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아이고. 박 박사. 미안하게 됐어. 어째 이상하긴 했는데 설마 박사님이 교복 차림으로 출근할 줄은 몰랐지.”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정말 면목이 없고만.”
“들어가 볼게요. 선생님. 나중에 식사나 같이 해요.”
“어? 어. 그래요. 어서 들어가 봐.”
연신 사과를 건네는 아저씨에게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여기 더 있다가는 서로 민망한 기억만 적립될 테니 얼른 자리를 떠나는 게 맞았다. 홍 박사의 손에서 출입증을 빼앗아 얼른 건물 안으로 도망쳤다.
얼른 들어가 널브러지고 싶어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그런데 내 옆으로 홍 박사– 그러니까 홍주석이 따라붙으며 치근대기 시작했다.
“여어- 고딩. 너 좀 귀엽다? 몇 살?”
“죽을래? 헛소리하면 그냥 간다?”
“야. 진짜 어울려서 그래. 흔한 동안이라고만 봤는데 이렇게 입혀놓으니 진짜 고등학생 같다.”
“그냥 서른둘이 교복 입은 게 겁나 꼴사납다고 솔직하게 말해.”
“아니라니까?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으아아! 진짜 그만 좀 해라! 귀에서 피날 것 같아.”
더 듣고 싶지 않아 귀를 틀어막고 도리질을 쳤다.
내 거지 같은 심경을 헤아리는 것보다 건수 하나 제대로 물어 나를 놀리려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는 홍주석은 휴대폰으로 내 모습을 이리저리 찍어대기 시작했다.
뭐라 하기도 지쳐 홍주석의 연구실 문을 벌컥 열고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그래. 찍어라. 찍어. 아예 연구소 게시판에 붙여 놓지 그러니. ‘고등학생으로 회춘한 박윤진 박사.’라고 타이틀도 적어서.
“야. 시훈 씨 엄청 좋아하겠다. 알고 보면 시훈 씨가 이 프로젝트의 최대 수혜자 아니냐.”
“여기서 시훈이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니.”
“교복 입고 데이트하는 거 좀 낭만 있잖아. 청춘물 같고.”
“데이트 같은 소리 하네. 학교 다니는 ‘척’이 아니라 진짜 학교를 ‘다닌다’고요. 수업도 듣고 수행도 하고 시험도 본다!”
“헙? 진짜? 너무 잔인한데? 그 지겨운 수업을 또 듣는다고?”
“하… 나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다.”
내 고등학교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요즘 고등학생들은 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시험뿐 아니라, 내야 하는 보고서 같은 것도 많고, 심지어 프레젠테이션으로 발표도 한다. 덕분에 흉내 내기 중인 나까지 개고생을 하고 있지만 어디 가서 말도 못 하니 답답할 노릇이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가다 보니 어젯밤까지 붙들고 있던 ‘나의 관심 역사 연표’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직 반도 못 했는데 망했네. 한국사 쌤 무섭던데… 제대로 안 해가면 트집 잡힐 게 뻔한데….
“에휴.”
속이 답답해지니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다 허리를 고쳐 세우고 바로 앉았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집에 돌아가서 과제나 마저 해야지.
“잡소리 그만하고, 할 말 있으면 빨리해. 나 바빠.”
“뭐? 고등학생이 공부만 하면 됐지, 바쁠 일이 뭐 있어.”
“알 거 없고, 본론만 말해. 질질 끌면 그냥 간다?”
“아, 알았다. 알았어. 하여간 성질 급하기는.”
더 기다려 주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를 악물고 으르렁대니 홍주석은 양손을 머리 옆으로 들어 올리며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여전히 못 미더워 눈을 흘겼다. 저 자식은 자칭 신들린 연기력으로 상대방을 낚아 불러들이는 데에 도가 튼 놈이라… 영 신뢰가 가지 않는단 말이지.
“야. 박윤진. 하나 물어보자.”
“뭐.”
“…너 ‘Young’ 프로젝트에 정식으로 들어올 생각 없어?”
“나? 내가 왜.”
“왜긴. 시훈 씨 모니터링도 네가 하고 있고, 사실상 네가 이 프로젝트에 가장 깊숙이 들어가 있잖아. 기왕지사 일할 바에는 프로젝트에 이름 올리고 연구비라도 받는 게 낫지 않겠냐. 이거지.”
“…내 애인이 피실험자니까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는 거지. 굳이 이름 올려서 번거로운 일 만들고 싶지 않아.”
“아아….”
권시훈 때문에 내 연구과제도 미뤄둔 판국에 뭘 하라는 거야. 직업윤리의식이 투철한 편은 아니지만, 반 이상이 진행된 프로젝트에 이제 와 숟가락 얹는 얌체 짓은 하고 싶지 않았고, 이름 석 자 올린 대가로 논문 지옥에 끌려들어 가는 불상사도 겪기 싫었다.
그런데 이상하네. 홍주석이 박윤진에게 본인 일을 도와달라 직접 요청하다니. 자문 한 줄도 절대 받으려 하지 않았던 놈이 갑자기 제가 맡은 프로젝트에 나를 끌어들이려 한다고?
“뭐 때문에 이러는 건데.”
“아, 어?”
“여태 단 한 번도 뭘 같이 하자는 법이 없더니 갑자기 협업이라니. 네가 봐도 좀 의심쩍지 않니?”
내 물음에 홍주석은 곤란한 듯 눈썹을 늘어트리며 뒷머리를 손으로 마구 헤집었다.
“그, 네가 싫어할 것 같긴 한데.”
“뭐?”
“난 들은 대로 전달하는 거니까 원망하지는 말아라?”
“아니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우물쭈물 망설이는 걸 보아하니 내가 들으면 썩 유쾌해할 내용은 아닌 건 분명했다.
“사실 김태준 전무님이….”
“나 간다.”
‘김태준’이라는 이름이 들리기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새끼가 어디서 은근슬쩍 김태준이랑 엮으려고 수작질이야? 아무리 뒷사정을 모른다 해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윤진아! 잠깐. 이야기는 다 듣고 가야지. 이렇게 가버리면 내가 뭐가 되냐.”
내가 금방이라도 나가 버릴 것 같으니 홍주석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내 팔을 붙잡았다.
“더 듣고 싶지 않은데 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어?”
“아오. 나도 너한테 김 전무님 말 전하는 거 불편하거든? 그런데 꼭 부탁한다고 읍소를 하는데 그걸 어떻게 거절하냐.”
“홍주석이 언제부터 읍소에 마음 약해지는 캐릭터였지? 아, ‘전무님’이 부탁하니 마음이 움직인 건가?”
“그런 거 아니라고!”
“아니면 뭔데!”
화가 솟구쳐 올라 잡힌 손을 뿌리치고 홍주석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어둑한 낯빛이 아예 흙색이 되어 곤란해하고 있는데, 그것마저 짜증 났다.
“윤진아. 네가 전무님 별로, 아니 싫어하는 거 알아. 그런데 전무님은 너를 꼭 프로젝트에 넣고 싶어 해.”
“김태준과는 털끝만치도 엮이기 싫어. 그러니까 입에 그만 올려.”
“사림 말, 끝까지 좀 들어라. 어디까지나 개인감정 다 빼고 일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그 일에 내가 왜 끼어야 하는 건데? 지금 있는 연구진으로는 부족해? 그 정도로 대규모 연구는 아니잖아.”
‘YOUNG’ 프로젝트가 올해의 꽤 중요한 과업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비공개로 진행되는 연구였기에 규모가 크진 않았다. 굳이 내가 끼지 않아도 인력은 차고 넘칠 텐데, 왜 굳이 김태준에게 적대적인 나한테까지 손을 내미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그런데… 문제가 좀 생겨서.”
“문제?”
“신약 성분 배합 때문에 소재개발 쪽 자문이 필요한데 오형석 박사나 나나 그쪽 분야랑은 담쌓아서 진전이 안 되고 있어.”
“그게 뭐.”
“아씨. 눈치는 어디다 갔다 팔아먹었냐? 이다음 상황이 예측이 안 돼?”
“말을 똑바로 안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당장 개발에 진척이 없으면 시훈 씨 치료도 늦어지는 거라고! 시훈 씨 이대로 계속 둬도 괜찮아?”
순간, 머리를 누군가 내려친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아… 맞다. 나에게는 권시훈이 있었지. 지금쯤 학교 책상에 엎드려 세상모르게 자고 있을 내 애인.
프로젝트가 난항을 겪으며 신약개발에 차질이 생긴다면 시훈의 치료가 늦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테다. 초등학생 때에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성장한다는 패턴이라도 있었지만, 한 번의 치료로 패턴이 깨져버린 근래는 매일 매일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당장은 멀쩡하다가 다음날에 다시 아이로 돌아가 버릴 수도 있었고, 갑자기 할아버지가 될 가능성도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이름을 올린다는 것은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뜻인데 그렇게 되면 이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김태준과 마주칠 일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재수 없으면 나란히 앉아 논문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지. 정말이지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은데 내 개인적인 감정으로 권시훈이 피해를 보는 것도 싫다.
김태준. 개자식. 이 약삭빠른 새끼는 결국 수락할 수밖에 없도록 판을 짜놓고 천천히 코너로 몰아세웠던 것이다.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닫다니.
“윤진아. 내가 너 김 전무님이랑 마주칠 일 없게 최대한 실드 쳐 줄게. 너 찾아도 없다고 할게. 그러니까 한 번만 도와줘라.”
“…….”
“이런 부탁 절대 안 하는 거 알잖아. 나 이번 과제 꼭 성공시켜야 해. 시훈 씨도 어서 원래대로 돌아가야 할 거 아냐.”
“하아.”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쥐어 잡고 신음했다. 이랬다저랬다 갈피를 잡지 못하니 두통이 찾아왔다.
“박윤진아….”
“…….”
“윤진아아.”
홍주석의 부름에 대답할 기운도 없어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보나 마나 거절당할까 봐 멍청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보고 있겠지.
나도 참,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건지. 알겠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으면서도 혹시나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는 내가 너무 바보 같다.
“정말 자문만 줄 거야. 그 이상은 요구하지 마.”
어차피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권시훈의 안위를 볼모 잡힌 박윤진은 반항할 힘도, 거절할 권리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절대로 김태준이랑은 말 한마디 하지 않을 거니까 회의나 보고할 일 있으면 네가 눈치껏 끼든가 아니면 다른 사람 시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요구사항이라도 질러 놓아야 덜 억울할 것 같아 아무 말이나 뱉었다. 초조하게 입술을 뜯고 있던 홍주석은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내 손을 소중하게 잡아 쥐고는 굽신거리기 시작했다.
“윤진아!”
“…너 때문에 하는 거 아니야. 권시훈 때문에 하는 거야.”
“응. 알지 알지! 야. 고맙다. 네가 나 살렸다. 어떻게 감사의 뽀뽀라도….”
“아! 꺼지라고!”
네가 기어코 매를 벌지. 열 뻗쳐서 옆에 굴러다니는 휴지를 집어 냅다 던졌다. 하지만 팔 힘이 약한 건지 조준을 잘못한 건지 휴지는 홍주석에게 닿지도 못하고 어깨너머로 날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내가 진짜 잘할게. 아니, 이게 말이 좀 이상한데 아무튼 고맙다. 정말 내가 이 은혜는 꼭 갚을게.”
“갚고 말고 할 것도 없고 네 앞가림이나 잘해….”
“여부가 있겠습니까!”
“에휴….”
힘없이 문 쪽으로 굴러가는 휴지를 바라보았다. 멈출 것처럼 느릿느릿 멀어지더니 이윽고 벽에 툭 부딪혀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어쩐지 그 꼴이 나를 보는 것 같아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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