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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26화 (26/85)

26화

“으휴….”

“…….”

“아주 냉장고째로 배 속에 집어넣었구나? 남은 게 하나도 없네.”

“…….”

한참 동안 분주히 집 안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마친 시훈은 마지막으로 냉장고를 열어보고선 혀를 끌끌 찼다. 술이 정말 한 병도 남아 있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험악하게 구겨진 얼굴을 봐서는 머리를 쥐어박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다행히도 더는 잔소리 하지 않았다. 아마 한번 입을 대기 시작했다가는 2박 3일은 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아서인가보다. 이럴 때는 닥치고 있는 게 상책이라 나는 어깨를 움츠린 채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아, 어제까지 있던 게 어디 간 거야.”

“…?”

“설마 자기가 술김에 다 마셔버렸어?”

“대체 뭘 말하는 거야?”

“오. 여기. 있다, 있다.”

시훈이 냉장고 안에 한참 동안 머리를 박고 있다 꺼낸 것은 여덟 살 시훈이 마시던 뽀로로 요구르트였다. 저 커다란 손에 애기들이 마시는 요구르트가 들려 있는 모습이 너무 이질적인데…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곁으로 다가온 시훈이 아직 팬티 바람으로 맨바닥에 앉아 있는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는 이게 맛있어?”

“어. 다른 것보다 덜 달아서 계속 손이 가더라고. 뽀로로도 내 취향이고.”

“뽀로로가 네 취향이라고…? 시훈아 너 새 좋아했어?”

“자기야. 뽀로로는 펭귄이야.”

“펭귄이 조류야….”

“아! 아무튼!”

눈에 힘을 팍 주고 노려보았지만, 시훈은 내 번뜩이는 눈과 마주치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식 웃고선 손을 들어 내 머리 위에 손을 얹더니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

강아지 달래는 것도 아니고 뭐 하는 거야. 떨어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또 너무 오랜만이라 입을 다물고 시훈이 하는 대로 가만있었다.

“부리 내밀지 말고 이거나 봐.”

불현듯 시훈이 손을 내리더니 테이블 위의 서류철을 건넸다. 얼결에 받아들고 내려다보니 서두에 <프로젝트 ‘YOUNG’ 1차 임상시험 보고의 건>이라고 적힌 A4 두 페이지 분량의 보고서였다.

찬찬히 보고서를 훑었다. 사실 별로 볼 것도 없었다. 종이 한 장에 적힌 내용이라고는

‘실험 결과, 목표치에 달하는 수치에는 도달하지 못했으나 유의미한 결괏값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추후 실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 부탁드립니다.’

라는 말과 함께 약물 투약 전과 후의 신체 변화표와 성분 분석표가 첨부되어 있는 게 다였다.

“…뭐야. 그러면 다 자란 게 아니라는 거?”

“성장 상태로 보면 18살이나 19살 정도라던데. 더 정확한 건 자기가 검토해 달래. 보고서 보면 알 거라고.”

“그럼 처음부터 나랑 같이 갔으면 되었잖아. 왜 일을 더 번거롭게 만들지?”

“그건 나도 모르지. 보고서 쓰는 게 취향일 수도.”

그런 변태가 세상천지에 있겠니? 손에 들린 실험 보고서를 훑다 말고 시훈을 흘기니 상큼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투약도 계획했던 대로 했고, 실험과정에도 실수가 없었는데 왜 자라다 말았지?”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 약용량 잘 못 맞췄다 할배 될 수도 있다고 쫄았나 보지 뭐.”

“실험을 그렇게 그때그때 기분으로 하는 건 줄 알아?”

“난 분명 만약이라고 했다?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거잖아. 검증된 약물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만….”

“고딩이니 망정이지, 할배 안 된 걸 다행으로 알아. 자기야.”

그럼 안 되지. 내가 지금 얼마나 욕구불만인데! 할배 권시훈 기다리려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 줄 알아?

“뭐 어쨌거나, 반은 실패고, 반은 성공이니 좋게 생각해야지. 다음 실험 때는 지들이 더 연구해 오지 않겠어?”

“또 속 편한 소리 하네.”

“미리 걱정하지 말자는 거야. 애당초 말했잖아.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고. 우리도 감안하고 시작한 거고.”

단숨에 요구르트를 비운 시훈은 개수대에 빈 병을 착실하게 헹궈 선반에 올려두었다. 플라스틱병에 물기가 있는 꼴을 못 보는 소름 끼치는 깔끔함이다.

그동안 내 집안일이 얼마나 마음에 안 들었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나는 싱크대를 정리하는 시훈의 뒷모습을 흘긋흘긋 훔쳐보았다. 충분히 뼈대를 갖춘 골격. 조금 마른 듯 적당한 근육이 잡혀 있는 체형이 얼추 어른 권시훈의 모양새 같기는 한데…. 그래봤자 아직 미자의 몸이라 이거지.

“그럼 또 기다려야 하는 거야?”

“아마? 이 상태로 몇 달 정도 지내다 보면 또 연락 주겠지.”

“그렇겠지….”

내가 말꼬리를 늘이자 마른 수건으로 싱크대를 닦던 시훈이 몸을 돌려 나를 돌아보았다.

“왜, 자기. 아쉬워?”

“…무, 뭐가 아쉬워? 내가 왜?”

“흠… 그래. 아쉬울 건 없지.”

아닌데. 난 아쉬운데.

어쩐지 머리가 아픈 것 같아 비척비척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어디가?”

“심란해서 씻으러 간다!”

등 뒤로 권시훈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 * *

샤워 후 널브러진 내 배 위로 두툼한 서류뭉치가 툭 올려졌다.

“이게 뭐야?”

“박사 아저씨께서 직접 보세요.”

나처럼 예쁜 아저씨 본 적 있어? 짜증 나서 뭐라도 던지고 싶었지만, 손가락 까딱할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아 두 눈에 불만을 가득 담고 시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얼굴에 방탄을 깐 권시훈 씨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내 손해다 싶어 마지못해 배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뭉치를 집어 들고 안을 뒤적였다.

두툼한 봉투 안에는 각종 서류와 무슨 안내 브로슈어, 카드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이제 와 본인 연구소 자랑을 하겠다는 건 아닐 테고, 그렇다고 뜬금없이 아무 책자나 넣을 리는 없었기에 가장 먼저 손에 잡힌 플라스틱 카드를 집어 들고 쓰인 글자를 자세히 살폈다.

금주고등학교

2학년

권시훈

“이게 뭐야…? 금주고등학교?”

고등학교 이름이 있는 걸 보니 학생증 같은데 그 밑의 이름이 내 남친 이름이랑 같아서 의아했다. 하기야 권시훈라는 이름이 특이한 편도 아니고, 동명이인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문제는 지금 이게 왜 내 손 안에 있냐는 것이다.

이런 내 의문에 대답한 것은 시훈이었다.

“학생증이야.”

뭐? 학생증? 학생들이 신분증처럼 쓴다는 그 학생증?

“…여기에 네 이름이 왜 있어?”

“필요하니까.”

“…왜?”

“고등학교 가려면 필요하잖아.”

“고등학교에 간다고? 네가? 권시훈이?”

“응.”

그런데 아까부터 얘가 계속 뜬금없는 소리를 하네. 유치원, 초등학교도 모자라 이젠 고등학교 타령을 하시겠다?

“낮술하고 왔니? 웬 고등학교? 왜 아예 수능 봐서 대학 가고 싶다고 하지?”

“그건 싫어. 수능 보기 싫어서 미국 대학 간 건데 그 짓을 왜 해.”

“그게 아니면 대체 왜 또 학교에 가겠다는 건 데에!”

정말 기가 차고 짜증이 솟구쳐 가슴을 쳤다. 하지만 시훈은 세상 태연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봐봐. 자기야, 내가 지금 어느 정도 컸지만 당장은 일상생활로 돌아가기는 어렵잖아. 맞지?”

“…….”

“또 약 부작용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당장 대처할 수가 없잖아.”

“아니, 그러니까… 부작용이랑 고등학교랑 무슨 상관관계가 없는데?”

“내가 회사를 나가거나 집에 있으면 연구소까지 가는 시간이 꽤 걸릴 거 아냐. 혹시 잘못되었는데 치료하러 이동하다가 잘못되면 어떻게 해.”

“그래서.”

“자기야. 난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 자기 할아버지 되면 업고 다녀야 한다고.”

“…….”

말 하나는 정말 청산유수네. 영화감독보다는 사기꾼이 어울릴지도…. 상대적으로 말발이 딸리는 나는 똑 부러지게 반박 한 번 하지 못했다.

“그리고 오형석 씨가 부탁한 것도 있어. 이런 사례가 흔치 않으니 내 학습능력이나 발달 상황이 신체나이에 맞게 잘 유지되는지 당분간 모니터링했으면 해서 다음 치료 일정 잡힐 때까지 고등학교에 다녔으면 좋겠다고.”

“가지가지 한다. 나는 네가 초등학교 다니는 내내 들킬까 봐 신경과민으로 머리털이 다 빠질 것 같았다고. 그 살얼음판에 다시 뛰어들라니 제정신이야?”

“아, 그건 걱정 안 해도 된대. K제약 산하 고등학교가 있는데 그쪽으로 전학 도와준다고 했어.”

그제야 서류를 자세히 살펴보니 입학원서, 학생증 생활기록부 등 입학에 필요한 서류들과 연구 모니터링을 위한 설문지가 들어 있었다.

이 새끼들. 나 모르게 뒤에서 이딴 짓을 꾸미고 있었구나. 괘씸했지만 문제가 생길 경우 당장 대처를 할 수 없다는 것은 피실험자에게 치명적인 게 사실이었고, 나는 시훈의 말발을 이길 수도 없었기에 어느 정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이게 하고 싶니?”

“응. 이 기회에 고등학교 다시 다녀보는 거지.”

“허. 참나.”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샤워 후 노곤한데 뜬금없이 고등학교 원서를 본 것도 그렇고, 이번에는 고딩 아들 학부모행세를 해야 하는 건가 싶어 만사에 흥미가 떨어져 버렸다.

심드렁하게 서류를 뒤적이며 시훈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포실한 수건이 나의 젖은 머리칼을 만져 주었다.

“그러면 학교 안에서 모니터링은 누가 하고?”

“오형석 연구원이 학교로 들어온대. 나 밀착 마크한다고.”

“축구도 아니고 밀착 마크는 무슨… 그런데 무슨 선생으로?”

“보건.”

웃기네. 보건이란다. 흰 가운 입으면 다 의사 계열로 보는 고정관념 때문인가. 나도 그렇고 오형석도 그렇고 의학에 대해서는 1도 모른다. 고딩들이 보건실을 찾는 대부분의 이유가 꾀병에서 기인한다고는 하지만, 어지간히 돌팔이여야 티가 덜 나지.

보건실에서 호들갑을 떨며 알보칠을 발라주는 오형석을 생각하니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나마 좀 기분이 나아지는 것을 느끼며 서류를 한 장 더 넘겼다.

“…이게 뭐야? 여기에 왜 내가 있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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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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