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눈꺼풀을 슬며시 밀어 올려 눈을 떴다.
“…….”
새하얀 천장에 새하얀 벽, 벽과 대조되는 새까만 커튼과 가구들. 여기가 어디지. 분명 낯익은 곳인데 밤사이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린 건지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어디 아픈 데는 없으니 병원은 아닌 것 같고, 팔을 꼬집어 아픈 걸 보니 죽은 것도 아니다.
가만있어 보자 내가 어제 뭘 어쨌더라….
팅팅 부어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을 느리게 껌벅거리며 어제의 기억을 하나둘 더듬어갔다.
성재 씨가 화장실을 찾아 사라지고 김규하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다. 왜 왔는지는 모른다. 그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대화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일찍도 일어난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어 단번에 허리를 세워 앉았다.
일어나 보니 그제야 여기가 내가 매일 밤 등을 누이고, 아침이 되면 쌍욕을 날리며 몸을 일으키는 내 방, 내 침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급히 몸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모두 옷은 입고 있었다. 그런데 내 옷치고는 품이 좀 컸다.
“그거 내 옷이야. 자기 옷은 너무 작아서 갈아입히기 힘들더라.”
지금 이 상황에 입고 있는 옷이 내 옷이 아닌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상하다. 내 마지막 기억에는 김규하가 있었고, 권시훈은 없었는데 어떻게 집에 돌아온 거지?
의아해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며 방안을 살폈다. 그러다 저 의자 끝에 걸터앉아 꾹꾹 눌러 담은 화를 차마 내뱉지 못하고 내 몰골을 노려보고 있는 권시훈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많이 잤니?”
“토요일이니 시간 신경 쓰지 말고 재미있게 놀다 오라고 했지. 정신 놓으라는 말은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그… 나 어제 진상이었어?”
“잠은 얌전히 잘 자더라. 그게 더 열받아.”
“다행이네….”
“다행?”
“…미안.”
가시방석이 참 아프네. 엉덩이가 따끔거리는 것 같아 괜히 몸을 들썩였다.
정황상 내가 집에 돌아온 경로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었다.
1. 권시훈이 누군가의 연락을 받고 이를 갈며 나를 데리러 왔다.
2. 권시훈한테 내가 맞아 죽을까 봐 걱정되었던 누군가가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둘 중에 어떤 경우라도 썩 달갑지 않은걸. 어쨌거나 결론은 권시훈의 분노로 끝날 거잖아.
“얼굴 부었어.”
어, 그렇겠지. 과음에 그토록 오랫동안 추위에 떨었으니… 뺨을 손으로 만져 보니 마른 흙바닥 같은 푸석한 감촉이 느껴졌다. 술이 온몸의 수분을 다 뺏어가 버린 것 같이 목 안이 칼칼하고 손끝도 말라비틀어진 듯 따가웠다.
“그런데… 나 집까지 어떻게 온 거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억이 안 나서….”
내 입으로 잘못을 고백하긴 좀 그래서 슬슬 눈치 보며 돌려 물으니 눈썹을 바짝 세운다.
“기억이 안 나?”
“…미안.”
“새벽 2시쯤인가에 김규하가 전화 왔더라. 박윤진이 술에 많이 취한 것 같으니 자기가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헉… 규하가?”
“뭘 놀라. 어제 김규하랑 같이 있었던 거 아니었어?”
“우연히 마주친 것까진 기억나는데… 그다음은 잘 모르겠어.”
미치겠네. 혼잣말을 내뱉은 시훈은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은 당연했고.
“…무슨 이야기 했는지도 전혀?”
“으응….”
“흐음….”
시훈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더니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흡사 탐정에 빙의한 듯한 모습이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는데, 그랬다간 진짜 한 대 맞을 것 같아서 잠자코 시훈의 턱 끝만 바라보았다.
“생각할수록 이상하네. 자기야 회식이었다 치더라도 걔는 학생인데. 그 시간에 밖엘 돌아다닌다고?”
“…왜 나와 있냐고 물어봤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
“별 도움은 안 된다.”
“응. 알아서 말 안 하고 있었던 거야.”
나도 좀 궁금하긴 했지만 이미 날아가 버린 기억을 붙잡아 올 수도 없고, 이제 와 규하에게 연락해 ‘그 새벽에 왜 강둑을 서성이고 있었는지 다시 설명해 주지 않을래?’라고 물을 수는 더더욱 없어 마른침만 삼켰다.
사실, 기억나는 게 하나 있긴 했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짙은 눈동자와 번뜩 빛나는 눈빛. 차림새가 어둠의 자식 같아서 일지 몰라도 정신 줄을 놓은 상태에서도 그 쎄한 느낌만은 확실히 떠올랐다.
“자기야.”
“응?”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김규하 그 새끼 좀 쎄하지 않아?”
하마터면 너도 그렇게 느꼈냐며 반색할 뻔했다. 하지만 여기서 티 내면 김규하한테 관심 가졌다고 또 질투할까 봐 모른 척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는데… 늘 웃는 상이라 친절한 애구나. 생각은 했지.”
“친절? 허.”
내 평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시훈은 크게 실소를 터트렸다.
“자기 한정 ‘친절 다정’이겠지. 나한테는 절대 안 그래. 자기, 자기 하면서 기어오르다 수틀리면 째려보기나 하지.”
“걔 눈이 좀 그렇게 생겼잖아. 가만히 있어도 오해받는다고 얼마나 속상해했는데.”
“…참나. 애인 앞에서 다른 남자 편드네?”
“규하가 남자니? 걔 애기야! 나이 차이 얼마나 나는지 굳이 말로 해야 알겠어?”
“사랑에는 국경과 나이가 없는 법인데….”
“아!! 쫌!!”
기어코 매를 벌지! 방금까지 시한폭탄이라도 안은 것처럼 불안하고 큰 죄를 지은 것 같이 가슴이 조마조마했는데 권시훈의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듣고 나니 미안함은커녕 짜증만 솟구쳤다.
정말 저 능구렁이를 어떻게 해야 하지. 권시훈도 그렇고 김규하도 그렇고 이쯤 되면 나한테 능글남을 끌어들이는 페로몬이나 유전자가 있는 게 틀림없다.
나는 이를 빠드득 갈며 내 애인을 노려보았다. 시선을 느낀 시훈은 눈을 천장 어디쯤 두고 딴청을 부리다 슬쩍 말을 돌렸다.
“아무튼 조심해. 내가 늘 그랬지? 남자는 다 늑대라고. 자나 깨나 남자 조심하라고.”
“시훈아. 나도 남자야….”
“본인을 본인이 꼬시진 못하잖아.”
“하아….”
“김규하는 위험인물이야. 걔는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 홀리는 재주가 있어.”
“넌 영화감독이면서 꼭 도사님처럼 말하니.”
“김규하 등에 업혀 오는 거 보고 진짜 눈 뒤집히는 줄 알았다. 한밤중에 걔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어이없었는데 우리 자기는 아주 인사불성이 되어서 사랑하는 애인도 못 알아보더라?”
심드렁하게 권시훈의 말을 듣고 있다, 난데없이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어 다급히 되물었다.
“자, 잠깐. 잠깐. 내가 규하한테 업혀 왔다고? 그 정도로 많이 마시진 않았는데.”
“자기야. 모든 술에 빨대를 꽂고 마시면 더 빨리 취해.”
“뭐? 그런 근거 없는 낭설은 누가 만든 건데.”
“내가.”
“…….”
“아무튼 다시 보고 싶은 광경은 아니었어. 굳이 본인이 오겠다고 사정을 하길래 짜증 나서 맘대로 하라 했는데 막상 내 남자가 다른 남자 등에 업혀 오는 걸 직관하려니 속이 뒤틀려서 안 되겠더라.”
그래. 그 소유욕 어디 안 가지. 대판 싸우고 다신 안 본다며 짐 싸 들고 나갔을 때도 내 다친 손가락 소독해 줘야 한다며 제시간에 들어왔다가 붕대만 갈아 주고 다시 나가던 게 권시훈이란 놈이다.
“앞으로 마실 거면 나하고만 마시고 봉사도 내 앞에서만 해. 밖에 나돌아다니게 뒀더니 불안해서 안 되겠어.”
“…봉사? 왜. 내가 뭘 어쨌는데. 집에서 스트립쇼라도 했어?”
“어떻게 알았어?”
“으아아아악!”
쪽팔림이 정수리를 뚫고 폭발해 버렸다. 도저히 견딜 수 없던 나는 머리에 이불을 홱 뒤집어쓰고 베개에 얼굴을 묻고 꽥꽥 소리 질렀다.
“놀라긴 이른데. 스트립쇼 다음에 어떻게 했는지는 안 들었잖아.”
“…….”
“난 샤워 쇼라는 게 있는 줄 몰랐거든? 그런데 이따금 감상하면 꽤 괜찮을 것 같아.”
“으아아아악!”
그 후에 권시훈은 박윤진의 샤워 쇼를 마치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히 묘사하기 시작했다. 이런 것 저런 것, 온갖 -내 기준- 추태를 부리더니 종국에는 거품을 온몸에 묻힌 채로 벽을 굴러다녔단다. 마지막 말은 안 해도 될 뻔… 쪽팔림과 민망함에 이불 안에서 몸부림치자, 침대가 힘없이 흔들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 사이에 그런 섹시한 장난 정도는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잖아.”
“…….”
“다음에는 맨정신으로 부탁해. 입 씻고 기다리고 있을게.”
“아니. 안 그래도 될 것 같은데. 나 오늘부터 술 끊으려고.”
이불속에서 웅얼웅얼 앞으로의 계획을 읊었다. 권시훈의 낮은 웃음소리가-아마 기가 찬다는 거겠지- 위에서 들려왔지만 뭐라 더 말해 봤자 나만 불리해질 것 같아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좀 더 자. 난 일해야겠다.”
부스럭부스럭. 시훈이 책상으로 향하는 듯 실내화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의자 끌리는 소리가 잠깐 들렸다가 이내 주변이 조용해졌다. 어쩐지 날 보고 있지 않을 것 같아 슬쩍 이불 밖으로 눈만 드러내 시훈의 옆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시훈은 정말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무언가를 적느라 입술을 살짝 내민 채로 집중하고 있었다.
“…….”
정말 예쁘게 생겼다.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신이 하루 날 잡고 제대로 창조 한번 해 보겠다 하고 만든 완성품이 권시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권시훈은 잘생겼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날렵한 콧대, 예쁜 쌍꺼풀에 눈을 가득 채운 까만 눈동자, 웃을 때 시원하게 벌어지는 입매며, 가늘고 긴 손가락, 운동을 하는 건지 몸매까지 탄탄…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왜. 보고 있으니까 안기고 싶어?”
“헙.”
“자기 자고 일어나면 생각해 볼 테니까 얼른 눈감아.”
얼굴을 보면 농담 같지 않다가도 그 뒤에 피식 웃는 거 보면 또 농담이구나 싶어 반응하기 애매했다. 이럴 때는 그냥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상책이다. 보지도 않을 텐데 시훈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일단 자자. 자고 일어나면 뭔가 이 민망함이 사라져 있겠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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