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규하는 그 큰 눈을 실처럼 가늘게 떴다. 누가 보아도 ‘나는 너를 의심하고 있다.’라는 눈빛. 속을 들킨 것 같아 은근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너무 티 났나. 나는 아주 아주 가끔, 7년 만난 애인을 변태처럼 훑고는 했다. 이건 내가 이상해서가 아니라 권시훈을 보면 누구나 다 똑같은 반응일 테다.
“몸은 내가 더 좋은 것 같은데. 키는 좀 작아도 어깨는… 내가 더 낫지 않나?”
“응?”
“봐. 만져 볼래?”
얘가 갑자기 뭐라는 거야. 싶었는데 말보다 행동이 빠른 김규하는 냅다 내 손을 붙잡더니 제 가슴 위에 턱 올려 버렸다.
“이이익! 야! 너 뭐 하는 거야!”
“어때? 괜찮지? 이 정도면 시훈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윤진이 충분히 지켜 줄 수 있는데.”
괜찮고 나발이고 너무 놀라 버려 화다닥 뒤로 물러나 규하를 노려보았다. 세상에. 18살 몸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이 단단한 양감이 정녕 미성년자의 것이 틀림없는 것인가?
“내,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지켜!”
얼굴이 터질 것 같았지만 손으로 가리면 부끄러운 게 티 날까 봐 부러 이를 악물고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런데 규하는 놀라거나 당황하는 대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응. 알지, 알지. 그래도 이왕이면 혼자보단 둘이 낫잖아.”
“참나….”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아 바짝 끌어올렸던 어깨를 툭 떨어트렸다. 농담이라는 걸 도통 키울 줄 모르는 나로서는 김규하의 저 느물거림을 이길 수 없다.
“와. 미쳤네. 다 썩은 거 아니야?”
저 안쪽에서 시훈의 불평 섞인 외침이 들려왔다. 목소리에 날이 바짝 서 있는 걸 보니 창고 안이 생각보다 아주 많이 지저분한 모양이다.
더럽고 너저분한 것을 싫어하는 권시훈에게 금주고 체육 창고는 지옥 불에 떨어져야 마땅한 곳이었다. 손바닥만 한 창문 사이로 겨우 들어오는 한 줄기 빛에 먼지가 안개처럼 폴폴 피어오르는 게 밖에서도 보일 정도였고, 모서리가 삭아 속이 다 튀어나온 낡은 매트며, 바람이 죄 빠져버려 제 역할을 잃어버린 축구공, 농구공… 그 밖에 어디에 쓰는지도 모를 끈이나 밧줄 같은 것들이 엉망으로 처박혀 있었다.
“젠장. 놓을 데가 있어야 놓고 가지.”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는지, 도로 창고 입구 쪽으로 나온 권시훈은 꼭 부모님의 원수를 보는 것 같은 눈을 한 채 어금니를 꽉 깨물고 으르렁대었다.
그의 말대로 창고 안은 정말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꽉 들어차 있어 시훈의 어깨 위에 얹힌 짐 따위는 감히 밀어 넣으려는 시도 자체를 할 수 없었다.
“아- 시훈아. 그냥 아무 데나 구겨 넣고 가자.”
창고 문에 삐딱하게 기대 서 있던 규하는 귀찮음이 그득한 목소리로 시훈에게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어디다가.”
“이 안에?”
“봐라. 여기 놓으면 문 안 닫히잖아.”
“어. 그러네.”
시훈의 말대로 막상 땅에 내려놓고 보니 짐은 문밖으로 반 정도 삐져나와 버려 이대로 두고 갔다가는 훤히 문을 열어놓아야 할 판이었다.
“하, 나… 새끼가 창고 청소시키려고 수 썼네.”
“새끼?”
“…아니다.”
규하의 물음에 시훈은 고개를 내저으며 은근 대답을 피했다. 규하는 의아한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나를 돌아보았지만, 나 역시 해 줄 말이 없었기에 조용히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말실수를 해도 꼭 저렇게 아슬아슬하게 할 건 뭐야. 나 같으면 무서워서라도 학교를 관두든가, 정 안된다면 없는 듯 조용히 지내며 치료를 기다리겠지만 이미 숨어 지내기에는 너무나 멀리 와버리고 말았다.
얼마 전 체육 선생님과 본인이 실제 나이로 동갑이라는 사실을 안 뒤로 나와 단둘이 있을 때마다 그 새끼, 그 자식이라고 궁시렁대더니 결국 습관이 한 건 하고 만 것이다. 뭐, 고등학생들이 선생을 뒤에서 씹어대는 거야 흔한 일이니 그렇게까지 이상하게 보이진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실수 한 번이 더 큰 실수로 이어질까 봐 심장이 덜컥했다.
규하와 나의 대화가 끊긴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훈은 발밑에 나뒹굴고 있던 묵직한 나무 막대기를 집어서 한쪽 벽에 가지런히 세워두었다. 역시나 입으로는 욕하면서도 청소를 시작할 모양이다.
“시훈아. 진짜 청소하려고?”
“그럼. 거짓말인 줄 알았어?”
“쌤이 가져다 두라고만 했지 어떻게 두라는 말은 없었잖아. 뭐가 되었건 두고 가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돕기 싫으면 꺼져.”
꺼지라는 한 마디를 끝으로 시훈은 마구잡이로 쌓여 있는 매트를 들어 올려 정리하고, 바닥에 뭉쳐 굴러다니는 먼지 뭉치를 주워 모았다. 더러운 것을 보고 나 몰라라 돌아선다는 것은 권시훈에게 있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니 적어도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내기 전까지는 정리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제 성격이라지만 청소업체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열 낼 일인가.
“권시훈 쟤는 원래 저렇게 부지런해?”
규하는 창고를 모조리 들어 엎을 기세인 권시훈의 우락부락한 팔뚝을 가만 바라보더니 한마디 툭 던졌다.
“응?”
“하라는 것만 하고 가면 될 걸, 왜 저러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7년을 넘게 봐 왔지만 권시훈의 정리벽과 깔끔병은 나 또한 풀지 못한 미스터리였기에 작게 고개를 저었다.
첫 만남부터 -내 기준에- 평범하지 않았고, 사귀는 내내 본인이 자유로운 영혼을 몸소 보여 주었던지라 당연히 적당한 타협점을 찾은 지저분함을 가지고 살 것이라 확신했었다.
하지만 막상 한집에 살아보니 내 판단은 완벽한 착각이었다. 나 또한 더러운 것보다는 깨끗한 게 좋지만 권시훈은 그 정도가 심했다. 모든 물건은 항상 제자리에 있어야 했고, 발바닥에 이물질이 걸리는 걸 싫어했다. 하다 하다 냉장고의 요구르트병조차 일렬종대로 맞춰 놓아야 마음이 놓인다며 냉장실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는 진지하게 얘를 버리고 도망가야 하나 고민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에게 그 깔끔함을 강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저 때문에 힘들까 싶어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 혹여 내가 제 기준에 맞지 않더라도 어지간해서는 불편한 티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좀 적당히 해라! 결벽증이냐?”
지루함이 극에 달했는지 규하가 시훈을 향해 소리쳤다. 긴 몸을 굽혀 땅바닥만 노려보고 있던 시훈은 고개를 슥 돌려 나와 규하 쪽을 돌아보았다.
“눈에 더러운 게 보이는데 그냥 두고 가라고?”
“청소는 너희 집에 가서 해. 나 다리 아퍼.”
“싫어.”
“아, 권시훈 쫌.”
한 번도 우리 앞에서 웃는 낯을 지우지 않았던 규하는 되도 않는 시훈의 고집에 인내심에 바닥이 났는지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보이는데 나 몰라라 하는 건 성미에 안 맞아서 안 돼. 대충이라도 치워놓아야지.”
“와… 성격 진짜 특이하네.”
“너만 할까.”
“너랑 나랑은 결이 다르지!”
“아, 됐고, 뒤에서 쫑알댈 시간 있으면 좀 도와 보든가. 아니면 먼저 들어가. 난 있어 달라 한 적 없다.”
“이씨….”
철통같은 권시훈의 방어에 규하는 입술을 깨물고 욕지기를 삼켰다. 그래. 암만 규하가 똑똑하다 한들 세상 풍파 다 겪은 아저씨의 말발을 이기긴 힘들 테지.
뭐, 작정하고 꼬투리 잡고 늘어지려면 충분히 가능하겠다만 그러기에 규하는 퍽 무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뭐 하면 되는데.”
“오, 진짜 도와주게?”
“아! 너 두고 가면 윤진이가 걱정하잖아. 너 좋으라고 돕는 거 아니니까 그런 줄 알아.”
“허. 여기서 윤진이 핑계를 댄다고?”
“너도 윤진이 신경 쓰고 있는 거 다 알아. 그러니까 얼른 끝내버리고 가자. 좀.”
불만으로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던 규하는 굳혔던 표정을 풀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이 상황을 빠르게 타개할 방법은 ‘청소를 빨리 끝내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도 도와야겠지. 나를 지나쳐 권시훈 쪽으로 다가가는 규하 옆에 붙어섰다.
“윤진아. 넌 그냥 있어.”
그런데 규하는 내 팔을 살짝 붙잡더니 고개를 저었다.
“왜. 나도 도울게. 둘보다는 셋이 낫잖아.”
“먼지 마시면 폐에 안 좋아.”
얘가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무슨 폐에 몹쓸 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먼지 조금 가지고 병이 날 것처럼 약해 보이는 건가?
“무슨… 그렇게 따지면 너희 폐 건강에도 안 좋은 거 아냐?”
“아니야. 우린 괜찮아. 윤진이만 괜찮지 않아.”
“뭐라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더 들어줄 수 없어 눈을 홉뜨고 팍 쏘아 보았다. 그러니 금세 커다란 덩치를 움츠리며 꼬리를 축 늘어트린다.
“자기가 아플지 모른다는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이 아파서 그래.”
“너 상상력이 정말 남다르구나?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왜 걱정해.”
“그건 권시훈도 같은 마음일걸?”
안 듣는 척하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저 거대토끼의 너를 등을 흘긋 바라보았다. 잔뜩 성나 꿈틀대는 등 근육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김규하가 말하는 대로 거기 가만히 서 있기만 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오래 안 걸려. 금방 올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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