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 아이는 대체 시간이 몇 시인데 하필 왜 여기에 있는 것이며, 하필 왜 나를 만난 것인가. 그리고 왜 저렇게 눈썹이 위로 올라가 있지?
규하는 후드를 뒤로 젖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올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이 아이를 안 동안 저런 표정을 지어 보인 적이 없어 낯선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화 난 건가. 굳은 표정을 보니 좀 무서워서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손을 더 단단히 쥐고 고개를 숙였다.
“윤진아.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이 시간에 왜 이런데 앉아 있어?”
“너, 너야말로 왜 여기 있는 건데?”
“여기 우리 동네야.”
“…어?”
그렇구나. 음, 그래. 너희 동네니까 산책 나왔을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지금 시간이 산책 나오기에는 좀 이른 시간… 아니, 늦은 시간 아닌가. 그리고 왜 하필 이 강둑이야? 여긴 인적도 거의 없고 불빛도 없는데. 집 나간 개라도 찾으러 나온… 아니다. 혹시 여기서 연애질이라도 하려고?
“다시 묻는다. 박윤진. 왜 여기 있는 거야?”
심드렁한 녀석의 목소리와 어딘지 모르게 스산한 분위기에 순간 할 말을 잃고 규하를 올려다보았다. 달빛에 구겨진 얼굴이 비치며 꽤 이채로운 인상을 만들어 내었는데 그게 또 그렇게 멋져 보였다.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네… 지금 혼나는 중이라는 것도 잊고 입을 반쯤 벌린 채 규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 어… 나 여기 술 마시러 왔지. 술.”
이미 취기에 날아가 버린 이성은 상대방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고 막말을 쏟아 냈다. 다행히 화자인 나는 이 말의 문제점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뭐? 술???”
“이- 거.”
손에 든 맥주캔을 흔들어 보이자 규하의 한쪽 눈썹이 삐죽 솟아오르며 인상이 팍 구겨졌다.
아니, 그런데 왜 표정이 저따위야. 성인이 술 좀 마시는 게 뭐 어때서!
“야. 윤진아. 대체… 나한테 이런 거 자랑해 봤자 칭찬해 줄 수 없어. 그리고 왜 맥주캔에 빨대를 꽂아 마셔. 이러니 취하지.”
“으응? 아니야. 나 보기에만 이래. 많이 안 취했다구….”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너 여기 혼자 왔어? 춥지도 않아? 이 새벽에 반팔 입고 계속 있었던 거야?”
“규하야. 하나씩… 좀.”
“하, 박윤진. 너 제정신이야? 앓아눕고 싶어서 환장했지!”
평소의 김규하의 다정하고 느물거리는 말투와 달리 아이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이 서 있었다. 너무 놀라 눈만 끔벅거리며 바라보고 있자, 내가 뭐라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와다다 자기 할 말만 쏟아 낸다.
“아, 아니. 아까 성재 씨랑 같이 있었는데… 없어져 버려서.”
“성재 씨? 성재 씨는 또 누구야. 아니, 그 새끼는 왜 너만 버려두고 간 건데. 다들 제정신 아니네.”
“아니야. 금방 온다고 했어.”
“금방 오고 말고를 떠나서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만취한 사람 두고 간 것부터가 문제 아냐?”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그 사람이 멀리 가버렸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가만히 기다리다가 잠들어 버리면 큰일 나잖아!”
고래고래 화라도 낼 것 같은 얼굴이라 잔뜩 쫄아서 몸을 움츠렸는데 난데없이 어깨에 따뜻한 기운이 닿더니 몸 전체로 훅 끼쳐 들어왔다.
규하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깨를 그러쥔 것이다.
“그 사람이 간다고 했을 때 따라가든가 아니면 누구를 불렀어야지. 내가 여기 안 지나갔으면 너 여기서 동사하는 거야. 술 먹다가 강바닥에서 동사하면 참 보기 좋겠다. 응? 내 말 듣고 있어??”
머리칼을 연신 쓸어넘기며 조잘조잘 잔소리를 쏟아 내는데 얘는 원래 떽떽이로 태어난 것이 틀림없다. 엄마 배 속에서 나오면서도 떠들떠들 말이 많았을 거야. 아니면 사실 래퍼의 꿈을 갖고 있다든가.
술기운에 반절은 못 알아듣겠어서, 꿇어앉은 규하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쩐지 그 눈을 보니 긴장이 풀려 진짜로 눈이 감길 것 같았다. 눈높이가 맞춰진 아이의 눈에는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응. 그러게. 잠들면 안 되는데.”
“어어어어? 눈 감기고 있는데? 윤진아! 박윤진! 형!! 일어나봐!!”
“너 왜 나한테 형이래… 너 내 나이 알어?”
“어? 아, 아니. 내가 말실수했어.”
“으응….”
“아무튼! 일어나 봐. 어? 자지 말고오!”
눈꺼풀이 원래 이렇게 무거운 거였었나. 어떻게든 눈을 뜨려 눈에 힘을 팍 주고 부릅떠 보았지만,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거기다 혀가 자꾸 꼬여 들어가고 어지러워 죽겠는데 규하가 자꾸 흔들어 대는 바람에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 멈추길 반복했다.
“안 자. 안자니까 흔들지 좀 마아.”
“아파? 미, 미안.”
짜증 나서 조금 칭얼대었다고 얼른 어깨에서 손을 떼고선 사과를 한다.
슬쩍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내가 잘못되기라도 했을까 봐 쩔쩔매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커다란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할 말을 찾는 게 너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게 어차피 져줄 거면서 역정은 웬 역정이야. 귀여운 놈.
“안 아퍼. 그냥 좀 어지러워서.”
“괜찮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좀 잡고 있을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어깨를 잡아 자기 쪽으로 슬쩍 끌어당겨 왔다. 나는 본의 아니게 규하가 어깨에 머리가 닿은 꼴이 되었다.
아까부터 코에 맴돌던 시원하고 청량한 향이 폐부를 통과해 온몸의 혈관을 타고 퍼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마치 고요한 숲속에 와 있는 듯.
“향 좋네.”
“어? 무슨 향?”
“너 무슨 향수 써? 되게 냄새 좋다.”
“아, 윤진아. 간지러워.”
장난스럽게 가슴에 코를 박고 킁킁대자 간지러운지 가슴이 가볍게 들썩이며 큭큭대기 시작했다. 답지 않게 장난기가 도져 허리를 둘러 감고 힘을 주어 꽉 끌어안아 버리자 ‘윽’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어쩌냐. 이 형. 취했네.”
“아, 아니라니까.”
“말도 안 돼. 안 취했는데 이렇게 매달린다고? 인사불성 되어서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거 아냐? 권시훈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고?”
“아니라니까아!”
“아, 알써 알써! 알았다! 아니야. 아니다. 그러니까 쉿.”
별안간 폭주하는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 어깨를 잡고 있던 아이의 오른손이 나의 뒷머리를 덮어오며 천천히 아래위로 움직였다.
느릿한 손길에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고개가 꺾이는 것 같아 떨어지려고 바르작대었지만, 잡은 힘이 너무 세서 움직일 수 없었다.
“큰일 났다. 권시훈이 알면 난리 나겠네.”
“시훈이가 왜….”
“너랑 눈만 마주쳐도 질색하는데 이러고 있는 거 알면 진짜 뒷목 잡고 기절할걸.”
“아… 그런가. 그러겠네. 시훈이 보고 싶다.”
아이는 다시 조용히 웃었다. 웃을 때마다 호흡에 맞춰 옷자락이 움직이며 온기가 올라왔다.
“진짜, 형 술 끊어야겠다.”
“왜… 내가 뭐 어쨌는데.”
“앞뒤 상황이 어땠건 간에 결국 권시훈한테는 나만 나쁜 놈 되니까 하는 말이야.”
목소리에 억울함이 살짝 묻어 나왔다.
그런가. 아, 그럴 수도 있겠네. 권시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이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 손을 잡아줄 거니까. 지금 잠깐 정신을 놓았더라도 살짝 째려보고 몇 시간 동안 잔소리를 늘어놓을 뿐, 결국에는 다시 날 안아 줄 테니까.
“에이. 의미 없다. 사심 채웠으니 이제 시훈이 불러야겠다. 내 폰으로 전화해도 되지?”
“웅?”
“…됐다.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지금 집 가면 안 되는데… 나 오늘은 맨정신에 들어가기로 했단 말야.”
“이미 틀린 것 같은데. 그냥 좀 혼나고 말아. 내일 아침 되면 잊어버리겠지.”
나를 안은 채로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는 게 권시훈을 부르려는 모양이다.
“저기, 그런데 넌 왜 여기 있어?”
“…아까 말했잖아. 여기 우리 동네라고.”
“너희 동네인 건 나두 아는데 왜 이 시간에 나와 있냐고.”
“그건 몰라도 돼.”
“칫.”
“말해도 기억 못 할 거잖아. 지금 내가 형이라 부르고 있는 것도 기억 못 할 거면서.”
“기억 못 할 거니까 말해 봐.”
“집안일이야. 그냥 남들 다 겪는 집안일. 이것저것 복잡해서 바람 쐬러 나온 거야.”
“그렇구나….”
집안일. 그러고 보니 규하가 본인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심지어 친구 사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가족관계라든가 사는 곳-은 방금 알았다-, 하다못해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처음 제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규하는 참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하고 싶지 않아 보여 굳이 묻지 않았다. 그런 거 모른다고 김규하라는 아이를 모르게 되는 건 아니니까.
“여보세요? 어, 시훈아. 나 규하. 안 자고 있었네? 졸다가 깼냐? 미안미안. 야! 끊지 말고 있어 봐. 나 윤진이랑 같이 있어. 뭐? 아니아니. 지나가다가 우연히 봤어. 응? 뭐 하고 있었냐고? 수변공원 있는 데서 맥주 마시고 있던데? 하. 미친 나랑 마셨겠냐? 지나가다가 만났다고 했잖아. 내가 왜 지나가고 있었는지는 묻지 마시고… 어, 여기로 온다고? 아니야. 위치 설명하기가 애매해서. 내가 그냥 윤진이 데리고 그쪽으로 갈게.”
독백 같은 규하의 목소리가 점점 저 멀리 달아난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정신 차리고 집에 가야 하는데… 의미 없는 말을 입 속에서 끝없이 굴리며 눈을 끔벅끔벅 감았다 떴다.
“윤진아. 지금 너희 집으로 갈 거야. 걸을 수 있겠어?”
어느새 통화를 끝냈는지 규하가 나에게 물었다.
“으응…? 응. 네 마음대로 해.”
“…뭐라고?”
“알았어. 시훈아. 나 좀 자고 있을게. 집에 도착하면 깨워. 뽀뽀해 주께.”
“허… 이 형 진짜….”
분명 맨정신에 들으면 놀랄만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잠이 쏟아져서 도저히 집중이 안 된다. 심지어 내 앞에 있는 아이가 김규하인걸 뻔히 알고 있는데도 입으로 자꾸 권시훈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가자.”
내 기억의 마지막은 발끝이 붕 뜨는 기분으로 끝나버렸다.
그 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었을 때도 나는 김규하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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