탁 좀 한다… 적어도 선생님 전화 받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알겠다니까!’
그래야 하는데, 이놈의 입은 번복을 왜 이리도 좋아하는 걸까.
“뭐야! 너희 다 나한테 반했냐? 뭘 그렇게 쳐다봐?”
윤진아. 자기야. 미안해. 난 어쩔 수 없나 봐. 자기 말대로 감독이 아니라 배우를 했어야 했나 봐. 꼭 한번은 튀어야만 속이 편안해지는데 이것도 병이라면 병인가 봐.
하지만 어떻게 해. 잘못은 짚고 넘어가야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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