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쪽같은 내 남친-21화 (21/85)

21화

“…시훈 씨지?”

응. 맞는데, 네가 아는 그 시훈 씨는 아니고… 조금 귀여운데 무서운 초딩이랄까.

“박사님. 그러게, 미리 연락 좀 해 주시지. 시훈 씨 술자리에서 연락 안 되는 거 진짜 싫어하잖아요.”

“…성재 씨가 그걸 어떻게 아세요.”

“왜 몰라요. 박사님 회식 때마다 연락 안 되니까 시훈 씨가 매번 저한테 전화하는데.”

“그랬…어요?”

“박사님은 기억 못 하시는군요.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네. 알고 싶지 않네요.

역시나 권시훈은 쿨한 게 아니었다. 그냥 오늘 하루 잠시 잠깐 쿨했던 권시훈만 기억하고 ‘우리 애인 개멋져♥’라고 나 혼자 넘겨짚은 것뿐이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기억 조작이라는 거구나.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로 검게 변한 액정만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엄한 시간만 죽였다.

“성재 씨. 지금에라도 파하고 시훈 씨 오기 전에 도망갈까? 그러면 우리는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그럴까요?”

“그래. 그게 좋겠다. 얼른 짐 챙겨.”

시훈이 들이닥칠 것이라는 비보는 두 남자를 공포에 떨게 하기 충분했다. 그동안 내가 꽐라가 된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궁금했지만 들어봤자 공포감만 더 조성하는 꼴이 될까 봐 입 닫고 자리에 앉아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윤진아. 의리 없다 생각하지 마라. 알았지?”

“…진짜 가겠다고? 나만 여기 두고?”

“아오. 그럼 어떻게 해. 시훈 씨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그래? 술자리에 너 데리러 올 때마다 항상 분노 수치 맥시멈이었다고. 입은 웃고 있는데 눈으로 뚜드려 맞는 기분이 얼마나 드러운 줄 아냐?”

“몰라….”

“솔직히 네가 진상 짓만 덜 했어도 덜 무서웠을 것 같긴 하다.”

“진상을 부려? 너 내가 기억 못 한다고 거짓말하는 건 아니지?”

“와. 너 정말 기억 안 나? 울며불며 바닥 굴러다니고, 병나발 불고, 테이블 때리면서 노래 부르고 또….”

“아, 됐어. 됐어. 그만!”

기억 안 나. 안 난다고. 기억나더라도 절대 아는 척하지 않을 테다. 더 들었다가는 후회만 남을 것 같아 손사래를 치며 홍 박사의 말을 끊었다.

나는 여태 내가 주사라고는 1도 없는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 아니, 예전에는 있었지만 권시훈과 만나면서 싹 고쳤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늘 눈 뜨면 집이었고 시훈에게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고개를 저을 뿐 일언반구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사람 하나 잘 만나서 개과천선했다고 혼자 얼마나 뿌듯해했는지 모른다.

‘자기야. 나 어제… 무슨 실수 같은 거 하지 않았어?’

‘응. 그런 거 안 했어. 우리 자기는 술 먹으면 항상 곱게 씻고 곱게 침대에 누워서 예쁘게 자.’

‘…진짜?’

‘응. 당연하지.’

‘말하는 게 영… 꺼림칙하게 말하는데.’

‘에이. 속고만 살았나. 난 자기에게 언제나 솔직하잖아. 그치?’

‘…그런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자자. 그만 말하고 꿀물 마시자. 밤새 얼마나 속이 쓰렸을까? 고생했어. 자기야.’

오히려 더 살뜰하게 나를 챙겼으면 챙겼지, 혼난 적은 없었다.

불현듯 ‘내가 봐주고 있다는 생각해 본 적 없지.’라는 말의 의미가 권시훈이 보내는 마지막 경고였다는 사실을 깨달아 버려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동안 내 진상을 보고도 모르는 척 넘어가 주느라 얼마나 속이 끓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드르렁 뻗어 있는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를 갈아대느라 어금니가 다 닳아 없어졌을 듯.

이쯤 되니 정말 무서워졌다. 화난 권시훈은 상상 속에서라도 만나고 싶지 않다. 이를 어쩌지. 완전 개빡친 것 같은데. 마음 같아서는 병나발 불고 기절해버리고 싶었지만 더 이상 취했다가는 집에 돌아가서 찬물 세례를 받고 반 가사 상태로 밤새 시달릴 것 같아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음주 욕구를 참아내었다.

“시훈 씨는 연락 없…지?”

답답하고 답답해 땅을 꺼트릴 기세로 한숨만 쉬고 있는데 홍 박사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 없다. 지금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오고 있을 텐데 연락할 새가 있겠냐??”

“응. 그러네… 그런데 왜 뛰어와?”

“뭐?”

“차 안 가지고 오신대?”

“차 안 가지고 오면 안 되는 거였어?”

“아니, 혼날 거 다 혼나면 좀 바래다 달라고 할까 싶었지….”

“미친. 양심은 전당포에 팔아먹었냐? 전당포에서도 너무 싸구려라 꺼지라 하겠네.”

“말이 심하다. 야….”

너는 틀려먹었어. 친구 머리털이 뜯기든 말든, 귀가 잡히든 말든, 네 몸만 편하면 된다 이거지. 짜증 나서 젓가락 포장지로 예쁘게 접어놓은 딱지를 홍 박사에게 집어 던졌다. 아픈 건 아는지 아얏 아얏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친다.

“어후….”

테이블 위에 아무도 손대지 않은 동글동글한 콩자반이 눈에 들어왔다. 까맣고 동그랗고 반짝이는 게 꼭 꼬마 시훈이 머리통 같다. 한 알 집어 입 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이렇게라도 초조한 마음이 달래지길 바라며.

그때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늦었죠.”

정확히 내 입속으로 열두 개의 콩자반이 들어갔을 때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술기운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단정하고 낮은 톤의 음성. 아쉽게도 권시훈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어! 이제 오십니까.”

다른 일행일 거라 여기고 무시하려 했는데 여태 낑낑대고 있던 홍 박사가 대뜸 남자에게 아는 척을 했다.

“어휴~ 이렇게 뵈니까 너무 반갑네요!!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안 오시는 줄 알고 자리 파할까,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까 하고 있었는데 마침 타이밍이 맞았네요.”

“많이 기다리셨나요. 회의가 생각보다 늦게 마쳐서 뒷정리하고 나온다고 늦어졌습니다.”

“아닙니다. 이제라도 오셨으니 다행이죠.”

누구지? 낯선 사람의 등장에 젓가락을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그러다 낮에 말했던 ‘다른 연구소 사람’이 들른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다시 심드렁하게 콩자반을 뒤적였다.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온 것 보면 꽤 안면이 있는 사이인 모양인가보다.

그런데 타이밍이 영 좋지 않네. 곧 있으면 무서운 초딩 때문에 분위기 살벌해질 텐데. 지금에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가는 게 나을지도.

“자리 괜찮으시겠습니까? 불편하지는 않으시겠어요?”

“네. 괜찮습니다.”

“여기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내 속을 알 리 없는 남자는 내 옆을 홀연히 지나 빈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더운 공기를 타고 묵직한 향수 냄새가 찐득하게 피부에 달라붙었다.

연구원이 무슨 향수를 이렇게 독한 걸 뿌린대. 그것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향이야. 마음속으로 연구원의 기본소양을 주억거리며 얼굴도 보지 않은 남자를 비호감 카테고리에 집어넣었다.

“시간 늦었는데 식사는 하셨어요?”

“아, 아직입니다.”

“저런. 자리가 지저분한데 정리하고 뭐 좀 더 시킬까요?”

“괜찮습니다.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이는데요.”

때아닌 불청객이 못마땅했지만 나는 자랑스러운 사회인이기 때문에 불편함을 무릅쓰고 인사를 건네려 흘긋 눈을 돌렸다. 하지만 남자는 나에게 등을 진 채였다.

나는 성숙한 사회인이 맞았지만, 굳이 이야기 중인 사람을 돌려세워 인사할 만큼 뻔뻔스럽지는 못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당장 일어날 수도 없으니 인사는 좀 늦어도 상관없겠지.

“혹시 차 가지고 오셨나요? 없으시면 돌아갈 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 이를 어쩌죠. 제가 금방 일어나봐야 해서요.”

“그러면 댁에는 어떻게….”

“기사님이 밖에서 대기하고 계십니다.”

간사한 새끼. 방금 권시훈 차에 얻어탈 생각이나 하고 있더니, 어려운 사람 행차하셨다고 모셔다주네, 마네 소리가 나오네. 지는 차도 없으면서.

“아이고. 아쉽네요. 날을 다른 날로 잡을 걸 그랬나 봅니다.”

“그럴 필요 있나요. 오늘 뵙고 다음에도 또 뵈면 되죠.”

“그래도 대접하는 입장에서는 죄송스러워서요. 누추한 자리에 모신 것도 민망한데 금방 일어나셔야 한다니.”

“제 일정 때문에 미뤄진걸요. 박사님께서 마음 쓰실 필요 없습니다.”

“역시 멋지십니다! 한 잔 받으십시오!”

“아, 네.”

홍 박사는 외부인을 만나면 사람 좋은 척하며 어떻게든 그들에게 잘 보이려 애썼다. 특히 높은 사람일수록 더. 뼛속까지 아싸인 나는 낯선 사람이 왔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 자리가 불편해져 버렸는데 저 녀석은 물 만난 물고기가 따로 없었다.

“이야… 진짜 지난번에 도와주신 덕에 살았습니다. 전무님 아니었으면 이번 프로젝트 망할 뻔했지 뭡니까.”

“저야말로 감사한 일이죠. 협업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닌데 선뜻 수락해 주셔서 한시름 놓았습니다.”

“요새 누가 단독으로 과제 잡습니까~ 다~ 상부상조 도와가면서 하는 미덕이 있어야죠.”

분수에도 안 맞는 빡센 과제 맡아서 중도 포기할 뻔한 걸 도움받아 겨우 마쳤다더니 저 사람이 그 도움의 주인공이었구나. 꽤 뒷배 있는 인물이겠구나 싶었는데 전무라니. 생각보다 엄청난 거물을 물었네.

“하하.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남자는 ‘접대의 정석’이라고 보고 온 듯 입에 발린 소리를 잘도 했다. 그 말에 속없는 저 새끼는 좋다고 허허 웃는다.

피곤해. 슬슬 술이 깨려는지 눈자위가 욱신거린다.

그냥 시훈이한테 내가 지금 나간다고 해 볼까. 아니다. 아까 꼼짝 말라고 했으니 괜히 말 꺼냈다가는 핑계 댄다며 더 화낼지도 모르겠다. 어른도 아니고 어린이의 몸으로 밤거리를 쏘다니는 것도 위험하고….

“야. 박윤진.”

콩자반 세는 것도 지겨워 깻잎의 잎맥 개수를 세고 있는데 한참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홍 박사가 불쑥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깜짝 놀라 머리를 들고 홍 박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 이분 처음 보지? 이번에 내 연구과제 도움 주셨던 분.”

“아아.”

“따로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굳이 안 받겠다고 하셔서 잠깐 모셨어. 그리고 꼭 너를 만나보고 싶다 하시더라고.”

“나를?”

“인사드려.”

아무리 전무님이라고 하지만 모시느니 어쩌니 너무 떠받는 거 아냐?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의 경어에 의아함을 느끼며 눈을 돌렸다.

그런데.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아, 젠장.”

(다음 편에서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1)============================================================

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