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아.”
사람들이 느릿느릿 오가는 길거리에 무언가가 빠르게 내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다리가 가열차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사람이 틀림없었는데 속도가 가히 마하급이라 초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점점 가까워진다. 어스름하게 보였던 형상이 차츰 제 모습을 드러냈다.
동그란 머리통.
레이저가 뿜어져 나올 것 같은 살벌한 눈빛.
부서질 듯 악문 턱.
꽉 쥐어 터질 것 같은 작은 주먹.
“윤진아아아아!!”
권시훈이었다.
“허얼.”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까.
시훈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짧은 다리를-어른 기준으로- 열심히도 움직이며 이쪽으로 질주해 오고 있었다. 얼마나 뛰었는지 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티셔츠에는 땀이 흥건했다. 분명 갑자기 사라진 나를 찾으러 여기저기 뒤지고 다녔던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부터? 걸어올 거리는 아니었을 텐데?
“야!! 이! 개에새끼이야아아앗!”
감동의 물결도 잠시, 패륜적이고 배덕하기 짝이 없는 시훈의 외침에 나도 김태준도 벙쪄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 나쁜 새끼야아! 우.리 아.빠한테서 떨어져어엇!!”
…?
지금 뭐라고? 아빠? 아버지? DADDY?
너 지금 이 탁 트인 길거리에서 내가 네 아빠라고 공표한 거니?
…그래. 뭐 지금 이 상황에서 시훈이 나에게 아는 척할 수 있는 명분이 많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런데 아빠?
머리를 얻어맞기라도 한 듯 얼떨떨해져 버렸다. 김태준도 나와 같은 심정인지 나를 붙잡은 손에 힘이 슬쩍 풀려 있었다. 오, 개이득.
이때다 싶어 얼른 팔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나 시훈 쪽으로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태준의 눈치가 조금 더 빨랐다.
“아! 이제 그만 좀 해! 사람들 다 쳐다보잖아!”
다시 붙들린 손목을 다른 손으로 붙잡고 억지로 손가락을 떼어내어 보았지만 본드라도 붙여 놓은 듯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뭐야. 박윤진.”
김태준은 제 쪽으로 나를 확 끌어당기고는 버럭 소리쳤다.
“뭐!”
“너, 애 있어?”
“어?”
“저기 뛰어오는 애가 너보고 아빠라는데? 진짜 네 아들 맞아?”
“아, 그게….”
아들이 아닌데 아들은 맞아서 대답하기 애매해졌다. 그렇다고‘사실 쟤는 내 남친인데 사정이 생겨서 애가 되었거든? 그래서 몇 달 전부터 내 아들하고 있어. ^^’라고 고백할 수도 없었다.
내가 우물우물 답을 피하고 있으니 김태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정말 내 팔을 부러뜨리려고 작정했는지 손아귀에 핏줄이 돋아날 정도로 힘을 주었다.
“아!”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김태준은 나를 봐주는 대신 더욱 궁지로 몰아세웠다.
“맞아?”
“그게 그렇게 궁금해??”
“당연한 거 아냐?”
왜? 라고 되물으려다 생각해 보니 김태준은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싶었다. 슬프게도 지금의 나는 부모가 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나이니까.
“…….”
몰라. 어쨌거나 대답 못 해. 대충 네가 눈치껏 때려 맞춰 보든가 개자식아. 나는 입을 닫고 도도도 뛰어오는 시훈 쪽을 바라보았다.
“하. 어이없네. 박윤진이 결혼이라니.”
김태준은 난데없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 이 새끼가 또 뭐라는 거야 싶어 돌아보니 마주 본 눈빛이 서늘했다. 나도 질세라 더욱 눈을 부릅떴다. 그런데 뒤에 이어지는 김태준의 말이 아주 가관이었다.
“말이 돼? 네가 왜? 너 남자 좋아해서 결혼 못 하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애가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젠장.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었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딴 헛소리나 해댈 거면서 내가 보고 싶었고 필요하다고?
“남이사 내가 여자랑 결혼하든, 남자끼리 결혼을 하든, 영혼이랑 결혼하든 무슨 상관이신데요. 왜, 내가 여자랑 애 낳았다고 생각하니까 믿기지 않아? 더러운 새끼. 대가리에 들은 게 그딴 것밖에 없으니 생각하는 것도 더럽지.”
“야. 박윤진. 말 가려서 해라.”
“네가 입조심 안 하는데 나라고 할 필요 있어?”
끝도 없는 입씨름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 진짜 말 많고 사람 지치게 한다.
잡은 거나 놓아주면 혼자 지껄이거나 말거나 면상에 침 뱉어주고 돌아설 텐데 지금 상황에서 시도했다가는 머리채를 잡힐지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권시훈 따라서 격투기라도 배워둘걸.
“야아아아!! 당장 안 떨어져어어어!!”
“으아악!”
퍼억!
말라비틀어진 내 팔목에 애도를 표하고 있을 때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시훈이 김태준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날아들었다.’
시훈은 마치 한 마리의 날다람쥐가 된 듯 몸을 날려 김태준을 덮쳤다. 비록 -나를 제외한- 건장한 성인 남성에게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작은 덩치의 시훈이었지만, 물체에 작용하는 힘 = 물체의 질량 × 가속도라는 뉴턴의 운동 제2 법칙을 충실히 지킨 발차기는 갑작스러운 습격에 미처 대처하지 못한 김태준을 무너트리기 충분했다.
“크윽… 이, 이 녀석이! 너 뭐 하는 짓이야!”
어린놈에게 한 방 먹은 늙은 놈은 가격당한 배를 감싸 쥐고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아프다고 말하긴 쪽팔리고 멀쩡한 척하기엔 너무 아픈 모양이다.
“이 개새… 아니, 아저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뭐? 너는 뭔데 어른한테 발길질이야!”
“나 이 이쁜이 아들이거든요!”
내가 아는 시훈만 해도 벌써 몇 명이야. 30세 영화감독 권시훈, 박윤진 아들 유치원생 박시훈, 이제는 이쁜이 아들? 다음에는 내 증손주라고 하지. 왜.
“…박윤진. 진짜 얘가 네 아들이었어?”
“그건 아저씨가 알 거 없잖아요.”
“뭐야?”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김태준이 나를 바라보았지만, 그냥 어깨를 으쓱해 주고 말았다.
나라도 웬 꼬맹이가 튀어나온다면 김태준처럼 말할 테지만 막상 저 개새끼가 시훈에게 ‘뭐야’라고 말하는 게 꼭 윽박지르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권시훈을 감히 누가 혼내. 혼내도 내가 혼낼 거야. 눈도 재수 없게 뜨지 말고 말도 가려서 하라고.
뭐라 한마디 해 주려고 입을 뗐다. 하지만 시훈이 훨씬 빨랐다.
“아저씨. 싫다는 사람 억지로 붙잡으면 신고당해요!”
절대, 절대로 올망졸망 귀여운 꼬맹이의 입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단어의 향연이었다. 뜻밖의 인물에게 뜻밖의 일침을 맞아 놀란 김태준은 눈을 크게 뜨고 시훈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 밤에 우리 아빠 데려다가 뭐 어쩌라고 그랬어요?? 아저씨 혹시 스토커나 납치범 뭐 이런 거?”
“어, 어?”
“요새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조금만 오해받을 만한 행동해도 경찰서에서 손짓하는 거 몰라요??”
오가는 사람이 적은 거지 아예 없지는 않았다. 다른 말로 하면 듣는 귀가 우리만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땅속에서 겨울잠 자는 다람쥐도 깨울 만큼 우렁찬 목소리로 ‘스토커’, ‘납치범’, ‘범죄자’라는 단어를 거리낌 없이 쏟아 내는 8세 시훈 어린이의 패기에 우리 옆을 지나가는 몇몇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어머. 뭐야. 저 남자 둘이 싸우나 봐.’
‘싸우는 게 아니라 저 아저씨가 고등학생 괴롭히는 거 아냐? 애기 중간에 끼어서 불쌍하다. 어떻게 해.’
‘저거 납치 아니야? 경찰에 신고 안 해도 되려나?’
당연히 체면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김태준 전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저기. 좀 목소리가 큰 것 같은데… 조금만 작게 이야기하면 어떨….”
“왜요? 아~ 정말 찔리는 짓이라도 했나 봐?”
“아, 그게 아니라.”
“아니야? 그러면 이다음 이야기는 경찰서에 가서 해 볼까?”
“아, 야! 그게 아니라니까!”
“우와! 개쩐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 범죄자였네! 나 범죄자 처음 봐! 신기해! 지금 당장 신고해야게따.”
호기로운 서른 살 초딩 권시훈은 휴대폰을 꺼내어 들더니 거침없이 ‘그 번호’를 입력했다.
[112]
미쳤어? 진짜 경찰 부르려고? 불러서 뭘 어쩌게? 설마 진짜 ‘우리 아빠가 지금 납치를 당할 뻔했어요!’라고 할 참이냐??
“아니아니! 잠깐. 꼬마야. 내 말 좀 들어봐.”
“꼬마아?? 나 박시훈이거든욧!”
“아, 그래… 시, 시훈아. 미안하다. 아저씨가 아… 빠를 너무 오래 붙잡아 두고 있었지.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니 어쩔 수 없었어. 미안하다.”
겨우겨우 변명을 주억거리던 김태준이 결국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리자 시훈은 더욱 기세등등해져 목소리를 높였다.
“아저씨 같은 사람이 제일 악질이야. 싫다고 해도 힘으로 사람 찍어 누르고! 신고한다니까 바로 꼬리 내리고!”
“…….”
“하여튼 우리 예쁜이한테 나쁘게 구는 새끼들은 다 불태워 버려야 해!”
…….
짜게 식어버린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애매하게 서 있었다. 편들어 주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썩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내가 성질이 나빠서겠지.
“그래! 오늘은 내가 봐줄게! 다시는 다시 우리 아.빠 앞에 코빼기라도 비치기만 해! 그땐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알았어?”
“…알았다.”
김태준은 여전히 맞은 곳이 아픈지 배를 감싸 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애한테 얻어맞은 걸로도 모자라 길바닥에서 온갖 쪽을 당한 게 억울하고 짜증 났을 테다.
“아빠, 가자!”
멍하니 늘어져 있던 내 손을 붙잡은 시훈은 그 길로 뒤돌아 앞서 걸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아이를 뒤따르며 조용히 보폭을 맞췄다.
김태준은 더 이상 우리를 따라오지 않았다.
“…….”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까지도 시훈은 말이 없었다. 또 어디서 뒤틀린 건지 굳게 다물린 입매가 도통 풀어질 것 같지 않았다.
“시훈아.”
“…….”
“시훈아아.”
대답이 없으니 안달이 나, 시훈의 손을 잡아당기며 발을 동동 굴렀다. 커다란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져 잡힌 손을 내려다보다 이윽고 나를 향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응?”
“짜증 나.”
“갑자기 왜.”
“몰라서 물어?”
시훈의 등 뒤로 진 작은 그림자와 그 옆에 길게 늘어진 나의 그림자가 한 몸처럼 겹쳐 보였다. 나는 숨을 죽이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마주한 동그란 눈동자에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무언가 결의에 찬 것 같기도 했다.
“내 사람 하나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어.”
“시훈아….”
“원래대로 돌아가야겠어. 지금 당장.”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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