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무례하게도 면전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길을 지나다가 아니, 꿈속에서라도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새끼가 바로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너무 놀라 입조차 뗄 수 없었다. 인연을 끊은 지 10년이 다 되어가니 혹시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더라도 절대 알아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인간은 원래 망각의 동물이라잖아. 그런데 왜 나는 저 새끼가 어제 본 것처럼 낯설지가 않으냐고.
개새끼는 놀랄 만큼 그대로였다. 전봇대처럼 솟은 키에 한여름에도 머리카락까지 올블랙을 고수하는 패션 센스, 길게 뻗은 날카로운 눈매. 심지어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에 낀 반지까지 그대로였다.
[이따 보자.]는 그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저 새끼는 이미 나를 만날 걸 알고 있었던 거다.
“어? 김 전무님이랑 윤진이 두 사람 아는 사이?”
“아….”
“뭐야! 뭐야!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소개시켜준다고 설레발쳤잖아.”
젠장. 기분 거지 같으니까 좀 닥쳐줄래? 눈을 치켜뜨고 홍 박사를 노려보아도 저 새끼는 내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입을 나불거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홍 박사가 나와 김태준의 접점을 찾기엔 힘들었을 테니 뭐라 하지도 못하겠다. 일단 나이 차가 7살이나 나니 같은 학교 출신이라도 함께 대학 생활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기는 어렵겠지. 그게 맞겠지. 그런데 왜 나는 네 면상에 주먹을 꽂고 싶을까.
“그….”
친한 사이도 아니고, 소개받고 싶은 마음도 없다 말하려 입을 열었는데 기다렸다는 듯 김태준이 재빨리 대답을 가로챘다.
“윤진이랑 저랑 같은 대학 나왔습니다. 과 선후배 사이예요.”
김태준의 말에 홍 박사의 눈이 굴러떨어질 것처럼 커졌다.
“에? 윤진이랑 같은 전공이셨어요?”
“네. 아버님께서 제약회사 물려받으려면 관련 지식은 꼭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셔서… 윤진이가 그때 도움 많이 줬습니다. 같이 공부하면서 정도 많이 들었는데 제가 갑자기 미국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연락 끊겨서 아쉬웠는데 홍 박사님 덕에 이제야 얼굴 보네요.”
“이야. 그런 인연이.”
“사실 오늘 홍주석 박사님 뵙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윤진이 나온다는 이야기 전해 듣고 나니 안 올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동안 어찌나 생각나던지.”
말을 마친 김태준의 눈이 나를 향했다.
“너도 그렇지? 윤진아.”
뻔뻔스럽게 그지없는 김태준의 물음에 어이를 상실해 버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젠장 새끼, 우리가 친했어? 언제부터? 그리고 보고 싶어? 감히 무슨 권리로 그런 말을 해.
“전무님. 정말 멋지십니다. 제 연구 챙겨주실 때도 정 많으신 분이라는 건 느끼고 있었는데 대학 후배를 챙기는 모습까지 보고 나니 제가 다 감동적이네요.”
“하하. 아닙니다. 윤진이랑 연이 닿지 않아 너무 마음 아팠었는데 홍 박사님께서 자리 마련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하핫!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머리끝부터 피가 쭉 빠져나가는 듯 현기증이 일었다. 기절할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니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덩달아 속도 매슥거리기 시작했다.
가식적인 대화가 역겹기 그지없었다. 더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난 먼저 일어나 볼게.”
짐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시에 세 사람의 눈이 내 쪽을 향했다.
“어? 이렇게 갑자기?”
“너무 취했어.”
내가 몸을 일으키자 홍 박사는 곤란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더 설명하고 싶지도, 핑곗거리를 만들어 낼 필요도 없는 것 같아서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있다가. 태준 씨도 이제 막 왔는데.”
“아냐. 취한 사람이 자리 지키고 있는 게 더 민폐지. 조금 있으면 졸 것 같아.”
“그러지 말고… 우리도 금방 들어갈 거야. 어?”
싫다는데 왜 이래. 진짜. 짜증이 솟구쳐 미간을 좁히고 홍 박사를 노려보자 지지 않고 간절하게 나를 올려다본다.
그래도 소용없어. 사회생활을 생각하면 꾹 참고 모른 척 적당히 비위 맞추다가 헤어지는 게 맞겠지만, 지금 나는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문이란 말이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앞에 두고 안줏거리 삼아 떠드는 걸 참고 보는 것은 스무 살 그때만으로도 충분해.
“이야기들 나누세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 야! 박윤진!! 잠깐만!”
“박사님!”
홍 박사와 성재 씨가 동시에 나를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가게를 나섰다. 혹여 누군가 쫓아 나올까 뛰다시피 큰길로 나섰다.
도로는 한산했고, 길은 어두웠다. 하필 달도 구름에 가려진 채였다. 하지만 멈출 수 없어 듬성듬성 서 있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계속해서 앞으로 걸었다.
개자식. 불리한 기억은 싹 잊고 제 좋을 대로 짜 맞추는 더러운 습성까지 그대로였다. 피해자를 앞에 두고 너는 피해자가 아니라고 하는 건 대체 얼마나 이기적이어야 나올 수 있는 생각일까.
“…하아.”
어깨를 짓누르던 긴장이 풀리자 온몸이 미친 듯이 욱신대었고, 꽉 막혀 있던 머릿속에 기다리라던 시훈의 말이 떠올랐다.
아, 어쩌지. 혹시라도 길이 엇갈렸다면 시훈과 그 미친 새끼가 만날 수도 있는데, 그것만은 정말 싫은데.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져 버렸고 돌이킬 수는 없다. 내가 그 자리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지금에라도 시훈에게 연락해야겠다 싶어 주머니를 뒤졌다.
“윤진아!”
막 휴대폰을 꺼내 들려는 찰나였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팔을 거칠게 잡아채는 바람에 그대로 뒤로 넘어갈 뻔했다.
“…!”
휘청 몸이 기울어져 겨우 다리로 바닥을 짚고 중심을 잡아 섰다. 무릎이 웅웅 울려 미간을 좁히고 입술을 깨물었다.
“으으윽.”
아, 어느 매너 없는 새끼가 사람을 뒤에서 잡아채. 머리라도 깨졌으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이를 악물고 잡힌 팔을 내려다보니 두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김태준. 이 새끼가 또.
“이 새끼야! 이거 놔!”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뿌리치자 다급히 손목을 붙잡는다. 저 망할 놈과 내 손이 얼기설기 얽혀버렸다.
“잠깐. 이렇게 가면 어쩌자는 거야. 이야기 정도는 들어 줄 수 있잖아.”
기분 나빠. 잡힌 손목은 지나치게 뜨거웠고, 또 땀에 젖어 축축했다.
“저기요. 죄송한데 제가 그쪽이랑 할 말이 있으려면 아는 사이여야 하는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저씨가 누구신지 모르겠거든요? 그러니까 무식하게 힘으로 어떻게 해 보려 하지 말고 비키시죠.”
“나는 일부러 네 얼굴 보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가겠다고?”
“젠장. 누가 그쪽 얼굴 보고 싶데요? 됐으니까 꺼지라고!”
“하아… 윤진아. 화만 내지 말고 좀. 간만에 봤는데 예쁘게 말하면 안 되겠어? 넌 어떻게 옛날이랑 변한 게 하나도 없냐.”
“예쁘게? 젠장. 여태 그딴 개거지 같은 소리를 듣고도 예쁘게 말이 나오면 그게 정상이야?”
뇌의 혈관들이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이 요동치고 있었다.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무서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뭐가 되었건 간에 내가 기뻐할 일은 아닐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만큼 미안하다 하면 됐잖아. 뭘 더 바라는데.”
“…….”
“윤진아. 내가 너한테 잘못했던 거 다 갚아줄 테니까 이제 그만 나 용서하고 봐주라.”
“…….”
“응? 내가 정말 네가 필요해서 그래.”
필요? 필요라는 말에 잊었던, 잊으려 무진 애를 썼던 기억들이 머릿속에 만개한 듯 펼쳐졌다. 너무도 괴롭고 아파서 다시는 꺼내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하고 깊숙이 묻어두었던 내 인생의 치부를 기어코 당사자가 찾아와 헤집어 놓았다.
너, 너무 나에게 잔인한 거 아니냐.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어.
“이제는 뭐가 또 필요해서? 족보는 아닐 테고, 내가 어디서 연구원으로 벌어 먹고살고 있다니까 그게 또 탐이 나셨어요? 젠장놈아.”
“야. 무슨 말을 그렇게…….”
“아니라고 할 수 있어? 아니면 지금 아니라고 해. 믿어 줄 테니까.”
“…하아.”
맞네. 젠장.
결국 끝까지 김태준은 나를 저 밑까지 끌어내리고 만다. 겨우겨우 기어 올라온 지상에서 빛도 보지 말고 말라 죽으라며.
다 짜증 났다. 사춘기 애새끼도 아니고 감정이 한여름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그 뒤에는 분노와 슬픔, 그리고 상실감 비슷한 감정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개새끼야. 그렇게 날 이용해 먹고 버렸으면 됐지. 무슨 염치로 또 더러운 면상을 들이대. 예전처럼 사탕 물려주고 예쁘다고 해 주면 또 이용당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
“이제 안 속아. 너 따위한테 관심 갈구할 정도로 굶주리지 않았으니까, 내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
“윤진아.”
“…제발. 그만 좀 해.”
족쇄처럼 붙잡힌 손이 욱신거렸다. 고개를 떨구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자 눈물 같은 것이 후드득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김태준은 기다렸다는 듯 제 쪽으로 내 몸을 끌어당겼다.
“뭐야. 이거 안 놔?”
“놓으면 도망갈 거잖아.”
“닿는 것도 싫으니까 떨어지라고!”
“악쓰지 마. 네 힘으로 벗어나지도 못할 거면서.”
“아, 아니야. 싫어. 싫다고. 놔!!”
역겨운 향수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었지만, 미친놈은 어디서 뭘 먹고 온 건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턱이 덜덜 떨리고 눈물이 흘렀다. 경멸을 넘어 공포감이 나를 덮쳐왔다.
제발… 제발. 이러지 마. 무섭다고. 죽을 것 같으니까 제발 그만하라고.
몸부림을 치며 김태준을 밀어내던 그때였다.
“야아아아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매우 다급하고 우렁찬 외침에 시선을 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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