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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19화 (19/85)

19화

“세미나에서 바람 현장 목격이라니. 성재 씨 속 좀 끓였겠는걸.”

“매번 이렇게 끝나니까 이제는 체념하게 돼요. 역시 저는 연애와는 거리가 먼 인간상인가 봅니다.”

“무슨 소리야. 상대방 운이 없어서 잘 안 되었던 거지. 성재 씨가 자책할 필요 없어.”

“자책하고 싶지 않아도 상황이 자꾸 그렇게 만드네요. 좀 잘 되어 간다 싶으면 질린다고 떠나버리니까….”

“어렵네….”

세상 심각하게 미간을 구기는 두 사람. 그사이에 낀 나는 이미 다 마셔서 얼음밖에 남지 않은 커피잔을 빨대로 쪽쪽 빨았다. 당연히 미적지근한 물만 찔끔찔끔 입 속으로 들어왔다.

미팅은 무슨 개뿔. 기껏 발걸음했더니 한다는 이야기가 하도 똑같아서 눈 감고도 외울 수 있는 성재 씨의 NN번째 연애사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욕 들어 먹는 한이 있더라도 연구소로 들어갔거나 집으로 도망갔어야 했다.

“저기….”

“윤진아. 넌 알고 있었어?”

“…뭘.”

“성재 씨 이번에도 환승 이별 당한 거.”

“…홍 박사님. 그걸 그렇게 크게 말씀하시면 어떡합니까.”

아니. 몰랐어. 알고 싶지도 않고. 김태준 일로 심란해서 눈도 뻐근하고 머리도 깨질 것 같은데 제발 나 좀 가만두면 안 되겠니?

다 떠든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요… 염원을 가득 담아 홍 박사를 바라보았지만, 이 새끼는 동료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아예 성재 씨 쪽으로 돌아앉아서 이미 지나간 자의 신상을 캐기 시작했다.

“그래서, 예뻐?”

“아뇨. 그냥 평범했습니다….”

“사진 없어? 얼굴이나 좀 보자.”

“다 지나갔는데 봐서 뭐 하시려고요… 됐습니다.”

“아! 뭐야. 재미없게.”

아니, 이제 알아서 뭐 하려고? 지가 꼬시기라고 하려고 저러나.

“홍박. 아무래도 난 필요 없는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나 볼게.”

“넌 성재 씨가 남이야? 진득하게 앉아 있는 게 뭐 그리 힘들다고 징징거려.”

“징징이 아니라…. 진짜. 진짜 피곤해서 그래.”

“안 돼. 이것도 사회생활이야. 앉아 있어.”

항상 이런 식이다. 동갑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종종… 아니 자주… 아니 거의 홍 박사의 사적인 모임에 끌려다녀야만 했다. 친목 도모라는 거창한 핑계를 대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혼자 농땡이 치기 뭣하니 만만한 나를 끌고 다니는 게 분명했다.

홍 박사는 권시훈 저리 가라급의 미친 사교성을 자랑했다. 반면 나는 엄청나게 낯을 가리는 편이라 시훈을 제외한 다른 사람을 만나는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그나마 홍 박사 밑에서 일하고 있는 성재 씨를 포함한 몇몇 연구원들과 어울리기는 하지만 그것도 오래는 싫다. 특히나 오늘같이 기분이 더러울 때는 더.

그.런.데 이 새끼는 내가 혼자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으니 불쌍해 보인다, 아싸 같다고 세뇌시키며 자체 격리 중인 나를 자꾸 밖으로 이끈다. 저건 날 오래 알았으면서 어떻게 보면 가장 나를 모르는 것 같아. 아니면 그냥 눈치 없는 척하며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려 하는 것이거나. 젠장.

“다 마셨냐?”

“어? 어….”

“웬일이야? 박윤진. 뭐 속 끓는 일이라도 있어? 차가운 거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원샷을 때렸네?”

“…피곤해서 그래.”

“넌 어떻게 된 게 맨날 피곤하대. 세상 일은 혼자 다 하냐?”

“미친… 욕 나오게 할래? 난 지금 이렇게 나와 있는 것부터 피곤이고 스트레스라고.”

김태준 때문에 기분이 거지 같다고 말해버릴까 하다, 바늘구멍만큼 좁은 이 바닥에서 매장당하면 어쩌지 싶어 꾹 참았다. 하지만 홍 박사는 심란한 내 속 따위는 전혀 관심 없는지 자꾸만 복장 뒤집는 소리를 시전했다.

“짜게 굴지 말고 성재 씨 이야기 잘 좀 들어봐. 네가 여기서 연애 제일 오래 했으니 문제점도 더 잘 보일 거 아냐.”

“연애 오래 한 거랑 연애 상담은 다르거든. 그리고 나는 권시훈이 처음이라 비교군이 없어서 물어도 잘 몰라….”

“아. 그렇지. 넌 시훈 씨가 처음이지.”

“그래도 윤진 박사님은 단타 연애만 하는 우리보다야 낫잖아요. 안정적인 연애 하고 싶어도 방법을 모르니 답답합니다. 정말.”

내 어금니 건강이 걱정되었는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성재 씨가 다급히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성재 씨를 한 번 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간만에 입 좀 털어보려 했는데 여기서 싸움이라도 났다가는 성재 씨에게 민폐일 테니 한 번 더 참아야지 생각했다.

“아, 뭘 모르네.”

이대로 대화 주제가 옮겨갔다면 좋았을 텐데, 눈치 없는 홍씨는 기어코 나와 성재 씨의 노력에 초를 치고 말았다.

“자고로 연애란 말야. 안정보다는 스파크지. 상대가 나한테 홀딱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게 짜릿하지 않아?”

“그건 뭐 쉽습니까?”

“뭐가 어려워? 뜨거운 밤을 선사해서 자나 깨나 내 생각만 나게 만들면 되잖아!”

정말이지 기가 찬다. 명색이 박사라는 놈의 머릿속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고작 뜨밤이라니.

성재 씨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제 상사를 향해 환멸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박사님. 좀 더 건설적인 계획은 없는 겁니까?”

“성재 씨. 으른의 사랑에 뜨거운 밤이야말로 필수 불가결한 요소 아니야?”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오! 재미없네. 윤진아! 네 생각은 어떠냐?”

“몰라.”

알아도 모르는 척하고 싶으니까 제발 그 입 좀 다물어라.

“박윤진 쟨 연애를 7년을 넘게 해 놓고도 너무 고루한 게 문제야. 조선 시대 규수도 너보다는 개방적이었을 거야. 시훈 씨가 아직도 널 좋다고 하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미친놈… 이딴 저급 도발에 넘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내 애인을 걸고 들어오니 다 싫어서 손을 휘휘 저어 보이니 녀석의 눈이 가늘게 뜨인다.

“내버려 둬.”

“너 오늘 좀 이상하다?”

“내가 뭐.”

“너, 혹시… 설마.”

“아! 뭐!”

“사실 엄청 욕구불만 아니야?”

너는 박사가 아니라 점집을 했으면 더 잘나갔을 듯.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 이유는 지금 학교에서 수업받고 있는 권시훈도 알고 있을 것 같지만, 이 악물고 모른 척 되물었다.

“너 평소를 생각해 봐라. 내가 뭔 말을 해도 심드렁하고 무덤덤하고 그야말로 숨만 쉬는 목석이었잖아.”

“…….”

“그런데 오늘따라 별거 아닌 거에 정색하고 성질내고. 이거야말로 전형적인 욕구불만 증상 아니야?”

그건 그렇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보면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 버려, 나는 본의 아니게 말을 아끼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덕분에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늘 목석같다고 놀려대었다. 그마저도 반박이 늦어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고.

“…몰라.”

“부끄러워하지 마. 박윤진도 사람이네.”

그럼, 사람이지. 정말 로봇이라도 되는 줄 알았니. 내가 무생물이면 우리 시훈이는 누구랑 붙어먹으라고. 힘 빠져. 더 이상은 못 있겠다. 역시나 의미 없는 잡담은 역시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술이고 나발이고 뭐고 얼른 집에 돌아가서 맥주 한잔 까고 시훈이랑 노닥거리다 자고 싶다.

“…잡담 다 했으면 이만 일어나자. 나 정리할 거 남아서 다시 들어가 봐야 해.”

급격히 기분이 다운된 내가 어깨를 늘어트리며 말하자 홍 박사가 곤란한 기색을 보인다.

“어? 지금?”

“그럼 언제 가려고 했는데.”

“안 돼. 우리 오늘 술 마시기로 했잖아!”

“…기력이 달려서 안 되겠어. 마시려면 성재 씨랑 둘이 마셔.”

“아, 안 된다고! 너 이번에 까면….”

“일곱 번째지?”

“아, 안 돼. 안 돼. 이따 다른 연구소 사람 오기로 했어!”

“그럼 그 사람이랑 셋이 놀아.”

“그 사람이 너 만나고 싶다고 일부러 일정 뺀 거란 말이야!”

정말 가지가지 하네. 근무 중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를 악물고 홍 박사를 노려보았지만 이미 면역이 된 지 오래라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이건 좀 아닌데? 나한테 미리 말도 안 하고 사람을 불러?”

“네가 외부인 만나는 자리마다 도망 다니는데, 내 면 세우려면 좀 치사해져야지 별수 있냐?”

“아! 그냥 솔직하게 말해! 내 법인카드로 술 먹고 싶으니까 나 끼워 팔려는 거잖아!”

하얗다 못해 투명한 저 머릿속을 내가 모를 줄 알고. 입을 툭 내밀며 홍 박사를 째려보자 슬그머니 눈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허헛! 자! 이제 일어나 볼까!!”

“난 분명 안 간다고 했다….”

“그럼 결제만 해 주고 가. 아니다. 그냥 카드를 줄래? 너 어차피 한도 한참 남았잖아. 응? 제발. 박박. 윤진아~”

차라리 날 쏴 죽여라. 이 미친 새끼야….

“카드 주는 건 안 돼. 너 저번에도 술 먹고 잊어버려서 나만 독박 썼잖아.”

도망가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망한 것 같다. 진작 눈치채고 이 자리에 오면 안 되었는데 내 생각이 짧았네. 짧았어.

“오. 그럼 같이 가면 되겠네. 그치. 성재 씨?”

“윤진 박사님 힘드시면 굳이 오늘일 필요는 없는데….”

“아! 정말 안 도와주네! 아니야. 넌 이미 내 덫에 걸려들었어. 싫어도 가는 거야! 알았어?”

“…….”

저 술에 미친 맹수의 덫에서 벗어날 방법은 애석하게도 없는 듯싶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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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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