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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남친-44화 (44/85)

44화

“야! 권시훈! 박윤진!”

진지한 대화는 대관절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나와 권시훈의 이름을 대차게 외치는 바람에 단번에 엎어지고 말았다.

“누구야?”

순식간에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른 눈을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주변이 너무 깜깜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장난인가? 그렇다면 대체 누가?

추측을 마치기도 전, 다시 외침이 들려왔다.

“이것들이 아주 정신이 나갔지? 거기 딱 서 있어라! 도망가기만 해 봐!”

목소리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밤눈이 어두운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지. 이 시간에 우리 둘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을 길거리에서 만난다고? 아는 동네 사람이라고는 경비 아저씨밖에 없는데?

아무리 집중해서 봐도 내 눈에는 시꺼먼 어둠뿐이라 고개를 들어 자칭 타칭 몽골인의 시력을 가진 권시훈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시훈은 저 너머 어딘가의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한 모양이다.

“아. 좆 됐다.”

“뭐야? 누군데?”

“부장.”

“부장? 설마 학년 부장 선생님 말하는 거?”

“아… 젠장. 저 새끼 귀찮게 물고 늘어지는 거 주특기인데.”

학년 부장? 나와는 접점이 없어 잘 모르지만 학교 내에서 크고 작은 시비에 휘말리곤 하는 시훈과 규하와는 꽤 깊은 인연이 있는 선생님이었다. 별명이 ‘미친 악어’라고 한번 의심 가거나 꼬투리 잡힐 만한 일이 있으면 자초지종이나 잘잘못을 가릴 때까지 절대 놓아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안 되겠다. 자기야. 도망가자.”

갑자기 시훈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당황한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물리며 시훈을 향해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도망가자고? 왜?”

“저 쌤한테 잡히면 오늘 잠 못 자.”

“아니, 그러니까 왜?”

“자기야. 지금 우리가 어디서 나왔는지 기억 안 나?”

“…어?”

우리가 어디서 나왔냐고? 포장마차에서 나왔지. 비록 술은 단 한 방울도 입에 대지 못했지만. 그런데 그게 뭐…?

“헙.”

입을 턱 가리고 비명이 터지려는 걸 억지로 삼켰다. 맞다. 우리 지금 학생이지. 포장마차 근처를 어슬렁거리기만 해도 비행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미성년자.

“하아. 망했네. 저 아저씨가 우리 동네 살 줄은 몰랐네. 골치 아프게.”

시훈은 진심으로 짜증이 났는지 뒷머리를 탈탈 털었다. 내 눈에도 보일까 싶어 시훈이 보고 있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확실한 건 점점 크게 들려오는 둔탁한 발소리가 우리가 있는 곳으로 아주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발걸음이 도착한 곳에는 그다지 좋지 않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이쯤 되니 의문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리가 왜 도망가야 하는 거지?

권시훈이 부장 선생님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이미 알고 있고, 지금 이 상황-포장마차에서 등장한 두 고등학생-은 충분히 오해 살 만한 상황이라는 것에는 이의가 없지만, 술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으니 따지고 보면 잘못이라고 할 게 없으니 꼭 도망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시훈아. 그냥 인사드리고 가면 안 돼? 우리가 나쁜 짓 한 것도 아닌데 도망가면 더 이상하잖아.”

옷자락 끝을 잡고 시훈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도망’에 꽂혀버린 권시훈은 고개를 저으며 몸서리를 쳤다.

“그 말을 믿을 위인이었으면 도망가자고 하겠어? 없는 죄목도 만들어서 갈구고 수틀리면 부산 내려가서 부모님 모시고 오고도 남을 인간이야.”

“그러면 어떻게 해!”

“일단 오늘만 어떻게 넘기자.”

“그럼 내일은 어쩌고??”

“내일은 내일의 내가 어떻게 해 주겠지!”

세상에. 이 무슨 무책임한 대답이란 말인가. 역시 생각 구조도 18살 애새끼랑 다른 게 없잖아.

“빨리! 가야 한다니까?”

기가 막혀 벌어진 입을 좀처럼 다물지 못하고 저를 쳐다보고 있으니 어서 가자며 팔을 잡아끌었다.

“다 들킨 마당에? 내일부터 학교 관두려고?”

“제발. 부장 만나면 곤란할 일이 있어서 그래.”

“그러니까 그게 뭔데!”

“아아. 진짜.”

권시훈은 속이 타들어 가는 듯 발을 동동 굴러가며 안달을 냈다. 하지만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듣기 전까지는 절대 가지 않을 거라 다짐하며.

“권시훈!”

부장 선생님의 우렁찬 외침이 조용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골목길에 쩌렁쩌렁 울렸다.

권시훈– 권시훈- 권시훈–

산도 아니고 메아리가 퍼질 일은 없었지만 어쩐지 귓가에 이명처럼 남아 있는 목소리에 등 뒤에 오한이 서려 어깨가 떨렸다.

“아, 진짜 이건 아니야. 자기야. 어서 뛰어!”

권시훈도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나 보다. 잡히면 정말 뼈도 못 추릴 것 같다는.

“이게 어딜 도망가려고.”

분명 권시훈은 도망가려고 했다. 했는데, 선생님이 더 빨랐다. 분명 방금만 해도 시야에 없었는데 눈을 감았다가 뜨니 어느새 우리 바로 앞에 불쑥 나타나 냅다 시훈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으악! 쌤! 놔주세요! 아파요!”

“아파? 아픈 걸 아는 놈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악! 제가 뭘 어쨌는데요!”

“어어? 모른 척을 해?”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두툼하고 투박한 손에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나는 너무 놀라 버려 차마 선생님을 말리지도 못하고 입술만 까득까득 물었다.

“너, 이놈 자식. 오늘 종일 안 보여서 벼르고 있었는데 아주 잘 만났다.”

“선생님! 보건 쌤한테 물어보세요! 저 진짜 아팠다니까요? 아파서 못 간 거예요.”

“호오. 그래? 그런데 아프다는 놈치고 너무 멀쩡하게 걸어 나오던데?”

“오늘 오후까지만 해도 죽을 것 같이 아팠어요!”

“헛소리하지 마. 오 선생이 마음 약해서 봐준 거지, 나한테 걸렸으면 어림도 없어. 어디 건방지게 당번을 빼먹어?”

“진짜라니까요?”

“오 선생한테 직접 물어봐? 거짓말이면 넌 이번 학기 내내 당번할 줄 알아.”

방금 전 권시훈이 ‘도망가야겠다.’라고 말한 이유가 당번을 피해 보려 꾀병을 부린 사실을 부장 선생님께 들켜버렸기 때문인가 보다.

부장 선생님은 학교에서 소위 ‘잘나가는’ 아이들의 건전한 학교생활을 돕기 위해 ‘금주 청소년회’를 결성-멤버는 선생님 마음대로-해 도서관 책 반납, 서류 운반 등 자잘한 소일거리를 맡겼다.

물론 그 멤버에는 권시훈과 김규하가 포함되어 있었다. 본디 두 사람은 불량한 짓을 하고 다니는 부류는 아니어서 당번이 돌아오면 꽤 성실하게 맡은 바 소임을 했지만, 나머지 놈들은 말도 없이 도망가기 일쑤였다.

결국, 그 소일거리는 권시훈과 김규하의 차지가 되었고 부당함을 참지 못하는 권시훈은 불공평한 처사라며 항의했었다. 당연히 그 항의는 개소리로 치부되고 말았지만.

아무튼 지금 권시훈은 당번을 빼먹고 보건실에서 단잠을 잔 죄가 있으니 혼나는 것이 마땅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 제삼자로서 이 상황을 신중하게 관망해 보기로 했다.

“어휴! 선생님! 애 잡겠어요. 그만 놓아주세요.”

갑자기 오형석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오형석은 온갖 호들갑을 떨며 부장 선생님에게 달려가 두 사람을 뜯어 놓았다. 비쩍 마른 몸이 나만큼 매가리 없어 보여 몰래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꽤 손쉽게 두 남자를 떨어뜨려 놓는 걸 보니 생각보다는 힘이 센 편인가 보다.

“오 선생님! 이건 아니죠. 학생이 학교를 이용해서 본인 이득을 챙겼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것도 주어진 의무를 다하지 않고! 무단으로 자리를 이탈하면서!”

부장 선생님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열변을 토했다. 무조건 본인이 옳으니 잠자코 동의나 하라는 말투였다.

“선생님.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시훈이가 몸이 약해요. 햇빛 오래 보면 실신할 수도 있고, 무리하면 바로 몸살 온다고요.”

누가 뭐가 약해? 태어나 감기 한 번 걸려 본 적 없고, 절대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가진 권시훈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지만 뱉어내지도 못해 고개를 떨궜다.

“아니, 지금 권시훈 쌩쌩한 것 좀 보세요. 이렇게나 멀쩡한데… 몸이 약하다고요?”

“겉보기에만 그래요. 지병이 얼마나 무서운지 나이가 있으셔서 잘 아실 거 아닙니까. 시훈이 알고 보면 힘든 삶을 사는 아이예요.”

“…….”

내막을 아는 자가 듣기에는 개소리의 향연이 따로 없었지만 부장 선생님에게는 꽤 잘 먹히는 설득이었나 보다. 이쯤 되니 권시훈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져 눈만 들어 앞을 흘긋 응시했다.

아, 세상에.

또 잊고 있었다. 영화감독 권시훈은 지독한 컨셉 중독자이고, 역할극에 심취해 있으며, 그런 자신을 매우 사랑한다는 것.

“쌤. 괜찮아요. 뒷목이 좀 부러진 것 같고, 혼절할 것처럼 눈앞에 뱅뱅 돌지만 참을… 만해요.”

“이런. 무리했나 보구나. 병원 가 볼래? 선생님이 바래다줄까?”

“아, 아니에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여차하면 냅다 도망갈 기세였던 시훈은 오형석의 말을 듣자마자 처연한 얼굴로 이마를 짚으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를 내었다.

“시훈아. 아까도 말했지만 넌 항상 조심해야 해.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도 당장 돌아서면 쓰러질 수 있어. 아직 약도 없는 병인데 아프면 너만 손해잖아.”

“네….”

놀라다 놀라다 더 놀랄 것도 없다. 미친. 이번에는 ‘겉보기에만 멀쩡한 병약 소년’이냐. 허우대가 멀쩡하다 못해 어지간해선 감히 시비조차 트지 못할 것 같은 몸에, 누가 봐도 혈색이 좋은 아주 건강해 보이는 얼굴로??

“…어. 권시훈. 너 괜찮냐?”

더 황당한 건 이 말도 안 되는 놀음에 속아 넘어가 버린 부장 선생님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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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린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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