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잊어버렸다고 단언했던 내 대가리를 마구 때리고 싶다.
잊긴 뭘 잊어. 이름 석 자 들으니 한 번에 떠올라 버렸는데.
김태준.
내 대학 생활을 엉망으로 만든, 나의 첫사랑이 될 뻔한 새끼.
-너무 오랜만이네. 내가 그동안 좀 뜸했지. 미안하다. 회사 정리하고 프로젝트 진행하느라 미국 나가 있어서 연락을 못 했어.
“…….”
-잘 지냈어? 벌써 얼굴 제대로 못 본 지 10년이 다 되어가네.
“…….”
-듣자 하니 JI 연구원 됐다면서.
“…….”
-너 대학교 때 그 연구소 들어가고 싶다고 엄청 열심히 준비했잖아. 내가 그랬지? 넌 잘될 줄 알았어.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릴 뻔하다가 조금의 웃음소리도 들려주고 싶지 않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역시나 저 새끼는 달라진 게 없었다. 내 기분 따위나 사정 따위 고려하지 않고, 본인 하고 싶은 말만 주절주절 쏟아 내는 이기적인 작태.
-윤진아. 형 보고 싶지 않았어? 형은 미국에 있으면서도 네 생각 많이 났는데.
“…….”
-아, 혹시 번호가 바뀌어서 그랬나. 전화번호 몰랐으면 메일이라도 보내지. 그럼 답장 했을 텐데.
내가 부담스럽다고 일방적으로 연락 끊고 미국으로 도망간 건 너였잖아. 정말 쳐다만 봤는데 내 눈빛이 이상하다고, 기분 나쁘다며 사람들 보는 앞에서 끌어내렸잖아.
난 네 한마디 때문에 대학 생활 내내 사람들 눈 피해서 숨어다니다 결국 견디다 못해 군대로 도망쳤는데 뭐? 내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너희 연구소 한가한 편이라면서. 안 바쁘면 얼굴 좀 보자.
그래놓고 보고 싶다고? 미친 거 아니야?
휴대폰을 잡은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아, 2년 더 써서 5년 채우고 바꾸려고 했는데 오늘 주인의 손에 의해 처참히 부서져 버리는 것인가. 아직 멀쩡한데, 바꾸기 싫은데.
할 말을 찾지 못한 입술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사람 하나 등신 만들어 놓고 나 몰라라 할 땐 언제고 친한 척을 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뻔뻔해야 하는 것일까. 너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야.
만약 예전이었다면, 시훈을 만나기 전인 스물네 살 때였다면 못 이기는 척 받아줬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나는 선배를, 아니 김태준 개새끼를 동경했었다.
어딜 가나 빛이 나고 밝았던 사람.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뛰어났던 사람이었다. 공부만 할 줄 알았지 사교성은 영 꽝이고, 소심해 구석에 움츠려 있기 급급했던 나와는 태생부터 달랐다. 정반대의 결을 가지고 있는 그 새끼한테 시선이 갔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스무 살은 그래도 되는 나이였으니까.
김태준은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당연히 나에게도 친절했다. 종강 뒤풀이 때 쭈뼛대기 바빴던 나를 가운데로 끌어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건 한 예일 뿐이고 그 뒤에도 김태준은 참 나를 많이도 챙겼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김태준에게 도움 되는 것을 자처했다. 대리출석이 가능한 강의에 대신 출석하는 것은 기본이고, 과제를 대신하거나 전공 서적 요약 같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김태준이 나를 더 아끼고 좋아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양날의 검이 될 줄은 정말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1학년 2학기 종강 즈음이었다. 기말고사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데 반대편 흡연 부스에서 김태준과 4학년 선배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당연히 나는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뛰어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굳이 듣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김태준이. 요새 1학년 박윤진이랑 자주 붙어 다닌다? 양심 있냐? 고학번 선배가 신입생한테 뜯어 먹을 게 뭐 있다고 달고 다녀.’
‘윤진이 귀엽잖아. 생긴 것도 그렇고 하는 짓도 그렇고.’
‘하긴. 누가 걔를 스무 살이라고 하겠냐. 아무리 많이 봐도 고딩이지. 어떻게 보면 여자애 같기도 하지 않냐? 예쁘장해서 보는 맛은 있겠어.’
‘아. 젠장 뭐라는 거야. 같은 거 달린 남자 새끼들끼리 그딴 소리 하고 싶냐. 걔는 그냥 내 족보야. 그런 애 하나 데리고 다니면 대학 생활 편하다고.’
‘에이. 코흘리개 1학년이 무슨 도움이 되냐. 어리바리해서 걸리적거리기만 하지.’
‘너 걔 천재인 거 몰라? 4학년 전공 서적도 벌써 마스터했어. 모르긴 몰라도 우리 학부 다 붙어놓아도 걔가 제일 나을걸?’
‘햐. 하여간 잔머리만 오지게 돌아가요. 기업 오너 되려면 그런 꼼수만 배우면 되는 거냐?’
김태준은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담배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래도 오래 데리고 있으면 안 되겠어. 걔 눈빛이 기분 나빠.’
‘엉?’
‘그 왜 있잖아. 나 볼 때마다 되게 음흉하게 보는데 토 쏠리는 거 참느라 뒤질 것 같다.’
‘걔가? 글쎄다. 내가 보기엔 전혀 모르겠는데. 맹탕이라면 차라리 이해가 가는데 음흉한 쪽이랑은 거리가 좀 있지 않나.’
‘아니야. 네가 몰라서 그래. 언제 한번 봐봐. 게이 새끼 같아. 징그러워.’
이용당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순진하진 않았다. 하지만 시종일관 선한 얼굴의 김태준이 내 뒤통수를 때릴 것이라고는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충격은 잠깐이었지만 기억에는 오래도록 남았다. 나는 그날 이후로 김태준을 똑바로 볼 수 없었고, 눈치 빠른 김태준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사람들에게 학교에 나에 관련된 소문을 내고 다니기 시작했다. 내용은 일전의 4학년 선배에게 했던 말과 같았다. 날 보는 눈빛이 이상하다고. 아무래도 박윤진은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견딜 수 없던 게 당연했다. 그 길로 나는 군대로 도망쳐버렸다. 복학했을 때 김태준은 없었다. 오며 가며 간간이 전해 들은 소식으로는 결혼하고 가업을 이어받으려 미국으로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다. 다시 보아서도 안 되었다. 그렇기에 이 관계는 어떻게든 끊어내는 게 마땅했다.
-윤진아?
“누구시죠?”
차갑게 되물으니 대답이 없다. 그마저도 가식 같아서 짜증이 솟구쳤다.
“저는 그쪽 모르는데 아무래도 전화 잘 못 거신 모양입니다.”
-그럴 리가. 너 박윤진 맞잖아. JI센터 선임연구원. 한국대학교 화학과.
“…아닌데요.”
막상 닥치고 보니 거짓말이 술술 잘도 나왔다. 누가 이제 나한테 연기 못하고 거짓말 못 한다고 하면 엉덩이를 걷어차 줘야지.
입술을 꽉 물었다. 대관절 이 새끼가 왜 나에게 전화를 했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따위는 새끼손톱에 일어난 거스름만치도 궁금하지 않았다.
-윤진아.
내 이름 부르지 말라고. 젠장. 짜증 난다고.
-형 그만 놀려. 그렇게 정색하면 무섭잖아.
“누가 동생이죠? 다시 말하지만 저는 그쪽 모른다니까요?”
-나는 널 아는데?
“잘못 알고 계신 거겠죠.”
-아닌 것 같은데.
“이보세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화가 복받쳐 올라 큰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실수해 버렸다.
흥분을 가라앉히려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태준 씨라고 하셨죠. 계속 말씀드리지만 제가 아는 이름 중에 김태준이라는 사람은 없네요.”
-박윤진. 혹시 너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거야? 나랑 이야기하기 싫어서?
“어떻게 생각하든 그쪽 마음이고요. 어쨌건 다시는 이쪽으로 연락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잠깐.
“이만 끊겠습니다.”
대답을 들으면 안 될 것 같아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고도 제대로 끊긴 건지 확인하려 몇 번이고 액정을 켰다가 껐다를 반복했다.
“아….”
심장이 쥐어짜는 것처럼 아프고 눈알이 빠질 것 같이 욱신거렸다. 감기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닫으니 온 얼굴이 떨리는 것처럼 웅웅거렸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답답한 가슴 속은 뚫리지 않았다.
미친 새끼.
지가 뭔데 그 더러운 손가락으로 내 번호를 눌러. 사람 놀려 먹는 것도 한두 번이지 왜 가만히 있는 나를 자꾸 들쑤셔서 심란하게 하는데.
“젠장.”
아무도 없으니 이 정도 욕은 괜찮겠지.
더한 욕을 하며 발길질이라도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았지만 대낮의 탁 트인 공원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미친놈이라고 신고당할 게 뻔해서 참았다.
답답해서 가슴을 두드렸다. 그 두드림에 화답이라도 하듯 다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전화였다면 던져 버리려 했는데 다행히 문자였다. 확인하고 싶지 않았지만, 혹시 시훈일지도 몰라 마지못해 휴대폰을 들었다.
010–XXXX-1230
윤진아. 많이 당황했을 거 알아. 하지만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그러니까 피하지만 말고 기회를 줘.
젠장할 놈이 뭐라는 거야. 어금니를 악물며 차단 버튼에 손을 가져갔다. 그때 기다리라는 듯 또 다른 메시지 한 개가 화면 위로 떠 올랐다.
010–XXXX-1230
혹시 마주치게 되더라도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보는데 당황한 모습은 보고 싶지 않네.
이따 보자.
의미심장한 문자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한참이나 휴대폰을 들여다보았지만, 말풍선은 올라가지 않은 그대로였다. …이따 보자고? 그 새끼와 내가 다시 볼 일이 남아 있었던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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