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대체 내가 따라가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형석 씨 연구과제이니 모니터링도 본인이 해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건 그런데….”
“그런데요?”
“제가 시훈 씨를 관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잖습니까.”
“왜요?”
“그… 제가 교실까지 들어갈 수 있는 외모 상태는 아니어서.”
“…….”
생각보다 오형석은 자기객관화가 꽤 정확한 편인가보다. 하긴, 아무리 어리게 쳐도 서른은 훌쩍 넘어 보이는 얼굴이니 선생님 역할 아래로는 엄두도 못 내겠지.
“저라고 이런 부탁드리는 게 마음 편하겠습니까. 하지만 어쩝니까. 혹시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시훈 씨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어쭈? 이제는 만약으로 협박하시겠다?
“오형석 씨 주장대로라면 애당초 학교에 간다는 것부터 무리입니다. 위험도를 낮추는 방향으로 진행해도 모자랄 판에 피실험자를 위험에 빠트리다니요.”
“아… 그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체 입으로만 동의하는 척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 말 진지하게 듣고 있는 건 맞죠?”
짜증 났다. 여태 내키지 않아도 참고 또 참고 참으면서 얼른 이 난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는데 어째 갈수록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일은 고사하고 모든 생활이 죄 오형석의 마음대로 휘둘리는 형국을 두고 보기에는 내 인내심도 이쯤이면 한계였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네요. 이렇게 독단적으로 나오시니 저희는 임상에서 빠지겠습니다.”
“아, 아아아! 안 됩니다! 진짜 안 돼요! 제발 그것만은 안 됩니다!”
“목청이 왜 이리 커! 이봐요. 귀 떨어지겠어요!”
“미안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만… 아니, 박사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오형석은 큰일이라도 난 양, 크게 소리쳤다가 금방 한숨을 내쉬며 변명을 주억거렸다.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의미가 있나 싶지만… 변명하자면 저도 좀 꺼림칙해서 끝까지 반대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윗선에서 지시가 내려오는 바람에 도저히 막을 도리가 없더라고요.”
“기가 차서. 오형석 씨는 윗선에서 시키면 절차고 뭐고 다 무시합니까? 연구자로서의 기본 개념도 없어요?”
“아, 윤진 씨.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뭐가 됩니까아. 잘못하면 과제 다 짤리고 좌천당하게 생겼다고요.”
핑계도 들어줄 만해야 고개라도 끄덕여 주지. 시훈으로 모자라니 이젠 상사 핑계야?
“저, 윤진 씨 김태준 전무님 아시죠? 요즘 K제약에서 가장 실세이신 분.”
“…누구요?”
여기서 김태준 이름이 왜 나오는 건데.
“그분이 이번 프로젝트 초반부터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셨는데 이번에 시훈 씨가 겪은 부작용 건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시더라고요. 그러다 이번에 프로젝트 총괄을 자처하셔서….”
김태준이 ‘YOUNG’ 프로젝트에 돈을 대고 있다는 것까지는 지난번 홍 박사가 술자리에서 말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구총괄? 상식적으로 모기업 임원진이 실제 연구에 손을 대는 게 가능한 일인가?
김태준이 이쪽 분야에 대해 개뿔도 모른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 프로젝트에 내 애인의 안전이 걸려 있는데, 감히 그 더러운 새끼가 입을 댄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건 당연했다.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김 전무님께서 윤진 씨에게 알리는 건 최대한 미뤄 달라고 당부하셔서… 아! 숨기려는 건 절대 아니었고요. 시훈 씨의 동의도 얻고 상황이 좀 정리가 되면 그때 알리려고 했습니다.”
“상황 정리요? 제가 따지고 들지 않았다면 끝까지 함구하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아이고… 아닙니다. 윤진 씨. 윤진 씨도 잘 아시잖습니까. 이 바닥도 별반 다를 거 없다는 것. 위에서 지시 내려오면 싫어도 해야 하고, 없는 것도 만들어 내야 하잖아요. 두 분에게 민폐라는 건 알지만 저도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벙쪄 버려 대꾸할 기운조차 잃어버렸다.
엮여도 하필 이렇게 엮이다니. 김태준 이 새끼는 나타나자마자 내 속을 뒤집다 못해 아주 들쑤셔 놓는구나.
도대체 얼마나 더 나를 괴롭혀야 직성이 풀리려는지. 연구원 제의를 거절했다고 보복이라도 하려는 걸까? 아니면 정말 단순히 ‘연구’일 뿐인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시훈과 내 사이를 알고 그 빌미로 나를 괴롭히려는 걸까.
“…시훈이는 이 상황 알고 있나요? 김태준 전무가 본인 이용해서 이것저것 해 보려고 하는 거?”
“에이, 이용이라니요. 실적에 목말라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악랄한 분은 아니십니다.”
“같은 말로 들리는데.”
정곡을 찔렸는지 내내 떠들던 오형석의 입이 꾹 다물렸다. 짐작건대 저 자식도 김태준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 목줄을 쥐고 있으니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거겠지.
“윤진 씨이. 어려운 부탁인 거 알지만 저 한 번만 봐주세요. 제가 진짜진짜 잘할게요. 최대한 빨리 시훈 씨 치료할 수 있도록 할 테니 당분간만 함구해 주시면 안 될까요?”
“형석 씨. 혹시 약점 잡힌 거라도 있습니까?”
“…그것까지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젠장.
나 또한 시훈이 걸려 있으니 강하게 윽박지를 수 없었다. 혹여 내가 미쳐 날뛰다가 시훈의 치료가 중단되어버리거나 김태준 새끼가 감옥에 갈 각오까지 하고 시훈에게 투약할 약을 엄한 약과 바꿔치기해 버린다면, 결국 모든 피해는 고스란히 내 애인에게 갈 것이 자명했으니.
“이번 한 번만 어울려 드립니다. 이번에도 진전 없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문제 공론화시킬 겁니다. 아시겠어요?”
“아이고. 박사님. 정말 감사드립니다아. 제가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약속드려요!”
“시훈이를 위해서지, 형석 씨에게 입에 발린 소리 듣자고 수락한 거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언제 축 처졌었냐는 듯 금세 들떠 팔랑거리는 꼴이 재수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
툭,
별 소득 없이 전화가 끊겼다.
결국, 본전이라도 찾으려 시작했던 대화는 내 손해로 끝나고 말았다.
굳이 알 필요 없는 이야기를 들어버리고 나니 속만 찝찝해졌네. 이럴 줄 알았으면 묻지나 말걸. 나는 또다시 뒤늦은 후회를 했다.
* * *
고대하고 고대하던 고등학생이 된 기념으로 시훈은 새롭고 신박한 프로필을 만들었다.
이름: 박윤진
나이: 18세(금주고등학교 2학년)
취미: 학문 탐미(뭔 소린지 아직도 모르겠음)
특기: 달리기(이건 맞음. 중학교 때까지 육상선수가 꿈이었음)
특이사항:
1. 권시훈과 함께 삶(매우 중요! 별표 다섯 개!)
2. 권시훈의 부모님과 잘 아는 사이라 함께 부산에서 상경
3. 병약 미소년
4. 지켜줘야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5. 사연 있는 듯한 슬픈 표정
6. 목소리는 작고 말투는 느릿해야 함
7. 애인 있음. 어떤 겁 없는 새끼가 플러팅하면 권시훈한테 이르길.
이름: 권시훈
나이: 18세
취미: 게임
특기: 운동은 다 잘함
특이사항:
1. 박윤진과 같이 살고 있음
2. 승부욕 강함
3. 소유욕 미쳤음
4. 시크하고 과묵한 냉미남
5. 까칠하지만 내 애인에게는 따뜻한 인소 남주 재질
6. 애인 유무 : 밝힐 수 없음. 혹시 알아? 가슴 속에 오래도록 품어온 단 한 사람이 권시훈이란 놈을 잠식하고 있을지…?
지랄이 났다. 아주.
자전거 뒤에 타고 있지만 않았어도 정강이를 걷어찼을 테다.
“이 유치뽕짝한 컨셉은 대체 어느 나라에서 온 거니?”
“유치하다니? 내가 어제 새벽까지 머리 쥐어짜서 만든 컨셉인데?!”
“유치해. 옛날 사이좋은 세계시절 인터넷 소설 설정도 이보단 낫겠다.”
“와. 너무하네. 자기야. 이 설정만큼 자기한테 어울리는 컨셉이 어디 있다고 그래. 하늘하늘, 여리여리 병약 미소년. 우리 예쁜 자기한테 딱 아니야?”
“대한민국 육군 병장에게 병약이 웬 말이니. 독감 접종 까먹어도 여태 독감 한 번 걸려 본 적 없는 몸인데.”
“실제랑 픽션은 달라야 제맛이야.”
위와 같은 개소리를 시전하기에 절대 못 한다고 잘라 말했지만, 듣고 있는 건지 그냥 개무시를 하는 건지 콧노래까지 흥얼흥얼 불러 젖힌다.
“그런데 넌 저 컨셉을 다 외우는 거야?”
“응!”
“맨정신에 하기 힘들 것 같은데.”
“괜히 영화감독이 아니지. 영화 오래 찍다 보면 반절은 배우야. 이 장면도 결국에는 다 영화가 될 거라고.”
“내가 봤을 때 이 영화는 폭망각이다….”
“그건 까봐야 아는 거지.”
“…별나. 하여간에.”
“자기야. 별나야 이 판에서 살아남아.”
“난 걱정되어 죽겠는데 너는 진짜 속 편하구나.”
“나도 걱정되는데?”
그 말에 시훈의 등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들어,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결 좋은 검은 머리칼이 여름 아침 바람에 흩날리자 코끝에 권시훈 특유의 시원한 향이 스쳤다.
권시훈이 걱정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다. 때문에 놀라웠고 한 편으로는 당황스러웠다. 이제 와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생긴 걸까. 표정이라도 볼 수 있다면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몸을 기울여 보아도 뺨 언저리만 슬쩍 보일 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와 이야기하는 게 좀 없어 보이긴 하는데… 고등학교 처음에 거절했었어. 자기 힘들까 봐.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기만 하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시간이 더 늦어진다고 하더라. 그래서 위험하고 불편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생각했어.”
바람을 타고 시훈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흘러들어왔다. 단단한 허리를 감싼 나의 손 위로 시훈의 손이 얹어졌다.
“휘말리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미안해.”
턱 끝을 등에 기대며 흰 목덜미에 시선을 두었다.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닌데 왜 네가 미안하다 하니. 솔직히 아주 살짝 원망했던 건 맞지만 따지고 보면 넌 피해자일 뿐이잖아. 오히려 죄 없는 네게 짜증 내고 섭섭해했던 내가 미안하다 해야지.
“아니야. 결국 결정은 내가 했는데 뭐.”
시훈의 약한 모습에 가슴 한쪽이 욱신거려 허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그에 화답하듯 손가락 사이로 시훈의 손가락이 얽혀 들어왔다.
“윤진아. 내가 더 노력할게. 초등학생일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잖아. 절대 자기 힘들게 안 해.”
“…….”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자.”
생각이 많은 게 죄는 아니잖아. 이것도 변명처럼 들리려나.
하려던 말을 목구멍으로 집어넣으며 또다시 생각에 잠긴다. 너를 믿고 기다리기로 결정했지만, 김태준이 무슨 꿍꿍이일지 여전히 짐작이 가지 않아 답답했다. 그렇다고 시훈에게 털어놓자니 걱정 위에 걱정을 얹어주는 것 같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꽉 잡아. 이제 큰길 나오겠다.”
고등학생 권시훈과 박윤진을 태운 푸른색 자전거가 유유히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나는 몇 년 전,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손가락이 부러진 이후 자전거 라이딩과는 완전히 이별을 고했다. 시훈 또한 성인이 된 후에는 자전거와 좀처럼 마주할 일이 없었을 텐데, 커다란 두 개의 바퀴는 마치 우리의 일상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우리가 걸었던 길을 지나쳐갔다.
그래도 좀 무서워서 시훈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꽉 주었다.
역시나, 나에게 시훈이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8)============================================================
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