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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35화 (35/85)

35화

사실, 내가 밑에 깔려 있다는 게 흉 될 일은 아니었지만 왜인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건… 뭐랄까. 동급생들 사이에서 놀림 받고 싶지 않은 고등학생의 마음이라고 해두자.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치고 갔나 보지. 허얼. 완전 개판 됐네?”

“내일 보건 쌤이 보면 게거품 물겠는데.”

“이 상자가 다 보건 거야?”

“몰라. 오늘 아침에 보건실에 뭘 잔뜩 사놨더라고. 지나가다 걸려서 짐 옮기는 뺑이쳤는데 저 상자 절대 버리지 말고 쌓아두라더라? 접지도 말고 원래 모양 그대로.”

“미친. 상자 모으는 변태인가.”

“내 말이. 꼭 지 생긴 대로 논다니까. 눈 마주치면 기분 나쁘게 웃기나 하고.”

그러니까 내 등에 쌓여 있는 이 상자들은 모두 오형석의 작품이라 이거지. 덕분에 몸은 숨길 수 있었다만 소유주가 오형석이라니 왜인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작게 어깨를 떨었다.

그러자 어깨에 위태롭게 걸쳐져 있던 상자 몇 개가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어?”

아, 제발. 붙잡아 보려 해도 이미 버스는 떠나간 뒤였다. 졸지에 엎드린 모양대로 남자 놈들에게 둘러싸인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어버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후다닥 머리를 팔로 감싸 숨어버렸다.

“야! 얘 뭐야? 너 괜찮아? 왜 여기에 깔려 있어?”

“얼어 죽은 거 아냐?”

“미친놈아. 한여름에 동상 걸리는 사람 봤냐?”

“왜! 있을 수도 있지!”

“아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야! 괜찮아? 정신 있으면 일어나봐!”

제발, 제발 그냥 모른 척 지나가라고 빌고, 빌고 빌었다. 하지만 지나가던 정체불명의 어린놈들은 시신경도 젊은 건지 박스 밑에 웅크리고 있는 나를 귀신같이 발견하고는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

마음 같아서는 기절한 척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이미 눈을 마주쳐 버린지라 꼼짝없이 다리를 딛고 바로 설 수밖에 없었다.

“애냐? 아니면 컨셉질하냐? 달밤에 여기서 뭐 하냐?”

“그, 그게….”

“도와줬는데 고맙다는 말은 어디다 갔다 팔아 치웠어?”

“고, 고마워.”

고마움 따위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너희 갈 길이나 가지 왜 아는척해서 쪽팔리게 만드냐고 화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양심 없는 놈으로 전교에 소문날 것 같아 이를 악물고 빈말을 시전했다.

씨알도 안 먹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아이들은 꾸깃꾸깃 구겼던 인상을 풀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 너 박윤진 아냐?”

걔 중 가장 키가 크고 덩치 좋은 놈이 아는 체를 해 왔다.

나는 쟤를 아무리 봐도 초면인데 쟤는 나를 어떻게 아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덩치를 마주 바라보았다.

“응? 어. 어떻게 알았어?”

“학교에 너 모르는 애도 있었냐? 교문 앞에 붙어 있는 전단지도 알걸?”

“…….”

“어쩐 일로 두 놈 떼어놓고 너 혼자 다니냐? 너 걸리적거린다고 꺼지래?”

“아니야. 쌤이 잠깐 불러서 교무실 갔다가 돌아가는 길인데….”

“그래? 김규하랑 권시훈은 뭐 하는데?”

이놈이나 저놈이나 나를 보면 권시훈 김규하가 떠오르는지 어째 한 번을 거르질 않네.

“차, 창고에. 정리한다고.”

“걔네 둘이? 와, 미친. 진짜 안 어울리네.”

“그러게….”

눈을 내리깔고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갈 길이 멀겠다?”

“으응? 아니야. 별로 안 먼데.”

“그래? 아까 다친 건 괜찮고?”

“응. 괜찮은데?”

내 대답을 들은 녀석들은 무슨 꿍꿍이를 꾸미려는 듯 서로를 흘긋거리더니 이내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이야. 픽픽 쓰러져서 맥도 못 추게 생겨 가지고 꽤 한다?”

“…무슨 뜻이야?”

“난 또 두 새끼 사이에 껴서 빌빌대길래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찐따인 줄 알았잖아.”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그 망할 ‘병약 미소년’ 연기한답시고 조용히 있는 걸 찐따로 생각하다니. 어리석기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네. 모르긴 몰라도 저 녀석 성적은 썩 좋지 않을 거야.

“…나 찐따 그런 거 아닌데.”

“야. 됐다. 됐어. 병아리가 삐약대봤자 귀엽기만 하지.”

“…….”

은근 속을 긁는 소리가 듣기 싫어 소심하게 반항해 보았지만, 웃음거리 정도밖에 되지 않았나 보다.

덩치는 나를 위아래로 기분 나쁘게 흘기고는 주머니를 뒤적여 네모진 하얀색 상자를 꺼내 들었다.

“아, 박윤진. 너 때문에 시간만 잡아먹었잖아. 진작 피방 가고도 남을 시간인데.”

“얼른 한 대 빨고 가자. 애들 기다려.”

“야! 나도 줘.”

나머지 녀석들은 앞다투어 손을 뻗어 상자 속 하얀색 막대를 꺼내 들고 다급히 입에 물었다.

가만있어봐. 저 하얗고 기다란 막대기는 어디서 많이 보던 건데? 설마 불을 붙이고 빨아들이면 니코틴과 타르, 그리고 각종 발암물질을 몸속에 퍼트려 각종 질병을 유발하고 심하면 중독에 이르게 해 인간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연초라는 것인가? 그런데 미성년자의 주머니에서 저 몹쓸 것이 나와도 되는 건가? 그것도 신성한 학교에서?

“뭐? 너도 한 대 피울래?”

너무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리고 녀석들을 쳐다보고 있으니 걔 중 한 놈이 입에 물었던 장초를 불쑥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담배 냄새는 스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지라 몸을 뒤로 물리며 인상을 구겼다.

“여기… 학교인데?”

“학교면 뭐. 어차피 아무도 없는데. 걸리면 튀면 되는 거고. 깜깜해서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할걸.”

놈들은 뭐가 웃긴지 담배를 꼬나물고 저들끼리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그 틈바구니에서 나만 웃을 수 없었다.

주먹을 말아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 깊은 한편에서 양심이라는 것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입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고등학생 흉내를 내고 있다지만, 주민등록상 엄연한 성인이고, 어른으로서 이 나라의 청소년들이 엇나가는 작태를 간과한다는 것은 안 될 일이잖아.

“미자가 담배를? 그것도 학교에서. 너 양아치인 거 자랑해?”

“뭐?”

“피울 거면 내 눈에 띄지 않는 데서 몰래 피우든가. 아니면 지금 당장 불 꺼.”

“오- 박윤진. 너 원래 이런 캐릭터였냐? 얌전한 얼굴로 기어오르는?”

“이게 어디서 누구한테 기어오르네, 마네야. 아직 머리에 피도 덜 찬 놈이.”

“…뭐?”

미친. 어쩌자고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려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니. 윤진아.

황당+어이없음+분노가 뒤섞인 아이들의 얼굴을 차례로 살피다 이 뒤의 일이 앞에 그려지는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아니라고 부정해 봤자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다. 나는 확신의 꼰대였다. 그것도 욱하는 마음에 상황판단 못 하고 내질러버리는 중증 꼰대.

“와, 박윤진. 방금 개꼰대 같았던 거 알지?”

“말본새 대박이네. 까고 보면 서른 몇 살 아저씨 아니야?”

…맞아. 역시 뇌가 젊어서 그런가, 눈치도 빠르구나.

“하하하….”

여차하면 도망갈 요량으로 티 안 나게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며 하하하 억지웃음을 흘렸다.

제정신이 돌아오고 나니 후회가 밀려왔다. 어린 학생들 앞에서 이런 말 하기 좀 없어 보이긴 하지만, 나보다 큰 놈들 틈에 끼어 있으니 자연스럽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건 절.대. 내가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본디 동물은 저보다 덩치가 큰 존재에게 위협감을 느끼기 마련이기에 말하자면 일종의 본능 같은 것이다.

“어디 가냐? 기분 잡치게 해 놓고 튀려고?”

“어? 어어. 아니, 그건 아닌데… 이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아서.”

하지만 도주는 시도조차 해 보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막 거리를 벌리려고 했는데 덩치가 내 팔을 움켜잡았기 때문이다.

“이야기마저 하고 가. 너는 머리에 피가 다 만들어지셔서 남의 일에 고나리질 가능한 건지 지껄여보라고.”

“그, 그건 아닌데….”

“아닌데?”

“미안. 아까는 말이 헛나왔어. 알다시피 내가 몸이 좀 약한데 특히 기관지가 약하거든. 그래서 담배 냄새가 유독 쥐약….”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하지. 왜 선 넘는 소릴 씨부려서 기분 잡치게 하냐고.”

“미, 미안….”

“이제 와서? 너 참 세상 편하게 사네. 미안하다 하면 내가 ‘어, 그래’ 하고 보내 줄 줄 알았어?”

잡힌 팔을 뿌리치려 흔들어 보았지만, 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떨쳐지기는커녕 더 세게 움켜잡는다.

“놔, 놔줘….”

피가 통하지 않아 손끝이 하얗게 변하고 저릿해져 눈꼬리에 찔끔 눈물이 맺혔다. 동정심 유발이라도 해 보려 애처롭게 보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오히려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둘러싼 녀석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마치 죽어가는 곤충 따위를 관찰하는 아이의 눈 같은 쎄함이었다.

하늘이시여. 대체 제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한 일이라곤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박스에 깔린 것밖에 없는데, 어째서 결과는 시꺼먼 놈들 사이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 거냐고. 따지고 보면 난 피해자라니까?

“저기… 얘들아.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간섭할 생각은 없었어. 사과할 테니까 좀 놓아주면 안 될까.”

먹힐 리가 만무한 부탁이겠지. 그렇지만 더 두었다가는 정말 손이 괴사할 것 같다고.

“싫은데?”

으응. 당연히 싫겠지. 나라도 싫다고 할 것 같긴 해.

그나마 자유로운 게 머리뿐인지라 뇌세포를 최대한 굴리고 굴려 해결책을 강구했다. 그런데 속 터지게 다른 때는 잘만 돌아가던 머리가 아예 멈춰버린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공부 오래 하면 뭐 하나. 정작 필요할 때 써먹지도 못하는 것을.

“…….”

정처 없이 시간만 간다. 예상컨대 이대로 잡혀 있다가는 여기서 담배빵을 당하거나 소각장으로 끌려가서 먼지 나게 발길질을 당할 것이다. 아픈 것도 싫지만 조카뻘 놈들에게 반항 한 번 못 해 보고 두들겨 맞았다는 굴욕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어쩔 수 없다. 힘으로 이기는 건 말도 안 되고, 말도 통하지 않으니 남은 방법은 단 한 가지.

“아악!! 야!! 박윤진. 이 새끼야!”

육탄전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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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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