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여름의 태양이 살갗을 뚫어버릴 것 같은 오후 2시. 홍 박사의 호출을 받고 급하게 조퇴 후 홀로 버스에 올랐다. 급한 일 아니면 하교 후 연구소로 가겠다고 하니 본인 칼퇴해야 한다며 난리를 치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일이길래 한창 학업에 열중해야 하는 고등학생을 방해하는 것인가. 하나 분명한 것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은 아닐 거라는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터덜터덜 언덕을 올랐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더워 죽겠는데 이놈의 교복 셔츠는 바람막이 소재로 만들었는지 통풍도 안 되고 땀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해 온몸이 끈적거리고 축축했다.
“아오. 이 망할 언덕. 그냥 집에 들렀다 올걸.”
겨우 기다시피 언덕을 오르고 나니 목구멍으로 장기가 죄 튀어나올 것 같이 울렁거리고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와, 이건 아니야. 진짜. 홍 박사한테 늦었다고 한 소리 듣더라도 집에 들렀어야 했어. 하다못해 차라도 가지고 왔으면 이 고생은 안 했을 거 아냐.
“에어컨… 에어컨이 필요해. 죽을 것 같아….”
매일 같이 망하라고 노래를 부르던 연구소가 이렇게나 들어가고 싶은 곳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 심정으로는 연구소에 뼈를 묻으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실험실이 춥다고 오들오들 떨던 지난날의 내 뒤통수를 갈기고 싶을 정도로 나는 찬바람이 필요했다.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질질 끌며 건물로 향했다. 주변으로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아지랑이가 이는데 눈을 감았다 뜨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점점 걸음이 빨라졌다. 그와 동시에 주머니를 뒤적여 출입증을 찾았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어. 입구에 도착하는 즉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곧바로 샤워실에서 냉수마찰부터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어 주겠어.
“이봐. 학생.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견학 왔어?”
머릿속으로 완-벽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마지막 계단을 올랐을 때였다. 등 뒤에서 지긋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네? 저요?”
“그럼 내가 학생보고 이야기하지. 여기 다른 사람이 또 있는가?”
나를 불러세운 사람은 연구소 내・외부 순찰하는 경비원 아저씨였다. 아저씨라고 하기엔 연세가 지긋하시긴 하지만… 어쨌든.
아저씨는 내가 입사하기 한참 전부터 연구소에 몸을 담고 있는 분이시다. 때문에 근무하고 있는 연구원들의 신상이나 연구소 사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연구원들은 아저씨를 ‘걸어 다니는 역사’라고 칭할 정도였다.
그러니 지금 내 꼴이 보기 좀 그렇더라도 당연히 알아볼 거라 생각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럴 것이라 믿었다.
“서, 선생님?”
그런데… 아저씨의 표정이 이상했다. 가늘게 뜬 눈, 굳게 다문 입, 허리에 얹는 손. 누가 보아도 경계의 사인이었다.
“뭐여? 학생 나 알어?”
“네?”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한 나는, 할 말을 잃고 반쯤 입을 벌린 채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학생이요? 그래. 이건 교복을 입었으니까 그럴 수 있… 아니지! 차림새는 평소랑 다르더라도 얼굴이 너무 박윤진인데? 그냥 교복 입은 박윤진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회춘이라도 했나?
“에이. 장난하지 마시고요. 정말 저 모르세요?”
“에헤이. 우리 아들이 대학교 2학년인데 무슨 수로 고등학생을 알어. 아니야.”
“선생님… 제가 무슨 고등학생이에요.”
“떡하니 교복 입고 가방 메고 고등학생이 아니라고?”
심하게 뼈를 때리는 지적에 무안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그렇네. 아저씨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전제가 있다면 나는 그저 지나가는 고딩1에 불과할 테니까.
이를 어쩐다. 해명해야 하는데 아예 처음부터 믿지 않는 사람에게 뭐라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막막해져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갑작스레 말이 없어지자 눈치가 보였는지 아저씨는 스윽 나를 흘기고선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질문했다.
“보아하니 뭐 볼일 있어서 온 것 같고만, 누구 찾아왔어?”
“아. 네 홍주석 박사….”
그런데 홍 박사의 이름을 대자마자 겨우 펴졌던 미간이 금세 꽉 구겨졌다.
“학생. 여기 어딘지 몰라? 연구소야. 연구소. 아무나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구멍가게가 아니라고. 박사님을 뵈러 왔으면 저기 경비실에 가서 방문일지를 작성하고 박사님께 따로 연락을 드려서 출입 허가를 받아야 할 거 아냐? 고등학생씩이나 돼서 그걸 몰라?”
“그게 아니라… 아니, 저기 제 말 좀 들어보세요!”
“떽! 어른 말에 말대꾸하면 못써!”
난감해 머리를 벅벅 긁어대며 한숨을 푹 쉬었다. 대충 둘러대고 눈치 주면 알아채실 줄 알았는데 지금 아저씨는 날 ‘박윤진 박사’로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이름 모를 고등학생’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저씨! 저 모르시겠어요? 박윤진이에요. 소재개발 분야 박윤진 박사요.”
“뭐?”
아저씨는 여전히 못 미더운 눈으로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이때다 싶어 존재감을 어필하는 수컷 공작새에 빙의해 가슴을 쫙 펴고 당당히 선생님의 앞에 섰다. 자, 실컷 보세요! 저 박윤진이라니까요? 얼마 전에 꼼장어에 소주도 같이 마신 윤진이라고요!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있는데 저를 이렇게 잊으시면 안 되죠!
한참을 내 얼굴 곳곳을 뜯어보던 아저씨는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긴가민가 확신이 서지 않는 모양이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지. 두 근 반 세 근 반이 되어버린 가슴을 추스르려 손톱 옆 거스러미 살을 뜯어가며 뒤의 말을 기다렸다.
“닮은 것 같긴 한데….”
“아니, 닮은 게 아니라 제가 박윤진이라니까요?”
“쓰읍. 그런데 눈매가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아! 이건 아까 수업시간에 졸아서 좀 부은 거예요. 금방 다시 돌아와요.”
“입매도 좀 다른 것 같고….”
“점심때 매운 거 먹어서요! 이것도 금방 돌아와요.”
“아니야. 아닌 것 같은데.”
“아오! 진짜 저 맞다니까요? 그만 의심하세요. 좀!!!”
답답한 마음에 결국 큰소리를 치고 말았다. 내 버릇없는 행동에 역정이 제대로 나신 듯 인상을 팍 쓰더니 내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으악!”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나는 다급히 몸을 웅크렸지만, 아저씨의 손이 훨씬 빨랐다.
“에잉! 어디서 박사님들 이름 외워와서 장난질하는 거야? 쪼그만한 게 아주 맹랑하기 짝이 없네!”
“악! 때리지 마세요!”
“너 같은, 놈은, 좀, 맞아야 해!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어? 사칭을 해!”
이리저리 피하며 반항했지만, 아저씨의 일자 눈썹이 대번에 위로 치솟으며 이번에는 내 어깨를 가차 없이 찰싹찰싹 내리쳤다.
“박사님이 뭐가 아쉬워서 고등학생 교복이나 훔쳐 입는 낯 뜨거운 짓을 하겠어? 좀 닮았다고 어떻게 해 보려는 모양인데 어림없다 이놈아!”
“아아. 진짜라니까요. 진짜예요!”
“시끄럿!”
“아아아악!”
기껏해야 손바닥이 아프면 얼마나 아프냐 하겠지만 아저씨의 손은 상상 그 이상으로 매웠다. 맵다 못해 쓰릴 정도였다. 이러다 홍 박사 만나보기도 전에 맞아 죽게 생겼네! 제발! 제발! 그만 좀 하세요. 저 죽어욧!
정말 고통을 이기지 못해 나온 눈물이 눈꼬리 끝에 맺혀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언덕 위로 익숙한 머리통이 수욱 올라오더니 터벅터벅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어! 야! 홍주석!!”
“…?”
“여기! 여기! 이리로 빨리 좀 와 봐앗!”
단연코 홍 박사를 안 지 십여 년의 세월 동안 가장 반갑고 감동스러운 만남이었다. 어떻게든 매타작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에 다급히 손을 치켜들고 미친 듯이 흔들며 홍 박사의 이름을 연구소 떠나가라 불러제꼈다. 그러자 아저씨의 손이 이번에는 뒷덜미를 꼬집기 시작했다.
“악! 또 왜요! 왜!”
“이젠 박사님 이름을 함부로 불러? 싸가지 없이?”
“으아! 홍주석을 홍주석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요!”
“그런데 이게 진짜!”
“꺄아악! 홍주석! 살려줘!!”
휘파람을 불며 여유를 부리던 홍 박사는 내 외침을 듣고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내 등뼈를 뽑아버릴 기세로 꼬집는 아저씨와 이미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놀란 토끼 눈이 되어 한달음에 뛰어와 우리 둘을 뜯어 놓았다.
“어어어! 형님. 뼈 부러져요! 그만하십쇼!”
“박사님은 가만히 있어 봐. 이런 맹랑한 놈은 좀 더 혼나야 해. 여기가 어디라고 사칭이야. 아주 가만 안 둘 거야!”
“사칭이라뇨? 얘 윤진이 맞아요!”
“…뭐? 윤진이?”
“얘 진짜 우리 연구소 윤진이 맞으니까 그만하셔도 돼요. 진짭니다. 제가 보증할게요.”
홍 박사가 아저씨의 팔을 붙잡고 간절히 만류하자 아저씨는 그제야 공격을 멈추곤 마지못해 뒤로 물러났다.
“…그럼 이 학생이 진짜 박 박사님이란 말이야?”
“네. 박윤진 박사 맞아… 학생이요? 아아.”
아저씨의 말에 나를 돌아본 홍 박사의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왜인지 기분이 나빠져 흠칫 몸을 물렸다. 하지만 옆얼굴에 꽂히는 불순한 시선은 어쩌지 못해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뭐야. 왜 저렇게 음흉하게 쳐다보는 건데. 변태인 거 인증하려고 저러는 거야? 부담스러우니까 그만 좀 봐!
“요. 윤진. 오늘은 고딩 모드냐? 교복 제법 잘 어울리는데? 형님이 오해할만하다.”
젠장. 왜 그 말 안 나오나 했다.
“…너까지 이러지 말아라. 빨리 오라고 난리 친 새끼가 누군데. 네가 재촉만 안 했어도 집에 들렀다 왔어.”
“야. 난 네가 설마 교복 입고 올 줄은 몰랐지.”
“방금까지 학교에 있었는데 당연한 거 아니야?”
“아아- 졸업한 지 하도 오래돼 가지고 고딩이 몇 시에 끝나는지도 까먹고 있었다.”
말이라고 하냐. 남의 속도 모르고 좋다고 웃는 저 새끼의 입을 확 틀어막아 버리고 싶었지만, 기운이 모조리 빠져버려 더 이상의 육탄전은 무리였다.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머리를 가다듬으며 널뛰는 호흡을 진정시켰다. 대관절 이게 무슨 난리야.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홍주석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봐, 안 하던 짓을 하니 팔자에도 없는 봉변을 당하잖아.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리고 뻐근했다. 긴장이 풀리자 오한이 도는 것 같아 양팔을 감싸 안았다. 시선을 내려 어디 더 망가진 데가 있나 싶어 몸 곳곳을 살폈다. 다른 데는 다 괜찮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매 아래로 드러난 맨살이 울긋불긋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내일 백프로 멍들 것 같은데 권시훈이 이걸 보면 뭐라고 할지 벌써부터 아찔하고 그러네. 젠장. 직장에 갔다가 나를 고딩으로 오해한 경비원님에게 두들겨 맞았다고 했다간 일 그만두고 집에서 과학 실험 키트나 가지고 놀라고 할 게 뻔했기 때문에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둘러대기에는 붉은 자국이 심했다.
하이고. 모르겠다.
일단 닥친 일이나 처리하고 나중에 생각하련다. 숙직실 뒤져보면 여별 옷이 있을지도 모르고… 정 안 되면 변장이라도 하지 뭐.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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