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오형석은 어려진 시훈의 모습을 굉장히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에 반해 시훈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달랑거리며 굉장히 아니꼬운 눈으로 오형석을 올려다보았다.
“이야. 지, 진짜 같네?”
“그럼 진짜지 가짜겠어요? 이 상태로 한참을 살았는데?”
“어, 그건, 네. 그러네요. 많이 불편하셨겠습니다.”
어쭙잖은 변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시훈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능글능글 웃고 있는 오형석을 노려보았다.
“처음에는 재미있겠거니 하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가능한 빨리 해결 보고 싶습니다.”
시훈은 지난 몇 달간의 일들을 회상하는 듯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의 모습과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연륜이 느껴지는 한숨이었다.
“그래도 신체 연령에 맞는 정상적인 생활은 가능한 게 어디입니까! 전 너무 놀라운데요.”
오형석의 무책임한 발언에 나는 결국 터져 버리고 말았다.
“오형석 씨.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지금 저희가 겪은 피해가 금전으로 보상이 가능하다 생각해서 이렇게 막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헛… 실례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이렇게 완벽하게 아이의 모습이 나타났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요. 어느 한 부분이 기형적으로 변형되는 경우나, 지능 수준이 떨어질 수도 있을 거라 예상했던 터라. 어어~ 째려보진 마시고요.”
“미친… 공부를 너무 많이 하더니 돌아버렸나.”
“뭐! 어쨌건 결과가 나쁘지 않은 게 어딥니까. 하하.”
죽일까. 진짜로….
너무나 속 편한 소리를 하는 오형석의 귀싸대기를 한 대 날려주면 조금이나마 기분이 풀릴 것 같았지만 아주 예의 바르고 매너가 넘치는 과학자인 나는 이를 악물고 폭력의 충동을 참아내었다.
“실험 기간 내내 특별히 신체적으로 이상 징후가 발생하지도 않았고, 지능도 그대로이고, 하교 후에 본 업무도 정상적으로 소화할 만큼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대로 지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이고. 그거야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지요. 암요. 어디 보자… 사전 검사에서도 별 이상 없고, 현재 컨디션도 좋으니 투약에는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빨리 약이나 내놓으세요.”
“아! 맞다. 여기 있습니다.”
내가 여전히 못마땅하게 말하자 오형석은 내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잽싸게 약병을 꺼내어 시훈에게 건넸다.
그냥 보기에도 정말 맛없어 보이는 파란색 액체가 병 안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저거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거 맞아? 아무리 임상용이라고는 하지만 색을 꼭 저렇게 식욕 떨어지는 푸르딩딩한 걸로 해야만 했어? 아니, 약물 특성 때문에 저 파란색이 나오는 건가? 대체 저 안에 뭐가 들어 있길래?
“마시고 8시간 안에 반응이 나타날 겁니다. 열이 오를 수도 있고, 근육통 같은 게 발생할 수도 있어요. 저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 감안하셔야 합니다. 물론, 아무런 이상 없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도 있고요.”
“혹시 실패할 확률은 있나요?”
“없지 않습니다.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아예 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미친. 뭐라는 거야. 완전히 복불복이라는 걸 길게도 말하네.
“…만약 실패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공이든 실패든 관계없이 앞으로 시훈 씨의 데이터는 저희 연구소에서 전적으로 관리하게 될 겁니다. 본사 연계 병원과 건강 케어도 함께 이루어질 거고요. 혹여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은 전적으로 저희 측에서 책임지고 관리해 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흘긋 옆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시훈은 두 과학자의 대화를 묵묵히 들으며 약병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저리 곰곰이 할까. 혹시 무섭다거나 망설여지는 걸까.
“혹시 위험하거나 그러진 않겠죠? 아무리 관리를 받는다고 해도 잘못되고 나서는 아무 의미가 없잖습니까.”
“에이. 최악의 경우를 말씀드린 거고요. 잘못될 가능성은 아주 낮습니다. 설마 제가 독약을 가지고 왔겠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안정성 면에서는 안심하셔도 됩니… 어어어?”
한참 설명을 하던 오형석이 난데없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내 옆자리에는 이미 비어버린 약병을 들고 안을 살피는 시훈이 앉아 있었다.
“권시훈! 그걸 벌써 마신 거야?”
“그럼 마시라고 준 걸 쳐다만 보고 있어?”
“아니, 말이라도 끝까지 들어보고….”
“더 들어서 뭐 해. 어차피 결과는 배에 들어가 봐야 아는걸.”
완전 쾌남이네. 나라면 무서워서 몇 날 며칠을 붙잡고 있다가 안 마시고 도로 연구소로 뛰어 들어갔을 텐데.
하기야 어쩌면 모르는 게 약이라고 이런 류의 약이 가지고 있는 부작용이나, 성분들에 대한 안 좋은 점들을 내가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두려웠던 거지, 이쪽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시훈에게는 그냥 ‘파란 물’로만 보였을 수도 있겠다.
“오… 뭐 달라진 거 없어요?”
놀라움을 금치 못한 건 오형석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랑 좀 다른 점이 있다면 놀라움 20% 흥미로움 80% 정도의 눈빛으로 시훈을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다는 것.
“맛없어요.”
“…그건 당연한 거고.”
“모르겠는데? 아, 혹시 밥 먹고 마셨어야 했나? 나 빈속인데?”
“…….”
누군 걱정되어 죽겠는데 저딴 실없는 소리나 해대다니. 아직은 살만한가 보구나.
“…괜찮나 보네요.”
오형석은 내 감상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니 다행입니다.”
“네….”
“윤진 씨. 제가 면목이 없습니다. 많이 불편하시겠지만 조금 더 고생해 주세요.”
“면목이라는 걸 알긴 하시는군요?”
“하핫. 저도 머리가 있는걸요.”
“…….”
“사실 이번 실험은 저희 모기업에서도 매우 흥미롭게 모니터링하고 있어서 제가 답지 않게 욕심 부렸습니다. 승진하고 첫 이슈라서 좀 들뜨게 되더라고요.”
그딴 TMI는 굳이 듣고 싶지 않았지만, 너무 진심이 보이니 또 뭐라 하기 미안해져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오형석은 아주 자연스럽게 최근 연구 주제에 대한 자잘한 일들을 꺼내놓으며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윤진 씨네 연구소에서는 성장프로젝트 아직 진행 중이십니까? 연구비 때문에 미끄러졌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거 홍주석 박사가 단독 진행하다가 결국 협업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연구보고서가 안 나와서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네요.”
“아~! 아쉽네요. 뭐 좀 여쭤보려고 했는데.”
“…또 물어볼 게 남았습니까?”
“한 번 들어보세요. 시료 배양 중 온도 조절에 관한 내용인데, 그게….”
대답해 주지 말까 하다 그냥 끊어버리기에는 좀 정 없는 것 같아, 알고 있는 내용만 대충 이야기해 주었더니 처음으로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좋아해서 내가 다 무안해져 버렸다.
“…….”
시훈은 두 과학자의 사이에 껴서 열심히 눈을 굴리고 있다가 곧이어 심심하다고 휴대폰을 꺼내 요새 1학년 1반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모 게임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의자에 누운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닌 척추가 아작 나기 딱 좋은 자세로 휴대폰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그 모습이 영락없는 초딩이었다.
한참 동안의 질의응답이 끝나고-거의 대부분 오형석이 질문했고 내가 대답했지만- 시훈은 경과 관찰을 위해 형석의 연구소로 동행하기로 했다. 혼자 보내기 싫어 나도 따라가고 싶었지만, 기밀 유지 때문에 관련 업종 종사자는 출입할 수 없단다.
“시훈아.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있어야해? 마음에 안 든다고 욕하고 뭐 집어던지고 쥐어뜯으면 절대로 안 돼? 알았지?”
“자기야. 나 수련회 가는 거 아니야. 무슨 선생님이야. 선생님은.”
“그래도….”
“그리고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 깡패 아니거든. 누구 패고 이런 짓 안 한다니까?”
“걱정되니까 그러지….”
“내일 아침에 갈 건데 뭐. 걱정할 것도 많네.”
걱정 마. 윤진아.
단풍 같은 작은 손으로 내 볼을 툭툭 두드리던 시훈은 시원한 입매로 크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 가슴께가 찡해져서 눈살을 찌푸렸다.
“잘되겠지. 잘될 거야. 집에서 딱 기다리고 있으면 금방 갈게.”
“응.”
“울지 말고.”
성장이 빠르다더니 진짜인가보다. 처음 아이로 돌아갔을 때의 뽀둥함은 사라지고, 사고깨나 칠 것 같은 개구쟁이 어린이가 또박또박한 말씨로 나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어쩌지. 울지 말라는데 당장 눈물 날 것 같잖아. 애는 웃고 있는데 다 큰 어른이 길바닥에서 추한 꼴을 보이고 있으면 시훈이 쪽팔릴 것 같아서 목울대로 울음을 삼키며 애써 미소 지었다.
“알았어. 안 울게.”
“응 착하네.”
다시 시훈이 웃는다. 그래서 나도 싱긋 따라 웃었다.
“흠… 신파는 그만 찍고 이만 갑시다. 시훈 씨.”
“누구 좋은 꼴을 못 보는 타입이구만. 갈게요. 네.”
손짓하는 오형석을 흘긋 본 시훈은 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갈게. 내일 봐. 자기야.”
짜식, 내가 키운 건 아니지만 언제 이렇게 커 가지고. 형 위로할 줄도 알고. …너 너무 사랑스럽잖아. 진짜.
“…….”
나쁜 일만 있었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내 인생에서 한 번도 겪지 못할지도 모르는 경험이었다. 아마 영원히 이제 시훈에게 아빠라 불릴 일은 없겠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시훈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다.
거지 같은 일도 많았지만 다 지나고 나니 오히려 색다른 경험이었다고 웃어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천지 어느 누가 애인의 어린 시절을 직접 두 눈으로 볼 수 있겠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시훈과 오형석을 실은 차가 저만치 멀어져 갈 때까지 오래도록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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