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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33화 (33/85)

33화

그깟 청소 따위 돕는다고 큰일이 날 리 만무했다. 한 번 더 우겨보려다 김규하는 박윤진을 ‘병약’하다고 알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마지못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규하는 그제야 만족했는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등을 돌려 창고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시훈아. 이거 어디다가 둬? 아무 데나 두면 되나?”

“거기 말고! 넌 기본도 모르냐? 같은 물건끼리는 같은 데다 둬야지.”

“아! 어쨌거나 깨끗해 보이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이거 진짜 노답이네. 모르겠으면 내가 해 놓은 거 보고 눈치껏 따라 해. 귀찮게 일일이 물어보지 말고.”

“자기. 진짜 성격 더럽다. 도와준다 해도 지랄이야.”

“난 분명 하기 싫으면 먼저 가라고 했다!”

“에잉. 왜 이래 또오.”

규하는 시훈이의 팔을 붙들고 늘어졌고, 시훈은 질색하며 규하를 밀어내었다.

본의 아니게 나는 창고 바깥에 어정쩡하게 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꼴이 되고 말았지만, 그냥 자리를 뜰 수는 없어 문에 등을 기대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먼지!! 먼지먼지!”

“그렇게 거슬리면 숨을 참든가!”

“히잉. 참아도 눈이랑 코에 들어오잖아.”

“아… 혈압 올라.”

두 사람의 대화를 멍하니 듣다 보니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냥 딱 저맘때쯤 소년의 평범한 대화들. 욕과 비난이 난무하지만, 악의는 없는. 권시훈과 김규하에게는 이렇게 투닥대고, 으르렁대다 피식 웃어버리는 것이 일상이었을 테지.

내가 가지지 못했던 청춘의 한 조각을 가지고 있는 권시훈과 이제 청춘을 써 내려가고 있는 김규하.

문득 입 안이 씁쓸해져서 작게 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묻어나오는 그 평범함이 불현듯 부러워졌다.

‘박윤진 그 새끼는 또 열외야?’

‘걔 바쁘잖아. 올림피아드인가 그거 준비한다고 쌤한테 불려갔을걸? 축제 따위 신경이나 쓰겠냐.’

‘기분 나쁜 새끼. 저 새끼 아무리 생각해도 일부러 행사 빠지려고 겉도는 거 같아. 재수 없어.’

‘내 말이. 남은 사람들 자존감 떨어트리지 말고 잘났으면 잘난 놈들 모인 데로 꺼지지. 왜 여기 붙어 있는지 모르겠어.’

나는 그저 남들보다 조금 잘하는 게 있다는 이유로 그 나이에 누려야 할 것들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또래와 어울려야 할 시간에 선생님과 어른들에게 불려 다니며 그들의 전시품이 되어야 했다.

상장과 상패는 쌓여갔지만 늘 헛헛하고 텅 빈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사실, 외로웠지만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갈 용기 따위 없어 겉돌기만 했다.

나도 너희와 같은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지금보다는 아주 조금은 더 밝고, 긍정적이고, 소심하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에이.”

세차게 고개를 저어 몰려오는 잡념을 떨쳐내었다.

쓸데없는 생각.

괜한 감상에 빠져봤자 별 도움도 안 되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근래 들어 자주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 이유는 아마 여태 상상만 해 왔던 ‘과거로의 회귀’가 그렇지 않아도 생각 많은 나에게 깊숙이 묻어두었던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탓일 테다.

신발 끝으로 모래를 주욱 긁어모아 발부리로 툭툭 건드렸다. 어설프게 쌓인 모래 산이 풀썩 쓰러지는 것을 가만 바라보았다.

나는 내 속의 박윤진을 붙들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그만 청승 떨어야지. 하루 종일 괜찮다가 왜 또 우울해지려 하는 건데. 제발 정신 챙겨. 박윤진. 나잇값 좀 하자고.

“야! 박윤진!”

다행히 그 청승은 누군가가 내 이름을 우렁차게 부르는 외침 덕에 멈출 수 있었다.

“나?”

“그래. 너. 박윤진.”

“나를… 왜?”

나를 부른 사람은 같은 학교 교복을 입은, 나보다는 크고 규하보다는 조금 작은, 흰 피부에 동그란 안경을 낀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아이였다.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낯이 많이 익지는 않아 눈을 끔벅이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담임이 할 말 있다고 남으랬다며. 어디 가면 간다고 미리 이야기했어야지. 한참 찾았잖아.”

“아….”

그제야 오전에 복도에서 마주친 담임이 수업 마치고 교실에 남아 있으라는 말이 떠올랐다.

“너 도망간 줄 알고 담임이 한참 지랄했어. 빨리 가자.”

“어, 어. 알았어.”

고개를 빼 창고 안을 살폈다. 시훈과 규하에게 잠깐 다녀오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이놈들은 창고에서 미로찾기라도 하는지 아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뭐 해! 가자니까?”

“자, 잠깐만. 안에 시훈이랑 규하 있는데 나 먼저 간다고 말하고 가야 할 것 같은데.”

“없으면 갔나보다 하겠지. 폰 뒀다 얻다 쓰냐?”

“그래도….”

“아, 빨리. 늦으면 나까지 담임한테 깨진다고.”

아이는 내 팔을 끌어당기며 얼른 가자며 재촉해댔다.

그래. 어디 먼데 가는 것도 아니고 눈에 안 보이면 전화하겠지. 어디 갔었냐고 난리 치면… 뭐 내가 애냐고 소리 한번 질러주지 뭐. 그간 학교 안에서 두 사람 없이 혼자 움직여 본 적이 없어 양옆이 조금 허전했지만 찜찜한 기분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걸음을 옮겼다.

창고를 지나 본관 후문으로 향했다. 교실로 올라가려면 별관이 아닌 본관으로 가는 걸 보니 담임은 나를 기다리다 교무실로 가 버렸나 보다.

“저기….”

“어.”

내 부름에도 아이는 돌아보기는커녕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성의 없는 대답은 덤이었다.

“천천히 좀 가. 왜 이리 걸음이 빨라.”

어쩔 수 없는 신체 나이 차이 때문인지 분명 같이 출발했는데, 점점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쟤는 발에 모터라도 달았나. 경로우대도 모르냐. 이놈아!! 좀 천천히 가라고!

“…야!”

결국,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내가 꽥 소리 지르자 아이는 내 쪽을 휙 돌아보더니 눈썹을 추켜 올렸다.

“아, 왜!”

“이익….”

쌀쌀맞은 면상이 쌀쌀맞게 대답했다. 젠장. 저 쪼끄만 게 어디 싸가지 없이. 본래 성격 같았으면 당장 한소리 하고도 남았겠지만 권시훈이 신신당부한 ‘유약하고 소심한 병약 미소년’ 역할을 이행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나를 붙잡는 바람에 하려던 말을 삼켰다.

“너, 너, 혹시.”

“혹시 뭐.”

“그… 너 낯이 익는데 혹시 우리 반?”

“엉? 뭐?”

“우, 우리 반이냐…고.”

내 말에 아이의 입술이 꿈틀 움직이고 미간이 파스스 구겨졌다. 순간 무언가 실수했다는 직감이 스쳤다.

“여태 몰랐던 거냐? 아니면 나 열받으라고 일부러 물어보는 거냐.”

“응?”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내가 너랑 같은 반이 아니라면 담임이 같을 리가 있어?”

“아, 그러네….”

미쳤어. 박윤진! 같은 반이냐고? 어이가 없어 유치원생도 혀를 내두르겠다.

“너랑 나랑 같은 반인 것도 몰랐고… 그럼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네?”

“혹시 반장… 뭐 그런 거야?”

어, 그러고 보니 요즘도 반장이라는 말을 쓰나?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입 밖으로 말이 나오고 난 뒤였다.

“그건 어떻게 맞췄네? 때려 맞춘 건가?”

다행히 반장은 맞는 모양이다.

“그건 아냐. 너 생긴 게 반장 같아.”

“진짜. 웃기는 새끼네.”

민망함이 몰려와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지만 만약 그랬다가는 저 아이가 나를 어딘가에 신고할 것 같아 뒤통수로 손을 가져가 벅벅 긁었다.

“…미안.”

“박윤진 너도 참 대단하다. 전학 온 지가 언젠데. 반에 이 정도로 관심이 없다고?”

반장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픽 터트렸다. 하지만 더 이상 빈정대거나 화내지는 않았다.

괜히 뻘쭘해져 손가락 끝을 뜯으며 반장과의 거리를 벌렸다. 상식적으로 전학 온 지 몇 주째인데 여태 반장 이름도 모르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하지. 아무리 흉내뿐인 학교생활이라 해도 아이들에게 먼저 관심이라도 가져 볼 걸 그랬나.

“하기야 김규하랑 권시훈이 널 워낙 싸고도니 누가 감히 너한테 먼저 다가갔겠냐. 너도 두 놈이 딱 붙어 있으니 다른 애들이랑 어울릴 기회가 없었을 테고.”

젠장. 이제 내 이미지 따위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려 돌이킬 수 없게 되었구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나는 반 아이들에게 권시훈과 김규하의 키링 정도로 여겨지고 있는가 보다.

“괜찮아. 두 놈 성격 장난 아니잖아. 빠져나오기 뭣할 거라는 것 정도는 다들 이해하고 있어.”

“…….”

이도 저도 못 하는 내 입장을 다 이해한다는 듯한 반장의 말에 나는 더욱 무안해져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김규하 걔는 진짜 의외야.”

“규하가? 왜?”

“그 새끼 쫓아다니는 애들 많은 건 알지?”

“응. 알지.”

“걔가 인기는 많은데 딱 누굴 정해서 붙어 다닌 적이 없었거든. 베프가 없다고 해야 하나? 점심시간이면 엎드려 잠만 자고, 학교 끝나면 누가 쫓아오는 것같이 홱 나가버리고. 여튼 이상한 놈이야.”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라 고개를 기울이고 상상해 보았지만 역시나 쉽사리 그려지지 않았다.

인싸 중의 상인싸.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해도 모든 이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김규하가 점심시간 빈 교실에 혼자 덩그러니 엎드려 있다고? 규하의 곁에 누군가가 없었다라. 아직도 와닿지 않았지만, 나보다야 반장이 김규하를 더 오래 보았을 테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왜? 상상 안 가냐?”

“어. 좀…?”

“오히려 나는 요새 인간미 넘치는 김규하가 더 적응 안 된다. 하도 유난이길래 걔가 너 좋아하는 줄.”

“…뭐?”

“넌 모르겠어?”

“모르겠는데.”

내 대답에 반장은 실소를 터트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와, 모른다고? 제삼자인 나도 이상하다 느끼는데 당사자인 네가 모른다고? 김규하가 들으면 서운해하겠다.”

“진짜 그런 낌새 느낀 적 없는데….”

“…너 좀 네 생각이 없냐? 아니면 눈치가 드럽게 없거나.”

“…아니라니까.”

“허….”

정말 아니라니까 자꾸 맞다고 해. 반장은 똘똘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헛똑똑이가 분명했다.

규하가 다른 사람보다 좀 많이 들러붙고 사랑이 넘치는 성격이라 오해하는 것 같은데 잘못 짚어도 한참 잘 못 짚었어. 우리는 그저 친구… 라고 하기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여튼 친구라고.

“이렇게 물러 터졌으니 그 두 새끼가 널 혼자 못 두지.”

“응?”

“너-무 맹해 보이면 언젠가 잡아 먹힌다.”

반장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다시 몸을 돌려 앞서 나갔다. 변명도, 반박도 할 기회를 모두 잃어버린 나는 잠자코 반장의 뒤를 따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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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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