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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34화 (34/85)

34화

처음 봤을 때부터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담임의 외모는 볼수록 정이 가기는커녕 인상만 찌푸리게 한다. 무인도 혹은 정글에서 흙 파먹고 살다 온 것처럼 세상 풍파 다 짊어진 푹 파인 미간이며, 늘 불만에 가득 차 비죽이는 얄팍한 입매도 비호감이다.

“넌 어디 갔다가 이제 오냐? 정신 빼놓고 다니지 아주. 어?”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짜증 나는 건, 저보다 어린 학생이라고 함부로 찍어 누르려는 고압적인 태도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한 걸 아는 놈이, 어? 교실에 얌전히 붙어 있으라는, 말은, 귓구녕으로도, 안 듣고, 밖으로 튀어? 너 세상이 좋아졌으니 망정이지 예전 같았으면 뼈도 못 추렸어. 인마.”

담임은 손에 든 서류철 모서리로 내 배를 쿡, 쿡 찌르며 속을 긁어내렸다. 얇디얇은 하복 셔츠를 뚫고 맨살에 서늘한 기운이 닿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릴 뻔했지만 여기서 움찔하거나 싫은 티를 내면 다른 선생님들 앞에서 본인 쪽팔리게 했다고 더욱 갈궈댈 게 뻔했기에 어금니를 꽉 깨물고 억울함을 참았다.

그 뒤로 담임은 요즘 교육계야말로 체벌 시스템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둥, 애새끼들이 버릇이 없어졌다는 둥 한참 동안 개소리를 늘어놓았다.

연식을 보아 대충 짐작은 했지만, 이 자식은 한창 내 또래들이 학교에서 이유도 없이 먼지 나게 두들겨 맞을 시절에 꿀 좀 빨던 악질 중의 악질이 분명했다.

“…저기 선생님. 하실 말씀이 뭔가요. 저 그 이야기 들으러 온 건데.”

가만 듣고 있다가는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까지 나올 것 같아 담임의 말을 끊었다. 일장 연설을 방해받은 담임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퇴근 시간이 가까워진 것을 확인하더니 대뜸 본론을 꺼냈다.

“아, 그래. 하나 물어보자.”

“네?”

“너 요새 규하랑 좀 가깝게 지내는 것 같은데 맞냐?”

오늘 ‘김규하의 날’이라도 되는 건가? 왜 보는 사람마다 규하를 찾는 거지?

“규하요?”

“어어. 내가 너무 신기해서 말이지. 걔가 누구랑 붙어 다니는 애가 아닌데 너랑 권시훈한테는 유별나게 구는 것 같아서.”

“전학 온 날부터 규하가 학교생활 많이 도와주고 있긴 한데… 그게 유별난 건가요?”

별게 다 신기하다 싶어 되물었더니, 담임은 무언가 꺼림칙한 얼굴로 나를 흘긋 올려다보았다.

“유별나지. 선생들이 말 붙여도 무시하던 놈인데, 너희들 앞에서는 자진해서 떠들고 다니잖냐. 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거냐?”

“그냥 잡담이죠.”

“아, 그래?”

“그건 왜 물으시는 건데요?”

“그, 혹시 말이다. 규하가 지나가면서라도 내 이야기 안 하던?”

“선생님 이야기를요? 걔가 왜요?”

“뭐 특별한 일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학교생활에 대한 고충이나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 보면 담임선생님에 대한 말도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에둘러 말하는 것 같지만 속내가 너무도 빤히 보이니 어이없었다.

“아, 규하가 선생님 뒷담화라도 했을까 봐요?”

정곡을 찔렸는지 담임은 손과 고개를 휘휘 저으며 부정한다.

“떽! 윤진이 너는 선생님을 뭐로 보고! 너희들끼리 하는 이야기 가지고 뭐라 하려는 게 아니라, 규하가 선생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야!”

“…규하는 선생님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 입 대지 않는 편이라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은데.”

“그래?”

“네.”

“내 이야기는 안 했다 이거지.”

기껏해야 열여덟 꼬맹이, 1년만 지나면 남이 될 아이를 이리도 신경 쓰는 건 담임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분명 뭐가 있는 것 같은데 먼저 물어보자니 학생의 위치에서 건방 떠는 게 될까 봐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고 맞잡아 포갠 손가락을 꾹꾹 누르며 담임의 뒷말을 기다렸다.

“그러면 혹시, 윤진이 너. 규하 아버지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아뇨?”

“친하다면서 그런 것도 말 안 해?”

“규하 가족 이야기를 제가 굳이 알 필요가… 있나요?”

“에휴. 역시 아직 어려서 그런가, 뭘 모르네.”

어리다고 하기엔 박윤진은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는데요. 아마 규하와 내 나이 차보다, 선생님하고 내 나이 차가 덜 날 것 같은데.

“윤진아. 모름지기 사람은 줄을 잘 서 놓아야 사는 게 편한 법인데 말이야.”

“…?”

“넌 똑똑하기만 하지 눈치는 영 아니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고등학생 박윤진은 여전히 담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눈을 깜박였지만, 그 속의 서른두 살 박윤진은 저 시커먼 속을 모두 눈치채버렸다.

정황상 김규하의 아버지는 담임이 껌벅 죽을 만한 높으신 분인데 규하를 통해 줄을 대고 싶어도 갑자기 친한 척하기 뭣하니 가깝게 지내는 나를 구워삶아 한몫 잡아 보려는 심산이 분명했다.

헛웃음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주먹을 꽉 쥐고 참았다. 기회주의자 새끼. 평소에 애들한테 잘할 생각이나 하지. 치사하게 뒷줄 댈 생각 따위나 하고 있다니.

“야. 됐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 붙들고 말하기도 뭣하고, 가서 볼일 봐라.”

“그냥 가요? 아까 하실 말씀 있으시다고….”

“다 했으니까 가 보라고!”

내가 끝까지 모르는 척으로 일관하자, 담임은 버럭 짜증을 내며 아예 몸을 돌려 버렸다.

“가 보겠습니다.”

성난 뒤통수를 내려다보다 가볍게 묵례하고 교무실을 나섰다.

어른의 눈으로 보자면 담임은 편협한 인간이기는 해도 마냥 나쁜 놈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선생 자격이 없다 손가락질당하더라도 살고 싶을 테니까, 기왕지사 살아남을 거라면 저한테 조금이라도 이득이 되는 쪽으로 서고 싶을 테니까. 아마, 담임은 이번 인사고과에서 본인이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것이라 스스로 결론 내고 나름 살 방법을 도모한 것이리라.

아무리 그래도 자기 반 학생을 불러다 놓고 같은 반 친구의 내막을 묻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간도 크지. 의리를 목숨보다 중요시하는 내가 기분 더러워져서 규하한테 뭐라 일러바칠 줄 알고.

‘규하한테 물어나 볼까.’

이쯤 되니 궁금하지 않더라도 규하의 아버지에 대해 알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선생까지 두 팔 걷고 나서서 아부하려 하는 건지. 대기업 회장이나 정치계에서 힘깨나 쓰는 인물이려나.

뭐가 되었건 김규하랑 어울리는 그림은 아니네. 모기업의 숨겨진 후계자 김규하, 정계를 휘어잡는 검은손 김규하… 입 다물고 무표정이라면 제법 어울릴지도 모르겠다만, 잔뜩 풀어져서 헤헤 웃는 얼굴을 떠올리니 부조화도 이런 부조화가 없다.

에이 몰라. 김규하의 정체가 뭐건 간에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인데 더 깊게 알아봤자 머리만 아플 게 뻔하다. 필요 없는 문제는 제쳐두고 당장 눈앞의 것만 생각하자.

터덜터덜. 체육 창고로 돌아가는 길이 멀고도 멀었다. 느릿하게 발을 내디디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덧 연분홍빛 노을이 옅게 깔리고 있었다. 아, 피곤해. 별 대단하지도 않은 이야기 듣다가 아까운 시간만 축냈네. 얼른 집에 돌아가서 배 깔고 누워 자고 싶다.

본관 뒤편으로 나와 아무도 없는 뒷마당을 가로지른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주변이 빠르게 어두워지며 가로등이 하나둘씩 불을 밝혔다. 덩달아 흐릿해진 시야를 다잡으려 눈에 힘을 주고 아주 천천히 처언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최근 들어 스트레스와 과로 때문에 밤눈이 어두워진 탓에 멋모르고 다니다 꼴사납게 넘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지라 사회적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각별히 조심하는 중이다. 권시훈은 내가 덜렁거리는 탓이라 했지만, 세상천지에 나만큼 꼼꼼하고 신중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따위 망언을 하는지….

“어…?”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나는 내 발에 걸려 보기 좋게 앞으로 나뒹굴었다. 와중에 살려고 아무거나 붙잡는다는 게 상자 더미를 짚어버렸다.

“으아악!! 뭐야!”

공중으로 솟구치는 네모난 물체들로 시선이 천천히 따라갔다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뒤늦게 알아채고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곧이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등 위로 빈 상자들이 와르르 떨어져 내렸다.

“으으으….”

본의 아니게 박스 비를 두들겨 맞은 등이 아파 죽겠다고 비명을 질러댔지만, 물리적인 고통보다는 쪽팔림이 더 컸다. 다 큰 성인이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이불킥감인데, 박스 무덤에 파묻히기까지….

‘아오. 이게 뭔 개 쪽이야. 진짜.’

아니야. 아직 희망은 있다. 넘어지기 바로 직전에 본 뒤뜰에는 나 말고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고, 하교 시간이 한참 지났으니 이 외진 곳을 오가는 놈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만 아무렇지 않은 척 털고 일어나 자리를 정리하고 가던 길을 가면 아무도 이 민망한 상황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엎어진 채로 겨우겨우 손을 뻗어 땅을 짚었다. 무릎과 팔이 욱신거렸지만 참고 일어날 만했다.

힘을 내. 윤진아. 너는 할 수 있어. 어서 일어나 너의 저력을 보여….

“어? 뭐야? 여기에 박스가 왜 엎어져 있냐?”

정말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바로 내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남자아이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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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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