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툭, 내 배 위로 시훈의 학생증과 같은 재질의 플라스틱 카드가 떨어졌다. 주워서 보니 또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금주고등학교
2학년
권시훈
급하게 지하철 증명사진 부스에서 찍어서 범죄자처럼 나온 내 운전면허증 사진이 떡하니 박혀 있는… 고등학교 학생증.
“아, 맞다. 자기도 같이 가야 해.”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람?
“…뭐라고?”
“자기네 연구소에서 이야기 못 들었어? 오형석 씨가 연결해 놨다고 하던데. 어제저녁에 전화 가지 않았어?”
“받았겠니? 아까까지 정신 못 차리고 자고 있었는데?”
“아, 술에 아주 떡이 되셔서 못 받았다고?”
“…….”
기억상 어제 해가 떨어지기 전부터 술병을 입에 꽂고 부어대고 있었으니 전화 따위 받았을 리 만무했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 저 멀리 구석에 박혀 있는 휴대폰을 꺼내 보니 시훈의 말대로 연구소에서 전화가 몇 통, 메일이 한 통 와있었다.
제목: 프로젝트 ‘YOUNG’ 모니터링 자료 전달의 건
날짜: 20xx년 xx월 xx일
작성자: 나 세연
첨부파일: 모니터링시트.xlsx
안녕하세요! 박사님.
일전에 K연구소 오형석 박사님과 협의하셨던 20**년 주요 연구과제인 ‘YOUNG’ 프로젝트의 실험과정 모니터링에 관한 세부 매뉴얼을 전달 드리고자 합니다.
안내받으신 대로 실험은 피실험자인 권시훈 씨가 자택에 복귀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익주 월요일부터 실시되며, 박사님께서는 권시훈 씨와 함께 일정을 소화하시면서 행동 양상 및 각종 사항을 시트에 기록해 주시면 됩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모쪼록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랍니다.
그럼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난 협의한 적도 없는데 오형석, 이 새끼가 또 공갈을 쳤나 보다. 뭐라 하기도 지쳐 휴대폰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우리 연구소에서도 오형석과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기술협약인지 공동 연구인지 아무튼 나와 관련 없는 일이라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아 잘 알지 못했던 것뿐.
“하아… 이제 하다 하다 10년의 세월을 거슬러 고딩 코스프레까지 하라는 거야?”
“얼마나 좋아. 돈 받고 학교 다니는 맛. 꽤 짜릿하지 않겠어?”
“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니? 차라리 내가 네 아빠를 할게. 그건 경험이 있어서 좀 나을 테니까.”
“자기야. 공부하러 가는 게 아니라 놀러 가는 거잖아. 자기 학교에서 공부밖에 안 했다면서. 이 기회에 진정한 학교생활을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그 경험 한번 해 보자고 굳이 학교를 다시 다니고 싶지 않아.”
“아, 난 벌써 설레는데? 아무래도 차는 못 끌고 다니겠지? 자전거 한 대 살까?”
“…나 자전거 잘 못 타.”
“내 뒤에 타면 되지.”
미친. 지금 청춘물 찍니? 노을 지는 강둑을 달리는 자전거에 나란히 탄 소년 게이들.
“아, 싫어. 또 거짓말해야 하잖아. 나 진짜 연기 못 한다고.”
“내 옆에 딱 붙어 있으면 되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마.”
“다 큰 남자애들 둘이 붙어 다니면 게이라고 소문나!”
“게이 맞잖아. 그리고 소문나면 어때서. 난 우리 자기 내 남편이라고 말하고 다닐 건데?”
“…미쳤다. 진짜.”
“응. 나 박윤진한테 미쳤어.”
시훈은 앞니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난 또 병신같이 그게 귀엽다고 같이 처웃고 있다.
“하는 거다?”
“내가 안 하면 어쩔 거야. 까라면 까야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니까? 우리 요 몇 달간 연애다운 연애 못 했잖아. 그건….”
“육아였지.”
“…뭐, 그래. 그렇다고 치자. 윤진이가 말하는 건 다 맞지. 그럼.”
“어휴….”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도저히 누워 있을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서성였다. 심란한 만큼 걸음을 빨리해 보아도 드글거리는 속은 그대로였다. 알겠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복잡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연기는 젬병이라 어설프게 고딩인 척하다 걸리기라도 하면 그 쪽팔림을 누가 감당하겠어.
“윤진아.”
한참 동안 내 발재간을 보고만 있던 시훈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왜. 심란하니까 말 걸지 말아줄래?”
“한 번만 안아보자.”
“뭐?”
“안아보자고.”
뭔 말인가 싶어 돌아보니 나를 향해 양팔을 벌린다.
“갑자기?”
“자기 지금 걱정하려고 시동 걸고 있잖아. 걱정하지 말고 나한테 오라고.”
“허….”
“얼른.”
참나. 네가 이러면 심각해질 새가 없잖아. 장난스럽게 미소 짓는 모양새에 나는 또 넘어가 버린다.
못 이기는 척 시훈의 목을 끌어안자,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 왔다.
“하, 이제 좀 살 것 같네. 그동안 박윤진 안아주지 못해서 얼마나 답답했는데.”
“왜? 안겨 있는 건 성에 안 차?”
“난 안아주는 게 좋지. 안기는 건 별로.”
마주 닿아오는 눈동자는 여덟 살의 시훈처럼 새까맣고 반짝거렸다. 하지만 훨씬 더 깊고 그윽했다.
“윤진아.”
“응?”
“사랑해.”
“…….”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 옆에만 있어. 이제 힘들게 하지 않을게.”
그래. 걱정은 나중에 하자. 언제나 그래왔듯 무언가 해결책이 생기겠지.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못 미더움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권시훈이 필요했고, 권시훈 또한 나를 원했다.
그러기에 나는 아주 잠시 동안 고민을 미루고 본능에 집중하기로 했다.
* * *
하기로 한 건 하는 건데, 꺼림칙한 기분이 가시지 않아 휴대폰을 집었다 내려놓길 반복했다.
태생이 호기심 많고 오래 고민하느니 뭐든 냅다 부딪혀 보는 쪽을 선호하는 권시훈을 설득하는 데는-설득이랄 것까지도 없겠지. 대충 서두만 던졌어도 좋다고 미끼를 물었을 테니까- 그다지 어려운 점이 없었겠지만, 정확히 그 반대 성향인 나까지 끌어들이려면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다시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아무 계획 없이 무작정 학교에 가는 건 아닌 것 같아.”
서재에서 튀어나온 내가 짐짓 비장한 어투로 선언(?)하자 소파에 드러누워 시나리오를 검토하던 시훈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계획 세울만한 게 있나? 학교 가면 수업 시간표 있을 텐데, 굳이?”
“아니, 그 계획 말고.”
“<박윤진 학생의 하루 생활 계획표> 같은 거라도 그려서 가게?”
“아악! 그거 말고!”
“자기야. 난 자기를 사랑하지만, 독심술까지는 쓰지 못해. 말해 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요.”
“생각을 해 봐. 애들이 너 어디서 왔냐? 이런 거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냐. 그리고 네가 원래대로 돌아가려면 정확히 뭘 해야 하는지도 파악해야 하고.”
내 말에 시훈은 뭐 그런 걸로 고민하냐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가면 다 알아서 하게 되어 있어.”
“또또또! 속 편한 소리.”
“자기가 생각이 많은 거라니까.”
“하아… 정말. 아무튼 간에! 난 이대로는 못 가. 달랑 매뉴얼 하나 가지고 고등학교에 갈 수는 없어.”
“걱정하지 마. 내가 자기 지켜 준다니까.”
“그거랑 그거랑은 다르다고! 안 되겠다. 오형석한테 해명이라도 들어야겠어.”
“물어봤자 어차피 나랑 똑같은 이야기 할 텐데.”
“그래도!”
그래서 기다렸다. 빌어먹을 고등학생 흉내를 내려면 당위성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런데 평소 오형석의 성격대로라면 진작 연락이 오고도 남았을 텐데 며칠이 지나도록 전화는커녕 문자 한 통조차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먼저 연락하려 했다. 하지만 막상 번호를 누르자니 망설여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가 말발 센 오형석에게 본전도 못 찾고 도리어 엄한 일이나 덮어쓰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DRR.
“헉.”
휴대폰을 노려본 지 30분째. 텔레파시라도 통했는지 오형석에게 전화가 왔다. 연구과제에 독심술도 포함되어 있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안녕하십니까. 박사님~ 오형석입니다.”
“압니다.”
“어- 오늘은 왜 또 찬 바람이 부는 겁니까? 무슨 일 있으셨어요?”
다 알면서 모르는 척을 하시겠다? 정말이지 이 자식은 역대급으로 뻔뻔한 놈이 분명하다.
“이보세요. 오형석 씨. 권시훈 씨에게만 전달하고 입 닦을 생각이었습니까? 나까지 끌어들이고 싶었으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들고 왔어야지. 성의 없는 메일 한 통 보내놓고 고등학교에 가라 하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 갈 것 같았어요?”
“아- 아~ 그거요? 하하하.”
“웃는 걸로 때우려 하지 마세요.”
“아, 넵. 그럼 웃지 않겠습니다.”
정색하며 말 듣는 게 더 짜증 나. 자동적으로 입이 딱딱하게 굳고 미간이 좁혀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7)============================================================
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