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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25화 (25/85)

25화

울며 겨자 먹기로 시훈을 보내고 홀로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나간 모양 그대로 널브러진 집 안에 한숨을 내쉬고 청소를 시작했다.

방바닥을 걸레로 열심히 닦으며 시훈이 유치원 가방을 메고 종종걸음으로 길을 걷던 모습을 떠올렸다. 나름 귀여웠는데. 아니, 나름이 아니라 겁나 귀여웠는데 우리 시훈이.

막상 원래대로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섭섭하기도 하고 헛헛하기도 했다. 그냥 두 달 다 채우고 치료제 받아올 걸 그랬나. 특별히 문제가 없으면 기간은 채워도 관계없었을 텐데. 본인도 생활하는 데에 그닥 불편해하지 않았었고.

“에잇.”

아, 몰라. 이미 벌어진 일이고 더 걱정해서 뭐 해! 내일이면 어쨌거나 뭐가 달라져도 달라진다 이거지. 뭐가 되었건 상관없으니 건강하게만 돌아왔으면 좋겠다.

일단 오늘은 자유니까 청소도, 빨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망가져 보련다. 평소에 권시훈이 질색했던 일들 오늘 다 해 보고야 말겠어!

들고 있던 걸레를 아무 데나 던져놓고 당장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야채칸 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소주 4병과 온갖 음식들을 꺼내왔다.

근 몇 달간 내가 술만 마시려 하면 은근슬쩍 그 자리에 끼려던 시훈을 피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집에서는 금주하게 되었다. 내가 술을 즐기는 편은 절대 아니지만 답답하고 심란하니 잠이 안 와서 술이라도 마시면 딱 좋을 것 같았는데 그 동글동글한 꼬맹이는 절대로 나를 봐주지 않았다.

‘아! 좀! 술 좀 마시게 내버려 둬!’

‘누가 뭐래? 나도 딱 한 잔만 달라니까? 그러면 얌전히 들어갈게.’

‘안 된다고 했지! 너 진짜 나한테 혼나고 싶어?’

…어쨌거나 오늘은 그 빌런이 없으니 마음껏 마시고 죽을 것이다. 머리카락 떨어졌다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으니 집도 안 치울 거야! 기름진 것도 잔뜩 먹고 그냥 드러누워 자야지.

입고 있던 바지도 벗어버렸다. 시훈이랑 있으면 조금 쑥스러워서 답답해도 아래위 다 갖춰 입고 지냈는데, 오늘은 안 들어올 테니까!

“이야. 너무 좋네.”

커다란 티셔츠 한 장과 팬티 한 장만 걸친 채로 거실 테이블에 쩍벌 자세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기왕지사 일탈할 거면 제대로 한번 해 보자고!

“건배!”

조금 등신 같지만 나는 TV 속에서 눈물 콧물을 쏟고 있는 배우와 가상의 건배를 하고 잔을 쭉 들이켰다.

* * *

그리고 눈을 감았다. 아득하게 멀어지는 정신을 붙들 새도 없이 나는 나락 그 어딘가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리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눈앞에 있던 시훈이 보이지 않게 되자 다시 불안감이 엄습했다. 매캐한 공기에 연신 기침을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정신없이 시훈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했다.

설마, 또 나 혼자 두고 어디 가버린 건 아니겠지?

안돼. 그러지 마.

“시훈아.”

나 너 없이는 안 되는 거 알면서. 나 두고 자꾸 어디가. 불안해 미칠 것 같아.

“시훈아… 어디 갔어.”

제발. 가지 마.

“아아. 시훈아! 어디 간 거야. 가지 마아!”

“나 여기 있다.”

그때, 심연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꽉 안아 올렸다.

불안감에 몸부림치던 나는 순간, 꽉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고 현실로 돌아왔다.

“헉….”

습기 가득하던 공기도 없고, 기침이 날 만큼 자욱한 먼지도 없다. 창으로 비춰오는 햇빛은 늦은 오후의 느긋한 온기가 아니라, 막 떠오르게 시작한 눈이 시린 아침의 것이었다. 땀에 절어 헉헉대던 나는 아직도 달음질치는 심장박동에 크게 심호흡을 했다.

“??”

천천히 정신이 돌아와 이성을 차려보니 나는 누군가에게 안겨 있었다. 그런데 가슴의 양감이 어딘지 익숙한 느낌이 들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보았다.

단단한 팔. 얼굴에 맞닿은 단단한 가슴, 날카로운 하관, 코끝의 점. 내려다보았을 때 가장 잘 보이는 기다랗고 새까만 속눈썹. 그 뒤에 숨어 있는 크고 새까만 눈동자….

“아까는 그렇게 애타게 불러 대더니 갑자기 왜 그런 눈으로 봐? 너무 오랜만에 봐서 놀랐어?”

“허어어어억!!”

시훈이었다.

그것도 애기가 아닌!!

꿈이 아니었다. 이것은 명백한 현실이었다. 지금 내 눈앞에는 ‘초1 권시훈’이 아닌 ‘진짜 권시훈’이 떡하니 서 있었다.

“뭐, 뭐뭐뭐뭐뭐야?”

“뭐긴 뭐야. 네 남친이잖아.”

“아아악!”

너무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시훈의 가슴을 대차게 밀치고 엉덩이 걸음으로 도도도 물러났다.

“세상에. 미쳤나 봐… 미쳤나 봐.”

심장 박동수가 정신 줄을 놓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러다 나 부정맥으로 죽는 거 아니겠지?

믿을 수 없어! 어제까지만 해도 쟤 애기였잖아? 근데 왜 저렇게… 아 맞다. 약 먹었었지. 아니, 그런데 왜 연락도 없이 집에 쳐들어와. 온다면 온다고 미리 이야기라도 해야… 아, 여기 같이 사는 집이지. 아니, 그런데…!

미치겠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온 나머지 내 머릿속은 전쟁이 터져 아비규환이 되어버려 ‘아니, 그런데!’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너, 너… 너.”

아, ‘너’도 추가해야겠네. 무슨 말 못 하는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하지만 똑바로 말하고 싶어도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놀란 걸 뭐 어쩌라고!

그런데 재수 없게도 시훈은 내 멍청한 꼴을 내려다보며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왜 웃어! 네 남친 말 더듬는 게 그렇게 재미있냐?

“뭐 그리 놀라. 자기야. 새삼 내 잘생김에 또 반해버렸어?”

“…….”

저 과하다 못해 하늘을 뚫고 나갈 것 같은 자존감은 어떻게 해야 하나. 얄밉고 괘씸해서 뭐라도 하나 던져야 마땅했지만 권시훈 잘생긴 건 집 앞 공원의 나무도 아는 사실이었기에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떠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가까이서 본 시훈은 아기 때보다 커진 건 분명했는데 아주 어른이 된 것 같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어른과 청소년의 중간 정도? 확실한 것은 어른의 성숙한 느낌은 아니었다.

날카로워 보였던 하관은 자세히 살피니 아직 젖살이 조금 붙어 있었고, 혈기를 주체 못 해 유난히 붉은 빛으로 도드라지는 도톰한 입술과 동그랗고 커다란 눈동자에는 앳됨이 묻어났다. 자세히 보니 키도 서른 살 시훈보다는 조금 작아 보였다. 중요한 곳은 당장 보이지 않아 모르겠으니 이따 한번 확인을….

아니!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지금 이 시점의 논점은

1. 권시훈이 돌아왔다.

2. 아이가 아닌 권시훈이 돌아왔다.

3. 그런데 몇 살 권시훈인지는 모르겠다.

이니 일단은 이 문제부터 해결하고 보자고.

“어,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오전에 검사 마치고 바로 넘어왔어. 특별히 이상 없으면 집에 가도 된다고 그래서.”

“아….”

“벌써 집에 온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어.”

“그럼 깨우지….”

“하도 곤히 자길래 집 좀 치우고 있었지.”

지난밤, 나는 온갖 배달 음식을 시켜놓고 혼자서 집에 있는 술들을 싹 털어버렸다. 어린 시훈을 마음속으로 떠나보내는 슬픈 마음에 시작한 혼술이었지만(거짓말) 7병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내가 술을 먹는 건지 술이 나를 먹는 건지 따지지도 못했다.

그나마 기억나는 건 TV에서 아이돌 뫄뫄 씨가 나오길래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르고, 엉덩이춤을 추다가 별안간 시훈이 보고 싶어서 꺼이꺼이 울다 바닥에 엎어져 버렸던 것 정도… 집 안에 뭐 부서진 게 없는 거 보니 얌전히 술 마시다 쓰러져 그대로 잠든 것 같은데.

가만있어 보자. 한 시간? 한 시간이라면 내가 한창 꿈속을 헤매고 있을 때였는데…?

“자기. 아직 하루도 안 지났는데 집을 아주 개판을 만들어 놨더라? 뭘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아직 반도 못 치웠….”

“아니아니아니!”

“?”

“지금 집 치우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럼 뭐가 중요한데?”

“한 시간 전부터 있었으면… 너, 혹시 내가 잠꼬대하는 거 다… 봤어?”

“아~”

제발, 아니길 간절히 빌고 빌고 빌었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다르게 시훈은 비열하게 웃어 보였다. 미친 저 새끼 다 봤네. 봤어.

“나랑 있을 때는 바지 안 입으면 죽을 것처럼 굴더니 혼자 있으면 대담해지는 타입일까?”

“…….”

“빨간 팬티. 인상적이었어.”

“허헙.”

아, 맞네. 나 어제 바지 안 입고 있었구나.

급하게 티셔츠를 끌어 내려 다리를 가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앞으로는 나랑 있을 때도 빨간색 입어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사과인 건 알지?”

“…….”

와, 저 미친놈은 깨우지 않고, 청소하면서 계속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는 거 아냐. 변태 아냐, 진짜로? 시훈은 실실 쪼개며 빨간 엉덩이를 흔들며 혼자 끙끙대던 내 모습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 묘사가 어찌나 신랄하고 적나라하던지 낯뜨거워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윤진아. 아쉽지만 지금은 안 된대. 약 기운 빠지고 부작용 확인할 때까지는 무리하면 안 된다 하더라고.”

“아, 아니. 난 괜찮은데.”

내 말은 애초에 들을 생각조차 없었는지 제 할 말만 마친 시훈은 내 이마에 가볍게 쪽 하고 입 맞추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어머니. 저는 여기서 혀를 콱 깨물고 죽겠습니다. 세상아, 고마웠다. 친구들아. 누가 내가 왜 세상을 떠났냐 물어보거든 수치사라고 꼭 좀 적어주련.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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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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