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권시훈과 김규하는 성에 ㄱ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본의 아니게 붙어 다닐 일이 많았다. 예를 들자면 - 청소구역이 같다거나, 조별발표에 강제로 차출되거나, 선생님의 이유 없는 심부름의 대상이 되는 등등… 물론 평소에 경쟁하듯 내 양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서로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한 공간 안에 있는 일이 많았지만.
권시훈은 김규하를 굉장히 못마땅해했다. 당연했다. 박윤진 옆으로 지나가는 개미 새끼도 째려봐줘야 직성이 풀리는 소유욕의 화신 권시훈 씨에게는 본인만 한 덩치를 가진 존잘 사내놈이 박윤진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걸 두 눈 뜨고 보고 있는 것 자체가 고문일 것이다.
“너 거머리야?”
“뭐?”
“박윤진한테서 안 떨어져?”
“내가 누구랑 붙어 있건 네가 뭔 상관?”
“아, 됐고 체육 쌤이 심부름시킨 거 얼른 하라고.”
“그냥 옆에 앉아 있는 것도 안 돼?”
“안 돼! 떨어져!”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제삼자인 내가 들어도 심하다 싶은 말까지 들어가며 내 옆을 지키고 있는 규하가 좀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시훈 자기 질투 나는구나? 그럼 자기는 내 무릎에 앉으면 되겠네.”
“뭐? 내가 왜?”
“난 윤진이하고 떨어지기 싫고, 너도 윤진이 옆에 있고 싶다며. 그럼 우리 셋이 같이 있으면 되잖아.”
하지만 김규하는 시훈이 아무리 매서운 공격을 넣어도 타격 따위 입지 않았다. 도리어 황당무계한 말을 일삼으며 서른 살의 정신을 가진, 몸만 어린애 권시훈을 당황하게 했다.
“아, 웃기지 말고. 빨리 가.”
“왜. 쌤이 우리 둘이 같이하라고 시켰잖아.”
“이게 뭐 얼마나 무겁다고 굳이 둘이 가. 너 혼자서도 충분하잖아!”
권시훈은 제 발밑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커다란 무언가를 가리키며 바득바득 성을 냈다. 하지만 규하는 어디서 개가 짖냐는 듯 심드렁했다.
“응. 그건 그런데 쌤 말씀은 잘 들어야지. 시훈이 너는 쌤 말이 그냥 장난 같고 그래?”
“아… 미친. 혼자 가건 둘이 가건 쌤은 신경도 안 쓸 거라고! 그냥 너 혼자 가라고! 저번에 내가 너 대신 심부름 가줬잖아!”
“싫어! 난 너랑 같이 갈 거야! 넌 네 거잖아!”
“하… 미친 새끼야. 제발 좀!”
“응. 나 너한테 미쳤어. 그러니까 같이 들고 가자. 응?”
“돌아버리겠네.”
“돌진 말구. 돌아버리면 내가 널 병원에 처넣을 수밖에 없잖아.”
…언제나 그렇듯 본인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남의 말은 좀처럼 귀담아듣지 않는 18세 김규하 학생은 권시훈 아저씨가 악을 쓰고 밀어내도 한결같다.
“미안한데… 너희 꼭 나를 사이에 두고 싸워야겠니? 나 문제 풀고 있는 거 안 보이니?”
당연하게도 이 두 고래의 싸움에서 등이 터지는 건 사이에 끼어 있는 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사랑싸움할 거면 복도에라도 나가서 하든가. 꼭, 꼭, 꼭!! 내가 앉아 있는 자리를 사이에 두고 입씨름한다. 내가 뭘 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도 며칠 동안 밀려 있던 세계사 모의고사 문제를 푸느라 골머리 썩고 있는데 이 새끼들은 도와주기는커녕 ‘권시훈과 김규하. 둘 중 누가 선생님이 맡긴 짐을 체육 창고에 내려다 둘 것인가.’라는 주제로 삼십 분이 넘게 떠들어 대고 있다.
“자기야.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제야. 건강한 인간관계 유지를 위해서는 기브 앤 테이크가 당연한데 지금 이 상황은 일방적으로 내가 손해 보는 구조잖아. 이게 가당키나 해?”
“자기야. 내 말을 들어봐. 우리 인연이 보통 인연이야? 이렇게 함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행운을 가질 수 있는 건 분명 다 하늘의 뜻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자기도 들었지? 분명 선생님께서 권시훈과 김규하가 ‘같이’ 들고 교무실로 오라고 했잖아. 그치?”
“김규하. 이 또라이야. 누구 자기보고 자기래?”
“몇 번 말해. 네가 ‘내 자기’니까 윤진이도 당연히 ‘내 자기’라니까? 너 약간 기억력이 까마귀이고 그래?”
“야!!!”
대화는 대부분 권시훈이 머리를 쥐어뜯는 걸로 절정을 맞는다.
“아아아아!!!”
그리고… 마지막은 나의 사자후로 끝을 맺는다.
“둘 다 그마아안!”
벌써 이게 몇 번째인가. 고등학교에 들어온 이후로 내 목청은 단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나는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고, 싸움은 경멸한다. 규하는 아직 아기니까 이해해 줄 수 있다 치는데 다 큰 어른인 권시훈이 애 하나 이겨 먹으려고 이 악물고 달려드는 건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유치하게.
“징글징글하다. 정말! 그만 좀 싸워어엇! 혼자 가든 둘이 가든 가위바위보로 정하든가! 알아서 좀 해!”
“아, 자기야아!”
제 편을 들어주는 것 같지 않으니 시훈은 대번에 심통을 낸다.
“자기야아~ 나두나두 나두 편들어줘!”
질세라 규하도 내 손을 붙들고 매달렸다.
“됐고, 정신 사나우니까 내 눈앞에서 다 꺼져!”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짜증 나서 규하의 손을 뿌리쳐 버렸다. 그러자 또 비 맞은 강아지처럼 꼬리를 축 늘어트리고 입을 쭉 내민다.
“히잉. 윤진이는 이제 내가 싫은가보다….”
“아니,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건데. 그런 거 아니야….”
“그런데 왜 꺼지라고 해….”
“아, 그건 너희가 너무 시끄럽게 하니까 욱해서….”
지금 내가 왜 변명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왜 이래. 진짜. 분리불안 걸린 애도 아니고, 나이도 드실 만큼 드신 분들이 편을 드네, 마네 해가며 사람 속을 뒤집는 건데.
“어휴. 모르겠다. 마음대로 해. 너희 비위 맞추다가 속이 다 뒤집힐 것 같아.”
다 듣고 싶지 않아 손을 내저으며 짜증을 내었다. 그러자 어떤 아이디어라도 떠오른 듯 권시훈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럼 자기도 같이 가자.”
“…뭐? 나?”
“난 자기하고 김규하랑 나 없는 데서 단둘이 있는 꼴은 죽어도 보기 싫어.”
“뭐래. 이 교실에 우리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야. 안 돼.”
“너 그거 억지야. 시훈아.”
“억지인 거 알고, 나 속 좁은 것도 아니까 같이 가주라. 응?”
“…….”
억지라는 건 아니 다행이구나.
“어어! 그럼 나도! 나도 자기랑 같이 갈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규하가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동시에 권시훈의 눈썹이 바짝 올라갔다.
“야! 따라 하지 말라고!”
“내가 언제!”
하아… 내 한숨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대체 나는 전생이 무슨 죄를 지은 걸까. 아마 매국노가 아니었을까. 그러지 않고서야 서른둘 먹고 열여덟과 몸만 애새끼인 서른 살 사이에 끼어 성대나 손상시키고 있다니.
“자기야. 또 머리 아파? 어디 봐봐.”
“윤진 자기야. 열나? 왜 그래에.”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솥뚜껑 같은 손 두 개가 경쟁하듯 덮어지자 힘에 밀려버려 휘청 뒤로 넘어갔다.
“어어!”
“어어어!”
그와 동시에 시훈과 규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한 놈은 내 등을 받쳤고, 한 놈은 의자를 붙잡아 다리가 넘어가려는 것을 막았다.
가까스로 바닥에 뒤통수를 박는 참사는 막았지만 종례 직후의 교실에는 아직 아이들이 많이 남아 있었고, 당연히 우리를 보는 눈도 많았다. 나도 나름 두 다리 멀쩡한 신체 건강한 남자인데 무려 두 남자아이의 품에 안긴 꼴이 썩 아름다워 보이진 않을 것이다.
“…놓아줘. 제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두 놈에게 겨우 말했다. 그러나 권시훈과 김규하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듯했다.
“김규하. 내가 윤진이 부축했으니까 좀 놓지?”
“너야말로 위험하잖아. 윤진 자기 허리 부러지겠어.”
“부러지면 내가 평생 들고 다닐 거니까 놓으라고.”
“싫은데?”
……나 정말 너희 때문에 쪽팔려서 명이 짧아지는 것 같아. 이제 제발 그만해.
결국, 아무리 싸워도 실랑이가 끝나지 않아, 이 일과 전혀 관련 없는 나까지 체육 창고로 끌려가게 되었다. 나는 죽겠는데 두 놈은 뭐가 그리 좋은지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개자식들. 너희 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
“자기는 체육 창고 처음 가 보지?”
“갈 일이 없잖아.”
끼익,
기분 나쁜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서늘하고, 습했다.
매캐한 냄새가 나는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발을 디딜 때마다 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허공으로 흩어졌다.
내가 머뭇대자 시훈은 말없이 어깨의 짐을 한번 들쳐메더니 홀연히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규하는 내 옆에 바짝 붙어서며 팔목을 슬쩍 그러쥐었다.
“무서워?”
“어? 아, 무섭다기보다는… 긴장된달까?”
“그게 무서운 거지.”
“…….”
“사실 나도 무서워서 오기 싫었거든. 시훈이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치.”
그러게. 시훈이가 있어서 다행이네. 만약 없었다면 다 큰 남자애-심지어 한 명은 30대- 둘이 체육 창고 앞에 서서 오도 가도 못하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을 거 아냐.
저만치 어둠 속에서 꾸물꾸물대는 시훈이의 등판을 멍하니 보았다. 허리에 비해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넓은 어깨가 하복 셔츠를 뚫고 나올 것 같다. 내 남친, 어른일 때보다는 못 해도 고등학생 때부터 한 덩치 했구나.
“윤진아. 시훈이 등이 그렇게 좋아? 눈을 떼질 못하네?”
“어…? 아, 아냐. 아냐!”
“흐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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