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생각해 봐. 박윤진 인생에 다시 고등학생이 되는 날이 올 거라 누가 예상이나 했겠냐고.
고등학교 때 기억나는 거라고는… 아이들의 경멸 어린 눈초리와 냉랭한 태도, 홀로 외딴 섬처럼 떨어져 있는 나를 외면하던 선생들. 그 홀대에 지쳐버려 학교생활을 포기해 버린 뒤 매일 아침 가수면 상태로 학교에 도착해 책상에 가방 던지고 자다가 점심도 거르고 종례 시간 직전에 깨어났던 것 정도.
그런데 어떻게 박사가 됐냐고? 그냥 내 머리가 좋아서라고 해두자.
어쨌거나 내 1회차 고딩 인생은 누군가와 어울리기보다는 혼자인 날이 더 많았다. 잘났다는 이유로,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어려 보이고 왜소하다는 이유로, 곱상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나를 물어뜯고 끌어 내리는 데 혈안이 된 사람들이 지천으로 널렸다. 때문에 나는 늘 주변을 경계하느라 온 신경을 쏟았고, 극도의 피로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이어진 대학 생활이라고 해 봐야 다를 게 없었다. 몇 년 전까지 교복 입던 녀석들이 대학생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어른스러워지는 것도 아니니까. 대학에서도 여전히 나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놈들은 있었고, 그들은 내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우울하고 의기소침해져 있던 나를 구한 건 권시훈이었다. 스물다섯 여름, 교정에서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권시훈은 변함없이 나에게 따뜻하고 밝은 빛, 그 자체였다. 슬퍼 눈물 흘리면 말없이 품을 내어주었고, 내가 부당한 일을 당한다면 열 일 제치고 달려와 대신 싸웠다.
…나에게 권시훈이 없었다면 지금쯤 박사는커녕 미치광이가 되어 병원에 처박혀 죽어갔을 게 분명했겠지.
“무슨 생각해.”
책상에 멍하니 앉아 있다 불현듯 나를 부르는 시훈의 음성에 현실로 돌아왔다.
“…응?”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따뜻한 눈빛과 입꼬리에 매달린 웃음에 싱숭생숭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차분해져 나도 따라 웃었다.
“웃기는.”
시훈의 손가락이 내 입술을 툭 스치고 지나갔다. 생각보다 닿은 손끝이 뜨거워 움찔 몸을 물리자 도망가지 못하게 턱 끝을 붙잡았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쉬는 시간이라 어수선하기는 했지만 보는 눈이 많은 교실 안이었다.
“야아… 애들 보잖아.”
“보면 어때.”
“소문난다고….”
“박윤진 내 거라고 전교생이 다 알게끔 해야지.”
“너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려고 그래. 나야 아싸니까 없는 듯 살면 되지만 넌 아니잖아.”
“자기가 다른 새끼들한테 치이는 꼴 보는 것보다 내 쪽이 팔리는 게 백배 나으니까 가만둬.”
“…….”
네 과보호 때문에 너무 아무 일도 없으니 오히려 심심한걸.
아주 속 이야기를 해 보자면 아주 조금, 아쉬웠다.
권시훈을 컨셉충이라 욕하면서도 나 또한 내심 2회차 고등학교 생활은 꽤나 버라이어티하게 흘러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하루하루가 영화고 드라마인 영화감독이랑 몇 년 같이 살다 보니 뚝딱이 박사도 상황극에 물들어 버린 모양이다.
이런 상상도 했다. 유난히 더웠던 어느 여름날, 더위에 약해 책상에 엎드려 있는 병약 미소년 박윤진에게 일진 우두머리 김일진이 다가와,
‘야, 네가 전학생이냐? 이쁘게 생겼네? 너 내 거 할래?’
라고 지껄이며 박윤진을 괴롭히면 맨 뒷자리에서 엎드려 자고 있던 정체불명의 소년, 권시훈이 책상을 들어 엎으며 벌떡 일어나
‘미친놈아! 내 거야. 건들지 마!’
하며 일진에게 냅다 주먹을 갈겨 때려눕히는 상황.
열받은 일진은 본관 뒤뜰 소각장에 시훈을 불러내어 반쯤 죽여 놓을 계획을 세웠지만 사실 힘을 숨기고 있던 권시훈은 일진 17명을 먼지 나게 두들겨 패서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병약 미소년 박윤진은 자신 때문에 권시훈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 듣고 소각장으로 미친 듯이 뛰어가다 너무 무리해서 중간에 쓰러지는 거. 그리고 홀로 차가운 바닥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는다.
‘나 때문이야… 나만 없었어도… 흑, 흑… 미안해. 시훈아.’
아쉽게도 나의 상상력은 유치함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늘 현실적인 것을 추구하던 나에게는 상상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좀 어려운 일 같다.
현실 같지 않은 현실의 이야기를 하자면, 규하 덕에 우리의 고등학교 데뷔(?)는 꽤 순탄하게 흘러갔다.
규하는 누구에게나 인기가 많은 인싸 중의 상인싸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김규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긴, 누가 봐도 뒤돌아볼 만한 잘생긴 외모와 훤칠한 키, 그리고 서글서글한 성격까지 가지고 있는데 인기가 많지 않으면 이상하긴 했다.
어쨌거나 규하와 그를 따르는 아이들 덕분에 권시훈과 나는 생소한 고등학교 시스템에 별 무리 없이 적응할 수 있었다.
남자 놈들이나 여자애들이나 우리가 지나가기만 하면 시선 집중은 예삿일이요, 특히 여자애들은 아이돌 그룹 본 것처럼 꺅꺅거리는 거다. 나는 민망해서 점점 쪼그라들고, 정작 환호의 중심이었을 권시훈과 김규하는 별 반응이 없었다.
아, 여기서 중요한 건 김규하가 아니다. 내 남친 권시훈이다.
권시훈은 전학 오자마자 금주고의 인기남 자리를 단숨에 꿰찼다.
부드럽고 선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시종일관 차가운 눈빛과 과묵한 성격-물론 구라지만-, 그런데 어쩌다가 나오는 사소한 행동이 뭇 여학생들의 가슴을 세차게 뛰게 한다나 뭐라나.
예를 하나 들자면, 언젠가 한 여학생이 계단에서 책더미를 떨어뜨려 당황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 옆을 지나가던 권시훈이 가던 길을 멈추고 떨어진 책을 주우며,
“바보같이 흘리고 다니냐.”
라고 딱 한 마디를 뱉더니 여학생의 품 안에 있던 책까지 모두 빼앗아 들고선 교실까지 바래다주었다고 한다.
물론 그 여학생을 포함한 반 아이들은 시훈에게 홀라당 반해서 그날 그 반에서는 온종일 권시훈 찬양가가 울려 퍼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하루는 교무실에 들렀다가 교실에 들어가려는데 한 여학생이 나를 붙잡았다. 까만 단발머리에 단정한 얼굴이 귀여운 아이였다.
“네가 박윤진이지?”
“어…? 어, 맞는데.”
드디어! 재규어와 호랑이 사이에 낀 나도 빛을 보는 날이 오는 건가 싶어 주책맞지만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미안한데, 아이야. 나는 이미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다 주어서 너에게 더 줄 것이 없구나.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말 정도는 섞을 수 있….
“너 시훈이랑 친하지? 이것 좀 대신 전해 줘!”
“…….”
그날 이후, 권시훈은 과묵한 컨셉을 유지하느라 학교에서 말을 하루에 열 마디도 안 한다.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오히려 내 옆에 딱 붙어서 미주알고주알 말을 걸어오는 규하가 더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바로 다음 날. 보건실에서 오형석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나오는 길이었는데, 이번에는 긴 머리 여자애가 나를 불러 세웠다.
“네가 박윤진?”
“…그런데?”
“이거 김규하한테 전해 줘.”
“…….”
이 짓을 열 몇 번 하니 나는 그냥 이 새끼들 셔틀인가 싶어 짜증이 솟구쳤다.
“야! 내가 너희 종이야? 너희 팬클럽 회장이야? 너희 선물은 너희들이 알아서 받아와!! 왜 나한테 셔틀을 시키는 건데!”
초콜릿인지 뭔지 아무튼 품에 잔뜩 안은 선물을 두 사람한테 내던지며 너희들 팬들은 너희들이 관리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권시훈은 대체 어떤 애가 감히 너한테 말을 붙이냐고 길길이 날뛰었고, 김규하는 윤진이가 엄청 곤란했겠구나. 이제부터 우리 반 애들 말고는 교실 근처에 얼씬 못 하게 하겠다면서 싹싹 빌었다.
“나 그냥 혼자 다닐래.”
“뭐? 그건 안 돼.”
“왜 안 되는데?”
“자기가 혼자 다니면 내 모니터링은 누가 하고.”
“애도 아니고 글씨 읽을 줄 알면 그 정도는 스스로 좀 하자. 네가 움직이면 권시훈 팬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따라붙어서 너무 힘들어.”
“내가 다 처단해 줄게. 따라오지 말라고 혼내주면 되잖아.”
“…그건 너무 잔인하다.”
“그러면 내가 자기 안고 다닐까?”
“못 걷는 것도 아니고 무슨….”
“자기 병약 미소년이잖아.”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치겠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제일 애매해졌다. 병약 미소년 컨셉이라 사람 많은 곳에서는 나대지도 못하고 덩치 큰 두 놈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낑겨서 종일 붙어 다니니 하루하루가 고문이 따로 없었다. 거기에 누군가 다가오면 앞다투어 내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졸지에 나는 제 몸 하나 건사 못하는 찐따가 되어 있었다.
나에게 자유를 달라! 아무리 외쳐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권시훈은 길치인 내가 학교 안을 혼자 돌아다니게 둘 리 없었고, 규하는 내가 없으면 심심하다고 등교하고부터 하교할 때까지 강아지처럼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닌다. 얘는 내가 없을 때 학교를 어떻게 다녔나 싶을 정도다.
“윤진아. 내가 너를 이렇게 좀 쫓아다니는 것 같아 보여도 다 이유가 있다는 거야.”
“뭔 소리야. 너 그냥 심심해서 나 쫓아다니는 거라며. 너 친구 많은데 왜 굳이 내 뒤만 쫓아다니는데.”
“…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너 혼자 두면 애들이 너 가만 안 둘걸?”
“나를 왜… 빵셔틀 시키려고?”
“아니, 예뻐서.”
“…….”
컨셉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웃지도, 울지도 않는 덤덤한 얼굴로 인소스러운 대사를 툭 내뱉는 김규하의 진심이 좀 궁금하다.
심지어 내가 째려봐도 눈도 피하지도 않고, 똑바로 맞춰온다.
아이의 곧은 눈빛은 가끔 나를 흠칫 놀라게 한다. 시훈의 능글맞고 장난기 가득 담은 표정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서 표현하고 말하는 지나치게 솔직한 타입.
“그만 좀 해. 농담도 계속하면 별로 재미없어.”
“그래. 윤진이가 농담이라고 생각하면 농담인가 보지 뭐.”
규하는 자기 뒷목을 커다란 손으로 덮고 꾹꾹 누른다.
우기지도 않고, 그냥 내가 그렇다니까 그렇다고 인정해버리고 허허 웃어 버린다.
매사가 이런 식이니 더 물어볼 수가 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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