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난데없이 연구소 근처로 오라는 동기의 호출에 한참을 밍기적대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터덜터덜 연구소로 향했다.
홍박사
박박. 4시에 미팅. 연구소 앞에 카페로 와.
거짓말 하지마. 무슨 4시에 미팅을 해. 너 땡땡이 치려는거지?
홍박사
잘 아네. ㅋㅋㅋㅋㅋㅋㅋ
지금 연구소에 아무도 없어. 금요일이라 다 반차쓰고 집에갔음
나도 그럼 반차 올려줘. 집에 가게.
홍박사
야아아아! 커피 한 잔만 하자. 제발.
커피? 술이 아니라?
홍박사
마셔주면 좋고^^
……
홍박사
박윤진. 너 이번에 거절하면 7번째다? 나 진짜 삐져?
얘도 시훈이 못지 않는 땡깡쟁이에 뒤끝까지 있어 이번에도 거절하면 월요일이 두려울 것 같아 마지못해 알겠다 대답했다.
한숨을 푹푹 쉬며 대화방을 나와 다시 자판을 두드렸다. 얼른 퇴근해서 시훈 초등학교 준비물 사러 가려고 했는데 정말 안 도와주네.
시훈아. 오늘 못 데리러 갈 것 같은데. 홍 박사가 오늘 술 한잔하자네. 이번에 거절하면 7번째라 좀 곤란해져서. 늦지 않게 금방 들어갈게. 미안…
진짜 진짜 일찍갈게. 얼굴만 비치고 올 수 있으면 머리만 넣었다가 올게!
수업 중이라 전화는 받지 못할 테니 메시지를 남겼다. 답장을 받지 못해 찝찝했지만, 이따 전화라도 해 봐야겠다 생각하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좀 구구절절한 것 같지만 제대로 말 안 했다가 후폭풍을 감당하는 게 더 골치 아프겠지.
“아!! 회사 가기 싫다!!”
한걸음, 한걸음이 쇳덩이라도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시훈이 이 꼴을 보면 그냥 자기가 먹여 살릴 테니 너는 일 때려치우고 놀라고 할 테지만, 사람이 어떻게 일을 안 하고 살 수 있단 말인가. 결코 노동이 즐거운 행위는 아니지만 막상 다 놓아버리면 쉽게 나태해지고 우울해지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직장인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가기 싫어. 거기다 외부 미팅(을 빙자한 자체회식)이라니. 날씨는 또 왜 이렇게 더운 거야.
“어휴. 도저히 안 되겠다.”
한 정거장 전에 내려 걸어가자는 선택은 어떤 미친놈이 한 거지.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애먼 티셔츠만 펄럭였다. 그래 봤자 뜨겁고 습습한 공기만 맨살에 기분 나쁘게 붙을 뿐이었지만.
결국 백기를 들고 근처 공원 벤치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미쳤지. 원래 체력이 좋은 편도 아니고 운동이라고는 숨쉬기가 전부인 내가 어쩌자고 이 삼복더위에 도보를 선택했을까.
고개를 뒤로 젖히고 가쁜 호흡을 골랐다. 목줄기에 소금기를 잔뜩 머금은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앞이 팽글팽글 돌기 시작하는데 이거 괜찮은 거겠지. 설마 여기서 그대로 꼴까닥 기절해서 노숙자로 신고당해서 경찰서에 가는….
DRRR-
으응. 알았어. 그만할게. 그만하면 되잖아.
그만 닥치고 전화나 받으라는 듯 진동이 부르륵 울렸다.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안 봐도 발신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아서 곧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자기야.
“응. 수업 끝났어?”
-어. 방금 톡 봤어. 이제 학원 가려고.
“미안. 갑자기.”
-미안할 게 뭐 있어.
“데리러 못 가잖아….”
-내가 애도 아니고. 괜찮아.
너 애 맞잖아. 아닌 척하긴.
“그래도. 혼자 다니면 위험할 수도 있고. 너 그 동네 길 잘 모르잖아.”
-모르면 지도 찾으면 되지. 그리고 내가 자기보다 길 잘 찾거든.
“그건 그러네….”
-괜찮아. 재미있게 놀고 와. 나 때문에 사람 안 만난 지 오래됐잖아.
사실 너 때문이라기보다는 네 덕분에 안 만날 핑계를 만든 게 맞는데. 굳이 입 밖으로 꺼내면 좀 없어 보이는 것 같아 그냥 웃었다.
“알았어.”
-아, 그리고 자기야.
“응?”
-술은 많이 마시지 말고.
“나 많이 안 마시는 거 알면서.”
-그건 자기 생각이고.
“?”
-아무튼 난 분명히 말했다?
“…그래.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 정도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지.
시훈은 몇 번이나 내 다짐을 받아낸 후에야 전화를 끊었다. 자리가 파하기 전에 내 손으로 직.접 전화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누가 들으면 내가 술만 마시면 제2의 자아라도 나오는 줄 알겠네. 왜 내 손으로 전화를 걸어야만 하는 건지 이유라도 알자고 툴툴거렸지만, 이 고집쟁이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
매미가 나오긴 아직 이른 건지, 아니면 더위에 다 도망가버린 건지 공원에는 더운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만 가득했다.
일어날 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엉덩이가 벤치에서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45분. 홍 박사가 말한 카페까지는 도보 10분 정도이니 여기서 20분 정도 버티다 가면 딱 욕먹기 직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시훈이 보고 싶다.”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중얼대어본다. 그래봤자 달라지는 건 없지만 말하는 건 내 자유니까.
이번 여름에는 기필코 휴가 맞춰서 해외여행 가려고 했는데, 여권 발급이고 뭐고 죄 불가능한 이대로라면 공항 라운지에 멍 때리고 앉아 있는 휴가를 보내야 할지도 몰랐다. 아니다. 그것도 귀찮으니까 북한산 계곡이나 가는 게 나을지도.
‘에이. 됐어. 더 생각해 봤자 속만 쓰리지.’
언제쯤이면 끝날까. 내가 해결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오형석을 재촉하는 것밖에 없었다. 관계자가 아닌 이상 자세한 연구내용을 공유받거나 알아내기는 힘들 테니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시훈 말마따나 벌어진 일인걸.
꿉꿉하고 더운 공기에 더 더운 내 숨을 내뱉었다. 이 한숨에 잡생각이 모두 떠나가 버렸으면 좋겠다. 진짜로!!!
DRRR -
“아. 켁켁. 이 씨. 깜짝이야.”
답답함을 떨치려 소리라도 지르려 숨을 들이마셨는데 또다시 휴대폰 진동이 울려서 뱉을 타이밍을 놓쳐 꼴사납게 눈물을 흘려가며 기침했다.
“케켁… 아. 죽는 줄 알았네. 어떤 놈이야.”
오늘따라 날 찾는 인간들이 이리 많아.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화면을 노려보았다.
DRRR-
그런데 3년째 똑같은 진동 음일 텐데, 심지어 방금 전에도 들었던 진동음인데 왜 뒷골에 소름이 돋을까. 기이한 기분이 들어 몸서리를 쳤다.
010-XXXX-1230
분명 어디서 많이 보던 번호였다. 나 이 번호 아는데 왜 모르겠지. 눈썹을 치켜올려 더위에 절여진 두뇌를 깨워 보았지만 어른어른할 뿐 도통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누구지.”
차라리 아예 초면이면 무시해 버리겠지만, 혹시 업무 전화인데 번호를 저장해 두지 않은 경우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애매해졌다.
그래도 받는 게 맞겠지. 보이스피싱이나 불쾌한 전화면 끊으면 그만이니까.
성숙한 사회인인 나는 자신 있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박윤진입니다.”
-번호 그대로네?
남자였다. 사무적이고 딱딱한 말투가 꼭 드라마 속 팀장님 같았다.
“네?”
냅다 내 번호의 안부를 묻기에 당황해 버려 바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 멍청한 얼빠진 투로 되물었다. 그러자 귓가에 피식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바꿨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운이 좋은 건지 네가 무심한 건지 모르겠다.
번호도 애매하게 낯설더니 목소리도 알 듯 말 듯 했다.
대체 누구지? 분명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왜 나는 너를 모르겠냐 이거예요.
“죄송합니다만 누구시죠? 제 쪽에는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아서 전화 거신 분 성함을 알 수 없네요.”
최대한, 예의를 갖춰 정중히 질문했다. 네가 어떻게 나를 기억 못 할 수 있냐며 화를 내도 어쩔 수 없었다. 모르는 걸 안다고 하는 것은 나의 윤리의식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아.
대답이라고 하기엔 모호한 짧은 한마디. 딱히 화가 나 보이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기분이 좋다고 말하기에도 뭣한.
서늘하게 식었던 뒷덜미에 또다시 열이 오르고 점점 미간이 좁혀진다. 답답해 죽겠네. 말을 할 거면 시원하게 하고 안 할 거면 끊든가. 난 분명 모르겠다고 했는데 뭐 어쩌라고. 독심술 같은 거라도 해서 맞춰 보라는 거야? 미안한데 나는 과학자라서 그런 거 못 해요.
“저기, 그쪽이 누구신지는 알아야 제가 사과를 하든, 반가워를 하든 할 것 같은데 계속 이런 식으로 말을 빙빙 돌리시면….”
더 이상 전화를 붙잡고 있는 것은 시간 낭비인 것 같아 한 마디 던지고 끊으려 했다. 그랬는데,
-윤진아.
“…에?”
갑자기 남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성 빼고 정확히 ‘윤진아’라고 이름만.
뜻밖의 곳에서 이름이 불려 버린 나는 하마터면 휴대폰을 땅바닥에 떨굴 뻔했다.
나를 ‘윤진아’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첫 번째가 우리 엄마와 시훈이고, 두 번째로는 대학교 사람들 몇 명, 그리고 연구소 사람들 몇 명. 다 합쳐봐야 10명도 안 된다.
그 좁디좁은 카테고리 안에 있는 사람을 기억 못 한다고? 그거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아… 번호는 그대로인데 내 목소리는 기억 못 한다고.
“…….”
네. 모르겠는데요. 누구신데요.
-서운하네. 날 잊어버리고. 우리가 그래도 금방 잊힐 만한 인연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경우 없이 아는 척하는 당신에게 서운해지려고 하는데 이제 좀 정체를 밝히시는 게 어떨까요.
수화기 너머로 낮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할 말을 고르는 듯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대체 저 남자가 왜 저러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나는 침묵을 지킨 채 대답을 기다렸다.
-윤진아.
남자가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순간, 뜨끈하게 달아올랐던 머리에 순식간에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이 아찔해졌다.
아,
기억나버렸다.
-나야. 김태준.
(다음 편에서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7)============================================================
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