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아아아! 놔놔놔놔! 살 뜯어져!!”
“싫어! 놓을 거면 네가 놔앗!”
“아!! 이 새끼가 진짜!”
있는 힘을 다해 덩치의 팔을 비틀어 꼬집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녀석은 조금 버티는 것 같더니 이내 제 팔을 부여잡고 홱 몸을 틀었고, 나는 그 틈을 타 육상선수에 빙의해서 힘껏 체육 창고 쪽으로 내달렸다.
좀 없어 보이지만 살기 위해서는 이게 최선이야. 뇌가 일하지 않으니 발이라도 열심히 움직여야 하지 않겠어?
“이이이이익!! 제엔자앙!”
뒤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잇새로 욕설을 짓씹으며 슬슬 힘이 빠지려는 발을 더욱 빨리했다. 쫓아오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꼭 어디선가 튀어나와 내 앞을 가로막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개자식들. 도와줄 거면 깔끔하게 도와주기만 하면 될 걸 왜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어서 이 고생을 시켜. 난 너희가 착한 놈들인 줄 알았는데 속았다. 속았어!!
“으아아! 힘들어어!”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아 입을 크게 벌리고 가쁜 호흡을 헐떡였다. 소각장을 지날 때쯤 되니 상 하체가 분리되는 것 같은 기이한 감각이 뇌를 찔끔찔끔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안함 때문에 쉬이 멈추지 못했다.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시훈이 따라서 운동 좀 할걸.
과거의 나를 원망하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저만치 봐도 사람 비슷한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으아….”
살았다! 그제야 맥이 탁 풀려버려 천천히 속도를 늦추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혹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몇 번이고 어둠으로 꽉꽉 채워진 뒤를 살폈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녀석들은 앞에 있을 때나 겁박할 줄 알았지, 누군가를 쫓아가면서까지 괴롭힐 만한 의지까지는 없는 놈들이었나 보다.
마음이 놓이니 자동적으로 입꼬리가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누가 보면 실성했다고 손가락질할 것 같긴 한데 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가 웃기기도 하고, 간만에 뜀박질을 하니 몸 안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올라 개운함마저 들었다.
그때였다.
“윤진아!”
“…?”
저 앞쪽에서 권시훈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시훈아!”
역시나 내 귀는 정확하다니까. 반가움에 큰 소리로 시훈을 부르니 시원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곤 긴 다리를 쭉쭉 뻗어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시훈의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고 흰 얼굴은 발갛게 상기된 채였다. 흰 교복 셔츠 역시 군데군데 먼지가 묻어 거뭇해져 있었다. 아마 청소를 마친 후 내가 보이지 않자 직접 찾으러 나선 것일 테다. 새삼 그 걱정과 애정에 울컥 가슴이 울려 느려졌던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너무 간만에 뜀박질한 낡은 내 몸이 머리의 명령을 거부해버려 도저히 다리를 멈출 수 없었다.
미친, 이거 실화냐? 내 아무리 비루한 몸뚱이를 가졌다지만 고작 몇 분 뛴 걸로 고장 나 버렸다고?
안타깝게도 지금 내 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두말할 것 없는 현실이었다. 즉, 이대로라면 제어력을 잃은 내 몸과 마주 오는 권시훈이 몸통 박치기를 하게 될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어어!! 시훈아! 비켜! 부딪혀!”
“…뭐?”
“나 못 멈추겠어!”
“무슨 소리야? 네 다린데 네가 마음대로 못 한다고?”
“몰라몰라몰라! 얘가 미쳤나 봐! 말을 안 들어!”
“어??”
“아아악!”
당연히 영문을 알 리 없는 권시훈은 내 외침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쟤는 생각해서 충고해 줘도 왜 귓등으로도 안 듣는 거야!! 부둥켜안고 바닥 나뒹굴기 싫다면 제발! 그만! 멈춰! 아니, 비켜!
이젠 나도 모르겠다. 다쳐도 나는 몰라! 될 대로 되라 싶어 그냥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퍼억-.
“…어?”
보기 좋게 나뒹굴 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다르게 소리만 요란히 났을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먼지 냄새 속에 섞인 시원한 바람 냄새. 익숙한 공기가 확 올라와 몸을 감쌌다. 등과 허리를 단단히 붙드는 팔 힘에 제멋대로 움직이던 다리가 거짓말처럼 우뚝 멈췄다.
감았던 눈을 슬쩍 뜨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꽉 다물어 골격이 도드라지는 하관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손으로 짚은 가슴이 호흡을 고르려 위아래로 들썩이고 있었다.
함께 땅바닥에 처박히지 않은 걸 보니 시훈이 달려드는 나를 온몸으로 막아선 모양이다.
“어, 너… 괜찮아?”
“자기는 괜찮아?”
“으응.”
“저녁에 도가니탕 먹어야겠다. 본인 다리도 제대로 못 가눠서 어떻게 해.”
도가니탕과 내 몸 가누는 게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너무 진지하게 걱정하니 굳이 미운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물고 눈을 피했다.
그나저나 권시훈 힘 진짜 세구나. 아주 빠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느린 속도는 아니었는데 가속도까지 붙은 성인 남성의 체중을 몸으로 받아낸 거 아냐. 그것도 뒷걸음 한번 치지 않고. 권시훈이야말로 역학 법칙을 완벽히 거스르는 초인적인 그 어떤….
“자기야. 정신 탈출했어?”
“어, 어?”
‘권시훈은 어떻게 넘어지지 않고 박윤진을 받아내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깊은 고찰을 시작하려는 찰나, 시훈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또 딴생각하려고 시동 걸고 있었지. 나 앞에 있는데.”
“…….”
아니라 하면 거짓말이라 입술을 말아 물고 시훈을 마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시훈은 커다란 눈을 가늘게 접고 웃으며 내 코끝을 아프지 않게 살짝 잡아 비틀었다.
“아!”
“귀여워 가지고.”
“아프잖아….”
“뭐 이거 가지고 아프다고 해. 봐봐. 호 해 줄게.”
“아 됐어. 치워어.”
능글거리며 은근슬쩍 민망한 짓을 하려 하기에 밀어내려 했지만 권시훈은 재빠르게 코끝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가 내가 저지하기 전에 얼른 떨어져 나갔다.
“??”
내가 지금 꿈을 꾸나? 얘가 지금 신성한 학교에서 뭐 하는 거야?
어깨를 움츠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밀어내지도, 다가가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있던 내 어깨를 어루만지며 권시훈이 천천히 멀어졌다. 그와 동시에 집 나가려 했던 이성이 다시 짐을 챙겨 돌아왔고, 뒤이어 울컥 화가 치밀어 빽 소리쳤다.
“야. 권시훈!”
“왜.”
“미쳤어? 누가 보면 어쩌려고?”
“봐도 상관없는데?”
미쳤지. 미쳤어.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가슴을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내려쳤지만 돌보다 단단한 상박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내 손바닥만 얼얼해질 뿐.
이제 보니 권시훈은 관종을 넘어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걸 즐기는… 뭐 그런 취미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아니면 본인 상황에 대한 자각이 부족하거나.
한숨을 푹푹 쉬며 권시훈을 노려보았다. 역시나 타격은 1도 없었다.
에휴. 말해 봐야 뭐 하나. 내 입만 아프지. 나는 그냥 권시훈을 정신 차리게 하는 것을 포기하고 본론이나 알아보기로 했다.
“…여기까지 왜 나왔어. 전화하지.”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찾으러 온 건데?”
“내가 어디 갔을 줄 알고?”
“아까 반장이랑 담임 보러 간다고 이야기하는 거 들었어. 그래서 교무실 쪽으로 가고 있었지.”
“아아.”
꽤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그걸 다 듣고 있었구나.
“자기야.”
“응?”
“아무리 급하더라도 다음부터는 어디 가는지 이야기해 주고 가. 말도 없이 사라지면 걱정되잖아.”
“…응.”
“자기 안 보이면 내가 얼마나 불안한지 몰라.”
“…….”
“진짜야.”
그래봤자 잠깐이지 않냐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마주친 새까만 눈동자가 무언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등을 덮은 손으로 목덜미부터 허리까지 느릿하게 쓰다듬으며 조용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 * *
권시훈은 본인의 불안함을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교문을 나설 때부터 갈림길에서 규하와 헤어질 때까지도 마치 분리불안에 걸린 강아지처럼 내 옆에 꼭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너희 그렇게 붙어 있으면 안 덥냐?”
“네가 뭔 상관인데. 남의 일에 신경 끄고 갈 길이나 가셔.”
규하의 물음에 친절하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리는 권시훈이었다.
“질투 나니까 그러지. 나도 윤진이랑 붙어 있고 싶은데. 진짜 잘할 수 있는데.”
“미친 변태 새끼야. 가까이 오기만 해라. 어?”
“지는….”
규하는 어이가 털린다는 표정으로 우리 둘-정확히는 권시훈-을 번갈아 보다 권시훈의 서슬 퍼런 눈알을 발견하곤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망할. 하필 왜 이런 날에 일찍 가야 해서 저 염장질을 보고도 그냥 보내야 하네.”
“네 팔자지. 아, 운이 없는 거라고 해야 하나?”
“미친. 시훈 자기 너는 예쁘게 낳아준 너희 부모님께 감사해라. 얼굴만 아니었으면 진작 죽빵이었어.”
“응. 알았어. 본가 내려가면 엄마한테 절할게~”
시훈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기가 막혀 헛바람을 삼켰다. 세상에나. 저 말투가 진정 서른 살 남성의 것이란 말인가. 역시 그 빌어먹을 약에는 정신연령도 낮아지는 성분도 포함된 것이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열여덟을 상대로 저딴 몹쓸 입씨름이나 하고 있을 것이냐고.
“얘들아. 계속 싸울 거면 난 먼저 가 볼게. 실컷 입 털고 오렴.”
“아니야! 나 자기랑 갈 건데? 가지 마.”
지친 내가 슬쩍 손을 뿌리치자마자 권시훈이 도망갈세라 얼른 다시 붙잡는다.
“어어? 질투 나니까 친한 척 삼가 줄래?”
그리고 김규하는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내 속을 뒤집어 놓는다.
“그만! 그만!!”
“엉??”
“…윤진아?”
너희 등쌀에 못 이겨 내가 갑자기 사라지더라도 원망하면 안 된다.
정말이지 저 두 덩치 때문에 내가 제 명대로 못 살겠다. 어떻게 반나절을 못 참고 싸울 수 있지? 그것도 매번 다른 주제로? 이건 기운이 좋은 건지, 성질이 더러운 건지 알 길이 없다.
덕분에 중간에 낀 아무 죄 없는 나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스트레스받는 실정인데, 문제는 저 두 놈은 전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너희들 일은 너희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나 사이에 끼워두고 으르렁대지 말고. 내가 무슨 너네들 전리품이야? 나 오늘 약속 있다고! 너희랑 노닥거릴 시간 없어!”
결국 열통이 터져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사생활 폭로를 하고 말았다.
권시훈과 김규하의 눈이 동시에 나에게 향한 것은 당연했다.
“자기,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어디 가려고? 이젠 나 버리고 막 다니기로 한 거야?”
“집 가는 길에 말하려고 했어….”
시훈에게 변명하자 기다렸다는 듯 규하가 끼어든다.
“어? 윤진아. 나한테도 말 안 했잖아!”
“너는 네 집으로 가면 끝인데 굳이 말할 필요가….”
“어디 가는데? 누구 만나는데? 언제 가? 그런데 왜 가는 거야?”
“…어?”
미친 듯이 질문을 쏟아 내 대답할 새도 없었다. 입도 벙긋 못하고 있는데 권시훈이 으르렁대며 내 앞을 막아섰다.
“야! 김규하 너 아직도 안 갔냐?”
“오고 가는 건 내 맘인데 왜 네가 이래라 저래라야?”
“하. 저, 저 싸가지 없는 새끼 봐라.”
“어이없네. 누가 들으면 권시훈 네가 나보다 형인 줄 알겠다?”
“맞으면 어쩔래!”
“네가 형이면 내가 머리 싹 다 밀어 버린다!”
방금 저 말은 꽤 위험한 발언인데 김규하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으니 눈치 없이 웃을 수도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6)============================================================
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