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한 번 심란해진 속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어느새 어둑해진 대로변을 걸을 때까지만 해도 저 신호등에 도착하면 걱정은 관둬야지. 하고 다짐했다가 신호등까지 다다르고 나니 저기 골목길까지만, 그다음은 집 근처 편의점까지만, 결국에는 집 앞까지 걱정을 떨치지 못한 채 오고 말았다.
난 김태준이 싫다.
김태준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좋은 감정이 아님은 분명한데 왜 굳이 옆에 두려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소재 분야 연구원이라면 본인 회사 연구소에 널리고 깔렸을 테고, 본인 구미에 맞는 연구를 하고 싶다면 제 손안에 있는 사람이 편할 텐데 어째서 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건지.
아, 혹시 싫은 걸 억지로 보면서 그 고통을 즐기는 편인가. 학교 다닐 때부터 사람 못살게 굴고 뒤에서 낄낄댔던 변태 같은 놈이니 충분히 가능할 수도.
“에효오….”
늘 그렇듯 더 고민하고 걱정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굳이 하나를 꼽자면 얼굴의 주름이 늘어난 정도이려나. 권시훈 말대로 이왕 벌어진 일,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인드로 편하게 생각하면 끝날 것을 이놈의 성격이 자꾸 발목을 잡는다.
들어가면 어두운 낯을 들켜버릴까, 아파트 입구에 주춤 멈춰 섰다. 이 얼굴 보면 분명 걱정할 텐데. 뭐라고 둘러대지.
고개를 들어 우리 집을 올려다보니 하필 불이 켜져 있어 있었다. 웬일로 오늘은 피시방 안 가고 얌전히 집에 들어간 모양이지.
어느 날, 권시훈은 자칭 타칭 옵바워치의 신이라는 김규하의 꼬드김에 넘어갔는지 난데없이 피시방 타령을 해댔다.
‘자기야아. 진짜 딱 한 시간만, 아니 한 시간은 자신 없고 두 시간만 있다 올게. 다른데 안 새고 딱 피시방만! 웅?’
‘가는 건 상관없는데, 내 말은 게임을 할 거면 집에 가서 하면 되지 왜 거기까지 가야만 하냐 이거야.’
‘집에서 혼자 게임하면 무슨 재미야! 피시방이랑은 맛이 다르지.’
‘그러니까 무슨 맛이 어떻게 다르냐고. 게임을 누구랑 같이해? 어차피 컴퓨터 앞에서 혼자 하잖아.’
‘그게…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 몰라. 그런 게 있어.’
흡사 억지 부리는 아들내미와 그런 아들을 이해 못 하는 엄마의 대화였다. 얘는 어떻게 초등학생 때보다 억지 부리는 게 심해진 것 같지. 그거 안가면 뭐 죽기라도 해?
막무가내로 우겨대는 통에 한동안 눈만 멍하게 깜박였다.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납득 불가였다.
‘대신 빨리 와. 해지기 전에. 저녁은 집에 와서 먹고.’
‘간다? 진짜 간다? 가도 되지?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
‘가… 가지 말라고 하면 하루 종일 삐져 있을 거잖아. 하고 싶은 거 다 하시고 조심히 들어오세요.’
비꼬는 거였는데 눈치채지 못한 건지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금단의 문턱을 넘은 권시훈은 내 기분이 좋아 보이면 그 틈을 타 온갖 애교를 부려가며 피시방으로 향해 한두 시간씩 게임에 매진하다 돌아오고는 했다. 그놈의 게임이 뭐라고 애교까지 동원하는 건지… 좋아하니까 내버려 두긴 했지만 이해하기에는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세계다.
돌이켜 보니 권시훈은 제 나이도 잊고 고등학교 생활에 완벽히 적응, 아니 아예 스며들어 버렸다. 점심시간 종이 울리기 무섭게 밥을 마시다시피 하고 운동장으로 뛰어나가는 모습이나, 5교시에는 티셔츠 바람으로 엎드려 숙면을 취하는 모습, 수업 끝나면 당연하게 친구들과 어울려 피시방으로 향하는 그저, 흔하디흔한 고등학생이었다.
그 옆의 나는 어떨까? 열여덟 권시훈과 어울려 보일까? 함께 있으면 위화감 없이 섞일 수 있는 건가? 말수 없고 냉기가 뚝뚝 흐르는 것도 모자라 자리에 앉아 있으면 이어폰 끼고 문제집이나 들여다보고 있으니 나라도 친해지고 싶지 않을 듯.
거기에 더해 어쩌다 말할 기회가 생기면 ‘담배 꺼. 어디 미성년자가 건방지게… ’나, ‘친구랑 사이좋게 지내야지. 싸우면 쓰나.’, ‘어허! 학생이 무슨 술이야. 성인 되면 실컷 마시니까 간 아껴놔.’ 따위의 진성 꼰대 발언만 해댔으니 다 제치고 애들 사이에 낀 아저씨처럼 보이지 않으면 다행이긴 하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울적했던 기분에 짜증까지 겹치며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엉켜 버렸다.
“쓸데없이 감상적이네. 답지 않게.”
집 앞에 서서 무슨 청승인가 싶어 고개를 저었다. 역시 생각이 많은 건 너무 힘들다.
어휴. 몰라. 아저씨든 할아버지든 어서 권시훈이 원래대로 돌아와 이 말도 안 되는 짓거리 좀 그만두고 싶다.
피곤함이 몰려온다. 이럴 때 소주 한 병 비우고 들어가면 잠 잘 올 텐데. 공원 옆 포장마차가 눈앞에 어른거렸지만, 교복을 입고 갈 것도 아니어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삑삑삑-.
“어?”
집 앞에 도착해 비밀번호를 누르고 막 현관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발아래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순간 센서 등이 나간 줄 알고 고개를 들었는데 눈앞에 하얀 얼굴과 동그란 눈을 가진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 시훈아.”
불이 켜진 것을 보았으니 당연히 집에 있다고 알고 있었지만, 막상 얼굴을 바로 앞에서 마주하니 죄지은 것도 없는데 되레 당황해버려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응. 자기야. 이제 와?”
“으응.”
“고생했네. 홍 박사님이 뭐래?”
“그냥… 별일 아냐.”
“아아. 다행이네.”
“그런데 넌 어디… 가게?”
요즘 권시훈은 일을 하는지 게임을 하는지 집에 들어오면 방 밖으로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당연히 방에 있을 줄 알았는데 현관까지 어인 일이신가 싶어 차림새를 살피니 평소에 아껴 입는다고 서랍 구석에 곱게 접어 두었던 보라색 트레이닝 팬츠에, 역시나 첫 개시인 재수 없게 생긴 고양이가 노려보고 있는 티셔츠, 머리는… 그나마 항상 쓰는 볼캡을 꾹 눌러쓴 채였다.
아무튼, 제 딴에는 굉장히 신경 쓴 착장이었겠지만 옷은 자고로 단정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내 눈에는 광대놀음 정도로 보이는 요란스러운 옷차림이었다.
“어. 자, 잠깐 이 앞에.”
“…한밤중에 요 앞에 나가는데 새 옷을 꺼내 입는다고? 너 이 바지 결혼식 때 입는다고 숨겨놨던 거잖아.”
“꺄악! 자기 뭐 해. 옷 늘어나잖아!”
하도 헐렁거려 건들거리는 보라보라 바지가 거슬려 허벅지 쪽을 주욱 잡아당기자 사색이 되어 기겁한다. 그 꼬라지가 정말이지 꼴같잖아서 코웃음이 나왔다.
“됐고, 딱 말해.”
“뭐!”
“어디 가려고 이렇게 예쁘게 꽃단장했어? 나 몰래 숨겨 둔 애인이라도 만나러 가니?”
“아니야!”
“아니면? 피시방?”
“아니야.”
“그럼… 달밤에 축구라도 하려고?”
“아, 아니라니까!”
“그럼 왜 말을 못 하는데? 자꾸 이러면 나 의심한다?”
“…….”
“열나게 하지 말고. 똑바로 불어. 나 오늘 기분 별로인 거 알지? 헛짓거리하다 피 보지 말고 똑바로 하자. 응?”
시훈은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입술을 앙다물고 눈을 이리저리 피했다. 그러나 권시훈은 박윤진이 한 번 꽂힌 건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곤 입을 열었다.
“소주 생각나서 한잔하러 나가려고 했다. 왜!”
“…소주?”
“간만에 노동을 해서 그런가. 몸에서 알코올을 부르네.”
“아주 지랄을 하네.”
시훈이 말한 ‘노동’이라 함은 방과 후 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된 ‘2학년 오합지졸 축구대회’에서 몇 시간 동안 먼지 마셔가며 뛴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네가 좋아서 뛰어놀아 놓고 노동이라고? 애들이랑 놀려니 몸이 힘들기는 한가 봐?”
“우리 팀에서 내 역할이 얼마나 큰 줄 알아? 빈틈을 놓치지 않는 스트라이커이자 하프 라인을 지키는 수비의 핵심이라고.”
“너랑 같이 운동장에서 뒹구는 애들은 다 그렇게 말해.”
“이씨. 진짜라니까!”
수업을 마치고 아주 자연스럽게 운동장으로 향하는 내 애인의 뒤꽁무니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더랬다. 피시방 가지 않는 날 = 축구하는 날로 공식처럼 정해 놓은 건지, 나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은데,
‘미안, 자기야. 저기서 좀 기다려 줄래? 금방 끝나.’
라며 나를 스탠드에 앉힌다던가,
‘먼저 들어갈래? 내가 이따 맛있는 거 사 갈게. 미안.’
하며 기다리기 싫으면 먼저 집으로 돌아가라 할 때도 있었다.
이렇듯 내 속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구니, 이젠 권시훈이 뭘 하겠다고만 하면 모든 게 다 고까워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나 두고 혼자 나가려고 했다. 이거야?”
“전화했는데 받지도 않더만.”
“그럼 올 때까지 기다렸어야지!”
“밖에서 기다리려고 했어!”
평소 같았으면 권시훈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노려보다 고개를 저으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같이 기분이 땅으로 축축 가라앉아 도무지 떠오르지 않은 날에는 예외였다. 마치 ‘소주’와 ‘알코올’이라는 두 단어가 내 뇌리에 팍 꽂혀버린 것처럼.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심란하지만 않았어도 가만 안 뒀어.”
“심란해? 뭐 때문에?”
“그런 게 있어.”
“…그래. 나가서 기분이나 풀고 오자. 지금 나갈 거지?”
“잠깐만, 나 옷 좀 갈아입고. 아, 교복은 다녀와서 빨아야겠다. 귀찮다.”
다급히 신발을 벗고 거실을 가로질러 방으로 달려 들어가 신명 나게 셔츠를 벗었다. 기껏해야 집 앞 포장마차 가는 게 다인데 어찌나 날아갈 것 같은지 오늘 종일 구깃구깃했던 기분이 쫘악 펴지는 것 같다.
아! 너무 신나! 너무 좋아! 꼼장어도 시키고 닭발도 시키고 산낙지도 시킬 거야! 뱃속에 싹 다 집어넣고 기절할 거야!
아무래도 바지를 거꾸로 입은 것 같지만 고쳐 입을 시간이 없었다. 위에 언급한 것들을 모조리 먹어치우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한다.
“빨리! 빨리 가자.”
“자기야. 천천히 가. 왜 이렇게 급해.”
“시간 없어. 빨리.”
분명 아래층에서 시끄럽다고 쫓아올 것이다. 머리로는 층간소음을 걱정하면서도 몸은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후다닥 뛰쳐나와 슬리퍼를 꿰어신었다.
“아. 맞다. 자기야.”
시훈의 부름에 당장 튀어 나가려다 눈만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시훈은 엉거주춤 선 채로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뭐야? 얼른 따라오지 못할망정 뭐 하는 거래?
“너 뭐 해? 잊은 거 있어?”
“아니, 그런 건 없는데… 괜찮아?”
“뭐가?”
“나, 가도 괜찮냐고.”
한시가 급한데 무슨 쓸데없는 소리야. 인상을 푹 구기고 시훈을 노려보았다.
“갑자기 네가 못 갈 건 뭔데? 왜? 그사이에 일이라도 생겼어?”
“아니….”
“??”
“아니다. 가자.”
시훈은 무슨 말을 더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고개를 휘휘 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마주 잡고 몸을 돌렸다. 왜인지 모르게 내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쎄한 느낌이 들었지만, 대체 그 정체를 몰라 한구석이 찝찝해진 채로 문을 나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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