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결국 과음하고 말았다.
절대, 절대 내가 마시고 싶어서 마신 게 아니라 건수 제대로 잡은 홍 박사 저 새끼가 나를 놀려 먹으려 드릉드릉하는 꼴이 보기 싫어 악에 받쳐서 마신 거다. 거기에 김태준이 내 속을 다 뒤집어 놓은 것도 심하게 한몫했고, 결정적으로 카페를 나서기 직전에 받은 오형석으로부터의 메시지가 어지러운 속에 불을 질러 버렸다.
오형석
박사님~ 전화 안 받으셔서 메시지 드려요~ 치료제 임상 들어가려고 하는데 시훈 씨와 협의 되셨으면 원하시는 일정 잡아서 알려 주세요.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날아갈 듯 기뻐해야 하는 게 맞았다. 자진모리장단에 맞춰 탭댄스를 춰야 마땅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꺼림칙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이것은 권시훈의 연인으로서가 아닌 과학자로서의 어떤 ‘촉’이었다. 무언가 쉽게 풀릴 것 같으면서도 계속 꼬일 것만 같은 예감.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시훈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치료는 받는 게 맞았으니 고민은 사치일지도 몰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김태준 때문에 개 같았던 하루를 보상받았다고 생각하고 좋게 넘겨야지.
그렇지만, 계속 속에서 심란함이 올라오는 바람에 배 속에 계속 술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야. 박윤진. 너 취했지?”
“아니거드은?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거든?”
“아니야. 내가 봤을 때 넌 취해써! 확실해.”
어이가 없으니 실소도 나오지 않았다. 개소리도 작작해야 웃지. 눈알까지 시뻘게져서 혀는 다 꼬부라지고 누가 봐도 지가 취했구만. 내가 어디 가서 술로는 져 본 적이 없는데 어디 멸치 같은 새끼가 이 몸을 이기려 들어.
“너 거울 좀 보고 와라. 애 같은 게 소주에 퉁퉁 부어 가지고 무슨 빵떡 같다.”
“빵… 미친. 이젠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네.”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입에 밀어 넣으며 다정한 욕설을 뱉어주었다. 아, 그런데 고기가 좀 쓰네? 술이 과해서 혀가 마비되기라도 했나?
우리는 지금 어딘가의 고깃집에 와 있다. 아마도. 맞을 것이다. 목적이 오로지 내 카드로 마시는 술이었던 홍 박사가 우물쭈물 망설이는 나를 잡아끌어다 앉혀서 냅다 술병을 입에 꽂는 바람에 가게 이름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역시나 연구원 미팅은 개구라였다. 당연했다. 어느 미친놈이 퇴근 후에 일 이야기를 또 하고 싶을까. 이쯤이면 나도 알면서 그냥 속아준 거다.
“간만에 재밌지 않냐?”
“아니? 개노잼인데?”
“내가 보기엔 너 오늘 신났어. 내가 알지.”
“뭐 신나. 진짜 억지로 마지못해 꾸역꾸역 앉아 있는 거거든?”
“아닌데? 너 지금 완전 신나 보이는데?”
…….
좀 모른 척해 주지. 굳이 굳이 들쑤셔야 후련하겠냐. 눈치 없는 새끼.
사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대로 연구소에 돌아갔다면 오형석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치료제 안정성 검증을 해내라며 닦달했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김태준으로부터 온 문자를 붙잡고 골머리 썩고 있을 게 뻔했다.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면서.
시훈의 말대로 불상사가 생긴 이래 사적으로 누군가를 만난 적이 없는지라 내심 풀어낼 곳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시시껄렁한 잡담이 이리도 정신건강에 이로운 줄은 몰랐다. 근 두 달간 가슴 어딘가가 콱 막힌 것처럼 답답했는데, 상사 욕, 회사 욕, 크고 두꺼운 기둥 이야기 같은 걸로 속없이 깔깔대니 응어리진 것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윤진 박사님. 우리 자주 봐요. 같은 연구소 다니면서도 얼굴 보기 힘드니까 가끔 마주치면 낯설어요.”
“아… 그 정도인가요. 죄송합니다. 요새 정신이 없어서.”
“아, 아뇨. 시무룩해하실 것까지야… 제가 말을 잘못한 것 같네요. 다른 게 아니라 안 보이시니까 걱정되기도 하고 그래서.”
성재 씨의 말에 무안해져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누구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성재 씨가 서운한 티를 내다니. 나 좀 심했었구나.
“야! 그러게 누가 도망 다니래? 우리가 널 맨날 부르냐? 어쩌다가 가~끔. 가끔 놀아달라는 걸 무시해. 왜에. 어?”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만큼은 절대 미안해하지 않을 거다.”
“무으? 말하는 싸가지 봐라아?”
“싸가지?”
눈치를 밥 말아 먹은 홍 박사의 발언에 훈훈했던 분위기가 단번에 험악하게 바뀌었다.
그런데 이게 왜 성질을 긁을까. 술기운 때문인지 갑자기 울컥 화가 솟구쳐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대었지만, 이미 취한 정신이 눈치챌 리가 없었다.
“홍 박사님. 좀 진정하세요. 따지고 보면 윤진 박사님 잘못은 없잖아요. 사정 있는 거야 어쩔 수 없는 거고.”
“와… 성재 씨. 지금 박박 편들어? 우리 같이 일한 세월이 얼만데 나를 이렇게 버리는 거야?”
“두 분 성격 제가 잘 아니까 말리는 겁니다.”
“이씨….”
그 흐름을 끊은 것은 역시나 이 일행 중에 남은 유일한 이성인 성재 씨였다. 불붙던 논쟁에 찬물이 끼얹어지자 홍 박사는 입을 쑥 내밀었다. 나도 짜증은 났지만, 더 입 대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저, 그런데 윤진 박사님.”
입을 놀리지 않으니 술기운이 올라와 멍해지고 있던 찰나에 성재 씨가 날 불렀다. 나는 퍼뜩 놀라 허리를 세웠다.
“네?”
“시훈 씨한테 연락해야 하지 않아요? 시간 많이 늦었어요. 걱정할 것 같은데.”
“아아. 시훈이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휴대폰을 어디 두었더라.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보았지만 잡히는 게 없어 당황했다. 그런데 테이블 위에 떡하니 올려져 있었다. 괜히 무안해져 액정을 톡톡 두드렸다. 역시나 연락이 없다. 이야기해 두었으니 내가 먼저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나 보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긴 해요. 우리가 박사님 너무 붙잡아 두었다고 혼날 것 같은데 괜찮으려나.”
“에이~ 아니에요. 우리 시훈이가 얼마나 관대한데.”
“…네?”
“봐요. 여태 문자 한 통 없다니까? 이 얼마나 믿음과 신뢰가 가득한 연인관계입니까?”
나도 모르게 흥분해 버려 휴대폰을 성재 씨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당황한 성재 씨는 나와 휴대폰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허허 웃었다.
“하하. 네… 그러네요. 웬일이지. 그럴 리가 없는데….”
“네?”
“아, 아닙니다.”
성재 씨는 영 꺼림칙한 얼굴이었지만 할 말이 떨어졌는지 입을 다물었다.
맞다니까 왜 저럴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권시훈이라면 이 시간까지 외간 남자와 술을 마시고 있다 하면 당장 쫓아오고 남을 것 같지만, 의외로 이런 일 - 회사 사람들과의 교류 - 에는 아주 쿨한 면모를 보인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건지, 그냥 그런 척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애인의 사회생활을 배려해 주는 내 남친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멋져.
“생각난 김에 전화해 봐야지.”
그길로 시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액정위로 [내 강아지]라는 글자가 떠오르자 절로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도 주책이지. 7년 만난 애인 목소리를 들을 생각에 이리도 가슴이 두근거릴 일인가. 술 때문일까. 아니면 오늘 기분이 유난히 좋아서 그런 건가.
귀를 가져다 대니 도로롱 도도롱 통화 대기음이 들려왔다. 으음. 눈앞이 아주 약간 어질거리는 것 같지만 잠깐 이러다 말겠지.
-응. 자기야.
“우웅. 나야아.”
-…목소리가 왜 그래? 취했어?
분명 지금 권시훈은 아기이니까, 아기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내 귀에는 어른 권시훈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 아, 설마 벌써 치료제를 먹어버린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지.
“으응. 아니. 조금 마셨어.”
-…조금 마신 게 아닌데?
“아니야. 진짜 조금 마셨는데?”
-거짓말하네.
얼마 만에 듣는 진짜 권시훈 목소리니. 정말. 감격에 겨워 기분이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아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입이 내 멋대로 움직였다.
“자기 목소리는 달콤해.”
-뭐?
“시훈아. 보고 싶다아. 빨리 돌아와아. 진짜 네가 없으니까 미쳐버리겠어.”
술김이라 그런지 속에 있는 말이 마구 튀어나왔다. 시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침묵마저 사랑스러워 헤죽헤죽 웃으며 나는 홍 박사와 성재 씨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두 사람의 낯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왜! 너무 부러워서 토할 것 같냐? 좋아서 좋다고 하는 건데 내가 뭘 어쨌다고. 억울하면 너희도 연애하든가.
-자기야.
“응?”
-…얼마나 마셨냐고 물었다.
눈앞에 보이는 소주병만 10병 남짓. 맥주병은 발아래 두어서 추산 불가능. 안주는… 과거 고기였던 어떤 것.
“아, 몰라몰라몰라아. 나두 몰라아. 많이 안 마셨다니까 왜 내 말 안 들어. 자기 나 못 믿어?”
-혹시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알아도 모른 척할래!”
-…….
수화기 너머의 시훈은 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찔려서 곁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열 테이블도 되지 않는 좁은 가게에 우리만 남아 있는 것 보니 꽤 시간이 지난 것 같긴 한데… 뭐 그렇다고 얼마나 지났겠어?
-하아.
잠시 후 들려오는 낮은 한숨 소리.
-자기야.
그리고 땅굴을 파고 들어갈 듯 가라앉은 시훈의 목소리.
순간 오한이 드는 것 같아 어깨를 흠칫 떨었다. 어마무시한 불안함이 등 뒤로 엄습했지만 애써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니야. 우리 자기는 성공한 사회인으로서 나의 사회생활을 배려해 주는 참 어른이라고.
“으응…?”
그런데 내 마음과는 다르게 내 목소리는 한겨울 모기처럼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절로 허리가 바로 세워지고 두 손은 휴대폰을 공손히 붙잡았다.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야.
-재미있게 놀았어?
“어, 어?”
-재미있었나 보네?
“재… 재미는 있지.”
-아, 다행이네.
춥다. 아까까진 더워서 웃통이라도 까고 싶었는데 갑자기 한파라도 온 걸까.
-지금 어디야.
“어?”
-어디냐고.
“어… 여기가 어디냐며언.”
방금까지만 해도 ‘그냥 이름 모를 고깃집’이었는데, 시훈의 어디냐는 한마디에 젓가락 포장지에 적힌 가게 이름이 눈에 들어와 보이는 대로 읽어주었다.
-알았어.
어? 이상한데?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는 것 같은데 쉽사리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 알코올에 절여져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드륵드륵 굴렸다.
난 술을 마셨고 → 술김에 시훈에게 전화를 했고 → 시훈은 내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았고 → 나는 대답을 했고 → 시훈은 알았다고 했다.
“헉.”
그제야 내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깨닫고는 다급히 수화기를 붙들었다.
“시훈아. 너 혹시 여기 오려고?”
-거기서 계속 술 마시고 있다 보면 알겠네.
미쳤어?? 지금 술 취한 서른두 살 애인 데리러 초딩이 출동한다는 거야?
“어어. 아니야. 아니야! 오지 마. 금방 들어갈 거야! 진짜! 나 지금 갈까? 간다? 어?”
우다다다타타탕!
너무 다급하게 일어났는지 동그란 의자가 시멘트 바닥에 볼썽사납게 나뒹굴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 손으로 휴대폰을 붙들고 다른 손으로 더듬더듬 내 짐을 찾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내 앞에 앉아 있던 홍 박사와 성재 씨도 덩달아 분주히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젠장, 어디 갔는지 가방이고 뭐고 잡히질 않는다. 어디 갔냐고!! 나 가야 한다고!
“자기야. 기다려. 나 금방 가니까. 오지 마. 응?”
-자기야.
목소리만으로도 모든 것을 얼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아시나요. 그게 바로 제 애인이랍니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살벌한 기운이 엄습했다.
-내가 봐주고 있다는 생각해 본 적 없지.
“무슨 소리야….”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오늘은 꼭 기억 붙들고 있어야 한다.
뚝, 그렇게 전화는 끊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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