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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37화 (37/85)

37화

약속이라고 해 봤자 별거 아니었다. 극도로 좁은 인간관계를 가진 내가 권시훈 아니면 연구소 사람들 말고 누굴 또 만나겠냔 말이다. 심 박사의 연구실에 있던 식구 중 최고참격인 안나 씨가 미국으로 유학 가게 되어 겸사겸사 송별회를 하게 되었다.

고등학생에 적응되어 있던 정신상태로 어른들의 술자리에 간다는 게 좀 어색해 가지 말까, 잠시 고민했지만, 매일 마주치고 인사하던 사람이 먼 곳으로 떠난다니 걸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나 씨. 고생 많았어. 유학 준비하랴 연구하랴 정신없었지?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

“아닙니다아. 박사님이 지도해 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과제 끝까지 하고 가면 좋을 텐데… 상황이 안 도와주네요.”

“에이. 괜찮아. 이제 막바지인걸. 자기는 앞으로 연구할 날만 남았는데 벌써 아쉬워하고 그러면 안 돼.”

심 박사는 축 처진 안나 씨의 어깨를 담백하게 두드리며 땅콩을 집어 입 속에 넣어 주었다.

“그나저나 애들이 엄청 서운해하지?”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만둔다는 소문 돌았을 때부터 하루에 네댓 번은 돌아가며 와서 난리를 치는데… 오늘은 미안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더라고요… 휴.”

“아영이랑 현우는 안나 씨 따라간다고 난리더라.”

“걔들이야 말만 그러는 거고요.”

“어휴. 걔네도 걔네인데 지후 씨가….”

심 박사가 지후 씨 이름을 말하자 순간 왁자지껄하던 테이블이 정적에 휩싸였다. 나 역시 계란말이로 향하던 젓가락질을 우뚝 멈추고 눈을 끔벅이는 심 박사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안나 씨의 눈치를 살폈다.

“네? 지후 씨요?”

“아아. 그게 말이지. 지후 씨가….”

앞자리에 앉아 있던 성재 씨가 화들짝 놀라 심 박사를 향해 거세게 도리질을 쳤지만 눈치가 좀 없는 편인 심 박사는 꿋꿋이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충격이 이만저만 아닌 모양이야. 안나 씨 간다니까 갑자기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니까?”

“네? 오늘 인사할 때도 별말 없던데.”

“그거야 나도 모르지.”

미치겠다.

저 인간은 눈치를 주고 지식을 얻은 걸까. 저 주변머리로 어떻게 박사가 된 건지 정말 연구해 보고 싶어질 지경이다.

지후 씨 역시 심 박사의 연구실에서 일하는, 입사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신입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 어찌나 어두워 보였는지 말 걸면 한 대 맞을 것 같아 슬슬 피해 다니곤 했었다. 알고 보니 심각하게 낯을 가리는 통에 받은 오해였지만.

거두절미하고 지후 씨는 밝고 쾌활한 성격의 안나 씨에게 첫눈에 반해 여태까지 짝사랑 중이었다. 이걸 어떻게 아냐면 심 박사와 안나 씨만 없던 전체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해 안나 씨의 이름을 부르며 길거리에서 대성통곡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사자만 모르는 짝사랑이었다.

“처음에는 하도 말이 없어서 묵언 수행하나 싶었는데 안나 씨 오고 나서 말도 많아지고 밝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도로 아미타불 되게 생겼다니까.”

“아….”

마음 약한 안나 씨는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며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러자 성재 씨가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으아앗! 그만, 그만! 지금 여기 없는 사람 이야기해서 뭐 합니까? 우리 이러지 말고 한잔합시다!”

“그래! 우리 놀러 왔잖아~”

“안나 씨! 빨리 잔 비워!”

부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분위기를 몰아가는 성재 씨에게 맞춰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어 젖히며 당사자의 혼을 쏙 빼놓았다. 덕분에 어영부영 지후 씨의 망령에서 벗어난 안나 씨는 얼떨떨한 채로 술잔을 비우게 되었다.

덩달아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아 손등으로 뺨을 꾹 눌렀다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쩐지 지후 씨가 안 되게 느껴졌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다.

술자리는 자정을 넘어 새벽까지 이어졌다. 다들 오늘 작정을 했는지, 3차가 되도록 낙오자 한 명도 없이 모두 자리를 지켰고, 4차가 되자 하나둘씩 패잔병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마무리 못 한 과제가 있어 중간에 도망가려 했는데, 성재 씨가 지갑을 숨겨버리는 바람에 그것도 실패하고 결국에는 끝까지 끌려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모두 돌아가고 뭔가 아쉬운 마음에 성재 씨와 나는 둔치에 자리를 펴고 앉아 N차를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박 박사님은 오늘은 어쩐 일로 멀쩡하십니까?”

“성재 씨. 그동안 맺힌 게 많았나 봅니다?”

“…네? 에이 설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냥 저는 시훈 씨가 조금 무서워서 그런 것뿐이죠. 하하핫.”

“…….”

성재 씨도 홍 박사랑 계속 같이 있다 보니 실없음이 옮기라도 한 걸까. 어째 하는 행동이 그 녀석이랑 많이 닮은 것 같네.

“박사님. 학교생활은 어떠세요? 할만하십니까?”

불쑥 성재 씨가 내게 물었다. 의외의 인물에게 의외의 질문을 받아 잠시 멍해져 눈을 깜박이다가 누가 말을 흘렸는지 짐작이 가 인상을 썼다.

“홍주석이 온 동네에 소문 다 냈나 보네. 성재 씨까지 아는 거 보니.”

“당연히 알죠! 저도 홍 박사님 랩실 소속이거든요??”

“네에. 네….”

“그래서 어때요? 애기들이랑 있으면 좀 회춘한 것 같고 그러지 않나요?”

“잘 모르겠는데….”

제대로 학교생활 즐기고 있는 누구누구가 있어 그분 뒷바라지하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는걸. 어쩌다 시간 나면 공부하고, 오답 노트 정리하고, 아이들에게 문제 설명해 주고….

“어쨌거나 부럽습니다. 제 꿈이 다시 고등학교 가 보는 거였거든요.”

“…특이한 꿈이네요.”

“고등학교 때 너무 공부만 해서… 돌아갈 수 있다면 각 잡고 놀아보고 싶어서. 하하.”

“저희 집에 누구도 비슷한 이야기 하더라고요. 그분은 1회차일 때도 놀았던 것 같지만.”

“윤진 박사님은 그때도 샌님이었을 것 같은데….”

“뭐요?”

내가 정색하며 확 째려보자 성재 씨는 팔을 앞뒤로 크게 저으며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와. 한강 진짜 오랜만에 보네!”

“말 돌리지 마시고요.”

“박사님은 모르시죠. 과제에 찌들어 새벽에 한강 다리 건너는 기분을. 왜 나만 오늘도 새벽 퇴근인지… 얼마나 서러운지 아십니까?”

“…오늘은 나보다 성재 씨가 먼저 취한 거 같네.”

몸을 한껏 웅크리며 들고 있던 맥주캔에 꽂은 빨대를 입에 가져다 댔다.

“어휴. 좀 춥네.”

아무리 여름이라 하지만 새벽의 강가를 걸으려나 슬슬 오한이 들었다. 그나마 만취 상태라 좀 덜한 것 같기도 한데, 분명 내일 감기 각이다. 집에는 들어갈 수 있겠지.

“엇. 추우십니까?”

“아니, 진짜 추운 건 아니고 술기운이 떨어져서 그런가 봐.”

“다행이네요. 저랑 있다가 감기 걸렸다고 하면 시훈 씨가 절 가만두지 않을….”

“뭔 말만 하면 권시훈이 나오네. 성재 씨 혹시 시훈이한테 관심 있어요?”

“뭐요? 에이 아닙니다. 전 그렇게 야생마 같은 스타일은 취향이 아니… 아니. 이게 아니지.”

“…?”

“큼큼! 저, 저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내가 더 물어볼까, 지레 겁먹은 성재 씨는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바람같이 저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뭐야.”

졸지에 혼자 남게 된 나는 남은 맥주를 모두 털어 넣고 반짝이는 강물에 시선을 돌렸다.

“아우… 추워라.”

아까까지 떠들썩하게 웃느라 몰랐는데 갑자기 혼자가 되니 한기가 훅 밀려 들어와 무릎을 끌어당겨 팔로 감쌌다.

일렁이는 불빛이 더 선명히 다가오며 살짝 깬 것 같은 술기운이 올라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학교 가야 하는데….”

잠깐 일탈한 것 같아 후련했었는데 내일 학교를 가야 한다는 사실이 갑자기 생각났다. 이제 돌아가야 할 텐데. 곧 아침이 올 것이고 나의 하루는 다시 바빠질 것이다.

“아, 내일 주말이지.”

집을 나서기 전 ‘내일 토요일이니까 재미있게 놀고 네 발로 걸어들어와^^’라고 말했던 걸 잠깐 잊었었다.

무슨 정신으로 사냐. 박윤진. 긴장 안 하니. 간만에 현생으로 돌아오니 고삐 풀려서는 요일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말이야.

“흐흐흐….”

음흉하게 웃다가 반응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무안해져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어버렸다.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문득, 진짜 내가 누군지 혼란이 왔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어느샌가 나는 출근길 교통체증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등굣길에 우산을 가져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었고, 내 연구과제가 뭐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지경까지 왔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건가. 얼른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지나갈 일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덮쳐오는 조바심과 불안감은 익숙해지는 것조차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왜 이래. 윤진아. 너무 심각해지지 마. 방금 전까지 괜찮았으면서.”

순간 떠오르는 잡념을 떨치지 못하는 내가 한심해 자책의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다.

“…너 여기서 뭐 해?”

탄식 섞인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게 깔린 저음이지만 아직 어른이 되다 만 소년의 목소리.

고개를 들어, 내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검은색 후드를 깊게 눌러써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새벽녘 강바람을 집어삼키는 짙은 풀냄새. 어딘가 시린 공기를 품은 아이.

“…규하? 네가 왜 여기 있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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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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