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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43화 (43/85)

43화

이 묘한 쎄함의 정체를 깨달은 것은 포장마차에 도착해 테이블에 앉아 소주와 꼼장어를 주문한 이후였다. 정확히는 초록 병을 신나게 돌리다 뚜껑을 따고 각자의 잔에 술을 채운 직후였다.

“그런데 시훈아.”

“응.”

“너 술 마셔도 되는 거야? 미성년자라 안 되지… 않아?”

“자기. 너무 일찍 물어보는 거 아니야?”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눈치를 못 챘던 거고.”

“잊을 게 따로 있지. 남자친구 나이를 잊냐.”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 몰랐다.

왜냐하면 권시훈이 어디에 가냐고 물었을 때 너무 자연스럽게 술 마시러 간다 했고, 기분도 드럽고 마침 술이 고팠던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틈도 없이 권시훈을 졸졸 쫓아갔다. 그사이에 이성적인 판단이라든가, 현실 파악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걱정 마. 나 서른 살 어른 맞으니까. 전-혀 문제 될 게 없어.”

“아니야. 무슨 네가 서른이야. 너 열여덟이야.”

“민증 깔까? 몇 년생인지 보여 줘?”

“네 학생증 좀 줘볼래? 금주고등학교 2학년 권시훈 학생?”

“와, 치사하네. 그렇게 따지면 자기도 학생증 있잖아!”

“난 딱 봐도 나이 많아 보이고! 넌 우주선을 타고 가다 봐도 고딩이라고. 어?”

“사복 입으니까 누가 더 어른이고 누가 애인지 모르겠는걸? 오히려 자기가 말한 반대 아니야?”

어금니를 빠드득 물고 권시훈을 노려보았다. 여기서 콤플렉스를 건드리다니. 저건 정말 내 남친이 맞을까? 전생의 원한 때문에 내 멘탈을 탈탈 털어버리려 나타난 원수가 아닐까.

사실, 법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내가 권시훈이 성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막을 권리는 없다. 오히려 방해하는 쪽이 제정신이 아니겠지.

그렇지만! 이건 좀 그렇잖아.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버젓이 교복 입고 축구공이나 차던 놈이 보라색 추리닝을 주워입고 진지한 얼굴로 제 손바닥보다 작은 소주잔을 노려보고 있다는 게.

“아무튼 안 돼. 근거가 부족하다는 건 나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이건 아니야.”

“그럼 자기도 마시지 마.”

“왜?”

“자기도 방금까지 교복 입고 있었잖아.”

나도 참 유도리 없다. 여기는 학교도 아니고, 포장마차 안에는 이모님과 우리 둘뿐이니 양심과의 적당한 타협만 해내면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텐데, 열여덟의 동그란 눈동자와 다 자라지 않은 골격이 도저히 눈앞의 아이를 어른으로 볼 수 없게 했다.

차라리 선생으로 들어갔다면 나았을까. 뭐가 되었건 지금보단 낫겠지. 적어도 고딩 얼굴을 한 서른 살에게 훈계를 들을 필요는 없을 테니까!

“야! 나는 너 도와주려고 따라간 거잖아. 너랑은 근본부터 다르지.”

“어쨌거나 ‘나와 같은 교복을 입는 것’은 사실이잖아.”

“그래서 뭐 어쩌라고.”

“자기 혹시 코스프레 같은 거 좋아하는 편? 아니면 역할극이라든가.”

“아니! 그게 이 상황이랑 무슨 상관인데?”

“애인 도와주려고 교복까지 서슴없이 입을 정도면 꽤나 상황극에 심취해 있는… 아! 왜 때려!”

공공장소에서 절대 말하지 말아야 할 수위의 발언이 나오기 전에 권시훈의 등짝을 있는 힘껏 내려쳤다. 이 변태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본인 같은 줄 아나 봐.

“웃으면서 받아주니까 아주 끝을 모르고 기어오르지?”

“맞잖아! 자기 학교생활 엄청 즐기고 있잖아!!”

“즐겨? 내가? 하루하루 이놈 저놈 눈치 보느라 진이 다 빠져서 쓰러질 것 같은데?”

“아니라고? 여자애들이 모르는 문제 있다는 핑계로 옆에 앉으면 자리 비켜주고! 남자 새끼들이 수행 도와달라면 도와주고! 웃어주는 게! 즐기는 게 아니면 뭐야?”

“그건 또 뭔 지랄 맞은 소리래? 말 돌려서 은근히 빠져나가려고 하지 맛!”

“내가 치사해 보일까 봐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자기, 애들한테 너무 잘해 줘서 짜증 나. 자기한테 들러붙는 애들 다 집어 던지고 싶은 거 참느라 얼마나 힘든지 알아?”

‘나 질투한다.’라는 한마디를 저렇게 길게 늘여 말할 수 있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겠다. 저 개미만 한 소갈머리에 하고 싶은 말 쌓아둔다고 얼마나 답답했을까. 는 개뿔. 핑계도 핑계다워야 납득하지.

“…저기 시훈아. 네가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학교가 썩 반갑지 않은 사람이야. 내일이라도 당장 관두고 싶다고.”

“어- 그러셔? 그런 것치곤 얼굴빛이 밝던데?”

“그럼 도와달라고 오는 애들한테 꺼지라고 침이라도 뱉으란 말이야? 밖에서 보면 조카뻘인 애들한테??”

아이고. 골 땡겨. 이렇게 들들 볶이다가는 제명에 못 죽을 거야. 대체 권시훈의 머릿속에 탑재되어 있는 ‘연적’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하기야 한글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유치원생도 질투했으니 시커먼 고등학생 놈들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 버리고 싶겠지.

하지만, 그렇지만! 학급 아이들의 학업 증진을 위한 순수한 호의조차 색안경 끼고 본다면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이 문제는 권시훈이 과한 거라고. 내 잘못이 아니야.

“에휴. 됐다.”

하지만 더 입씨름해 봐야 무엇하리. 그냥 내가 져주는 게 마음 편하다. 집착도 사랑이라고, 사소한 일에도 질투가 날 만큼 내가 좋으니 저러는 거겠지.

“권시훈이 미물에도 질투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내가 참아야지.”

“그러니까 내 집착을 멈추려면 얼른 내 거해.”

“…나 이미 7년 전부터 네 거 아니었니?”

“말고. 내 말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모르겠는데.”

내 대답에 시훈은 어떻게 모를 수 있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괜히 무안해져 큼큼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결혼하자고.”

아이고.

쟤는 세뇌를 당한 걸까. 틈만 나면 결혼, 결혼 노래를 부르네.

“갑자기?”

“갑자기 아닌데. 숨 쉬듯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데.”

“…대단하다. 참.”

“유치해 보이지? 나도 알지만 어떻게 해. 자기가 나와 법으로 복잡하게 얽혀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야 마음이 놓이겠는걸.”

매우 뜬금없고 난감한 대답이었다. 농담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시훈을 바라보았다. 까만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고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것을 보니 진심인 모양이다.

“법이 아니어도 넌 나를 충-분히 잘 붙들어 매고 있고, 나도 도망갈 생각 없으니 걱정 마세요.”

권시훈은 무엇이 그리 불안한 걸까. 언젠가 나도 모르게 내 연인을 불안하게 만든 적이 있었나? 돌이켜 봐도 기억나지 않았다.

에이. 몰라. 아무리 사랑한다 하더라도 서로의 불안에 부채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권시훈의 생떼를 다 받아 줄 필요 없다는 말이다.

기분이 좀 더러웠다. 꼭 집에 무언가를 두고 나왔는데 그 물건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는 찝찝함이 가시지 않아 속이 복잡했다. 알코올의 힘을 빌려서라도 가라앉은 기분을 넘겨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모른 척 손을 뻗어 투명한 액체가 찰랑이는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그런데 막상 입에 털어 넣으려 하니 비릿하고 씁쓸한 향이 훅 올라와 음주 욕구가 확 사그라졌다. 이젠 술로도 기분전환이 되지 않는 건가.

더욱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아 잔을 내려놓고 뻐근한 뒷목을 붙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 됐다. 그냥 가자.”

“간다고?”

“오늘치 기력을 다 써서 술 생각도 안 난다. 집에 가서 자야겠어.”

내가 비척대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권시훈은 황당한 표정이 되어 아직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 꼼장어를 가리켰다.

“이걸 그대로 두고?”

“기가 차서. 산통은 다 깨 놓고 이제 와 그게 아까워?”

“내가 언제 산통을 깼어?”

“지금! 바로 지금!! 아무것도 못 하게 해 놓고 ‘내가 언제’라는 소리가 나와?”

미간을 찡그리고 으르렁대자 권시훈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런데 그 또한 곱게 보이지 않는다.

“네 말대로 우리는 현재 ‘미성년자 흉내’를 내고 있으니, ‘미성년자’답게 밖에서는 성인에게만 허락된 행위는 지양하도록 하자.”

“…뭐?”

“이 아까운 것들은 고이고이 포장해서 가져가도록 하고, 집에서 깡소주를 들이키든 소주로 목욕을 하든 마음대로 하세요.”

“와, 자기 화났네?”

“내가? 내에가? 무슨 소리야?? 아니거드은?”

말은 화 안 났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애저녁에 들켰을 것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 내 볼은 당장 뻥 터져 버릴 것 같이 열이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야. 지금 목까지 빨개졌어.”

“…….”

“벗겨보면 엉덩이도 빨갛겠는데.”

“…….”

“…한 번 보면 안 될까?”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오. 과민반응. 섹시해.”

“이익….”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등 뒤가 홧홧해졌다. 거짓말 못 하는 내 입과 불필요하게 솔직한 내 몸뚱이를 저주한다.

오늘 다시 한번 절절히 깨달았다. 박윤진은 말로는 권시훈을 이길 수 없다.

“자기야. 어디가~”

나를 부르는 시훈의 애교 그득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성큼성큼 포장마차를 나섰다. 혼자 가버릴까 하다, 그간의 정이 있으니 조금 멀찍이 떨어져 시훈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훈은 계산을 마치고 가게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발견하곤 잰걸음으로 곁에 다가와 손을 그러쥐었다.

“아, 뭔데. 놔.”

뿌리치려고 힘을 주어 흔들었지만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얘는 무식하게 힘만 세 가지고… 괜히 부아가 치밀어 올라 입을 꾹 다물고 권시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권시훈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자기야. 미안해. 생각나는 대로 지껄여서.”

“…….”

“자기가 나랑 안 놀아 주고 다른 애들하고 즐거워 보여서 서운했었나 봐.”

“…….”

“이제 안 그럴게. 응?”

“…….”

“웅? 한 번만 봐줘라.”

따지고 보면 정작 나를 방치한 건 너이고, 나는 네 뒤에서 네가 돌아봐 주길 기다리다 다가오는 아이들을 상대한 게 다인데 되레 내가 죄인이 되어버린 것 같아 마음이 쓰렸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든 간에 나의 일방적인 감정을 권시훈에게 알아달라 할 수는 없었다. 짜증 내거나 정색을 할지언정, 깊은 곳에 숨겨 둔 진짜 감정은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조곤조곤 용서를 구하는 커다란 강아지의 눈망울을 한 번 올려다보고 고개를 저었다. 웃지 않으려 했는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와 버렸다. 결국 이렇게 어영부영 넘어가게 될 거면서 왜 열을 내고 소리 질렀을까. 내가 한 번 더 참으면 되었던 거였는데. 바보같이.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딱히 감동적인 순간이라거나 내 눈물 버튼을 자극하는 멘트도 없었지만 지금 누구보다 힘이 들 내 연인의 속을 알아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나를 쿡쿡 찔러 대었다.

“알았으니까 그만해….”

흔들흔들. 흔들흔들.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그네를 태우듯 흔들며 슬쩍 곁눈질을 한다. 참, 너의 이런 약한 모습에 내가 얼마나 마음이 쓰리고 아픈지 너는 절대 알지 못하겠지.

“윤진아.”

언제 우리가 티격태격했냐는 듯 다정한 말투, 부드러운 목소리. 내려다보는 따뜻한 눈빛이 다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이럴 때마다 권시훈에게 모든 것을 숨김없이 말하고 싶은 충동을 일게 했다.

때문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혹여 내가 너에게 정제되지 않은 마음을 고백했다가 네가 상처받거나 오해할 것 같아서. 너를 믿지만, 너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지만,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내 윤진아.”

“…응.”

나를 삼켜버릴 듯 새까만 눈동자가 눈꺼풀로 인해 느릿하게 덮였다가 한숨과 함께 드러났다.

“내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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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

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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